이민자의 고독, 왕소군의 이름으로 견뎌낸 시간
오늘도 비가 내립니다.
창밖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잦아들수록,
내 안의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깨어나 흔들립니다.
언젠가, 나도 볼모처럼 이역만리 낯선 땅에 홀로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내 절박한 말은 누구의 귀에도 닿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의 잔소리를 듣고,
남편과 함께 늦은 저녁을 준비하며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땅은 해가 반년씩이나 제 모습을 감추는 곳이었습니다.
쉼 없이 비가 내렸고, 나무껍질엔 이끼가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푸르름은 사계절 내내 쉼 없이 번졌고,
그 적막한 풍경 속에서 나는 혼자 자랐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소리 없이 이끼가 되어갔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격리되어,
천천히 스스로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던 시간—
그 시절이 내 안에 고요히 남아 있습니다.
비가 올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 왕소군.
그녀도 어쩌면, 비 오는 날을 슬퍼했을까요.
한나라의 고요한 궁녀로 머물다,
고국과 흉노의 평화라는 명목 아래
낯선 북방 초원으로 보내졌던 이름.
사막의 모래바람과 말 울음소리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자주 고향의 푸른 강과
실크처럼 흘렀을 버드나무 가지를 떠올렸을까요.
나도 그랬습니다.
낯선 오레곤의 거리에서,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나쳐가는 그 도시에서
나는 매일 마음의 언어를 잃어갔습니다.
그 땅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숨 막히도록 푸른 숲과 끝없이 내리는 비.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꿈처럼,
내게는 늘 조금 멀리 있었습니다.
왕소군이 흉노의 들판에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면,
나는 오레곤의 작은 방에서 조용히 일기장을 채워갔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소리 없는 절규가 터져 나왔고,
때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한참을 흐느꼈습니다.
그녀가 애달픈 노래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면,
나는 찢어지는 울음을 목구멍 뒤로 삼켰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고독을 견뎌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둘 다, 볼모였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이름 없이 보내진 존재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 각자는 기어이 살아냈습니다.
저마다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거친 바람을 견디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그 푸른 땅을 떠올립니다.
왕소군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나를 조용히 안아주고 싶어집니다.
낯선 비바람 속에서 홀로 자라며
울고, 소리치고, 버텨냈던
외롭지만 단단했던 서른살 언저리의 나를.
비는 그날처럼 조용히,
그리고 끝내 멈추지 않고 창밖을 적십니다.
마치 나의 기억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립니다.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낯선 땅’에 서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고,
어떤 노래를 불렀나요.
혹은, 어떤 울음을 삼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