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아우성, 태극기가 흔들릴 때

현충일, 이국의 낯선 꽃과 익숙한 그리움

by 운조



오늘 아침, 단톡방에 태극기 사진이 올라왔다. 한국은 현충일이란다. 바로 지난주, 이곳 미국에서는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를 지냈다. 두 나라의 전사(戰士)를 기리는 날이 비슷한 시기에 겹치니, 마음 한켠이 묘하게 흔들린다.






그 순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나는 분명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깨진 껍데기 속 조각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마치 여전히 그 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는 듯.



어느 날 동네를 걷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활짝 핀 분홍빛 무궁화. 익숙한 이름, 익숙한 색, 낯선 땅에서 만난 너무나도 한국적인 꽃.


'왜 미국에 이렇게 무궁화가 많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이, 한국에서 돌아와 고향 땅에 무궁화를 심고, 그 씨앗이 퍼져 오늘에 이른 건 아닐까.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이 땅 어딘가에 심어둔 것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걸린 풍경을 마주한다. 그 장면은 나를 멈춰 세운다. 두 나라의 깃발이 한곳에서 나부낀다는 건, 어쩌면 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내 모습을 닮았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빵도 좋아하지만, 결국은 밥이 더 익숙하고, 김치가 없으면 뭔가 허전하다. 영어로도 웃고 떠들 수 있지만, 진짜 깊은 얘기는 여전히 한국어가 편하다.



유치환 시인의 시 「깃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조용하지만 강한 외침.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관식이가 애순이 앞에서 시를 외우던 순간. 투박한 말투 속 간절함. 그 장면에서 내 안의 감정이 겹쳐진다.



봄이 오면, 한국의 봄꽃들이 그립다. 어릴 적, 아버지가 정성껏 심으신 개나리와 철쭉이 울타리를 가득 메우던 기억. 그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서 타국에서 살아가는 삶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했다. 나도 여전히 이방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더 깊이 나의 ‘한국인다움’을 발견한다.


태극기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손흥민 선수가 트로피를 들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정후의 홈런에 괜스레 벅차다.

이건 단순한 본능일까, 아니면 타국에서 느끼는 뿌리 깊은 자긍심일까.




오늘은 현충일이다. 낯선 땅에서 맞는 이 특별한 날, 나는 다시금 내 안의 정체성을 돌아본다.

익숙한 그리움, 낯선 꽃, 그리고 두 나라의 기념일이 교차하는 이 시점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 대답은, 언젠가 한국에서 봤던 무궁화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내 안에서 피어난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뿌리,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





"낯선 땅에서도 잊히지 않는 마음의 국경선, 그 끝에 다시 고국이 있었다."


"오늘도 나는 태극기 앞에서, 조용히 마음을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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