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감성을 채워줄 고궁산책

무르익은 단풍이 맞이하는 덕수궁

by 해온


가을의 덕수궁



가을이 무르익었다. 서울 곳곳은 짙고 옅은 따뜻한 색들로 물들어 간다. 계절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며들지만, 도심 속에서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 있다. 바로 고궁이다. 그중에서도 동서양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덕수궁에 찾아가 보았다.


덕수궁의 단풍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과 더불어 서울 5대 궁궐로 불리며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끄는 곳이다. 또한 덕수궁은 돌담길로 유명한데, 연인이 그 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그 유명세에 한 몫 한다.


덕수궁 입구를 지나쳐 울긋불긋한 나무들이 반기는 길을 걷다보면 중화전이 나온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중화문이라는 정문을 앞에 두고 있다. 정전은 국가의 큰 행사가 치러지는 곳으로 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중화전을 정면에서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측면으로 가본다. 처마 끝이 마치 춤사위처럼 단아하게 올라가 있다.



중화전 전경.png 중화전 전경



단청과 문의 색이 가을과 잘 어우러진다. 화려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빛깔들은 고궁이 지닌 귀한 미학이다. 덧칠된 색들은 이질적이지 않고 각 계절의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임금이 사는 곳. 가장 화려해야 하지만 마냥 사치를 부릴 수만은 없다. 왕은 제일 높은 존재이지만,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궁궐의 건물들에서 그러한 절제미를 엿볼 수 있다.




저녁의 덕수궁


궁을 한 바퀴 둘러보다 보면, 어느새 하늘마저 고운 색으로 물든다. 푸른 하늘 밑 고궁도 아름답지만, 파장이 긴 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 고궁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다. 저녁이 되면 건물을 하나하나 뜯어보기보다는, 어스름으로 덮이는 실루엣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어둠은 세세한 부분을 가리지만, 그 어떤 도구보다도 한옥의 곡선을 드러내기에 제격이다.


어두워지면 켜지는 조명들도 과하지 않아 정서를 해치지 않고 감상하기에 좋다. 조명은 처마 밑을 들추고, 땅거미는 지붕 위를 덮는다. 구름이 적은 하늘이라 그 색이 더욱 아름다웠다. 기왕이면 해질 무렵에 가서 여러 빛을 머금은 궁궐을 둘러보기 바란다. 놓치기에는 아까운 풍경이니 말이다.



향로의 실루엣.png
(왼) 향로의 실루엣 / (오) 중화전의 잡상



바쁘게 변화하는 서울 한복판에서, 탁 트인 한양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덕수궁. 한국적인 건물들과 석조전이 어우러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렇듯 덕수궁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시간들이 맞물린 역사의 보금자리다. 옛날의 어느 누군가가 밟았던 땅을 고스란히 밟으며, 고궁의 냄새를 담뿍 들이켠다.


궁을 나서며 추녀마루 위에 놓인 잡상을 돌아본다. 잡상은 기와지붕 끄트머리에 줄줄이 놓이는 장식 기와로,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이다. 잡상을 설치하는 이유는 살(煞)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해가 바뀔수록 견디고 막아내야 할 것이 많아지는 지금은 저마다의 잡상이 필요한 시대다. 액운이 비껴가기를 바랐던 선조들의 바람처럼, 마음 한편에 잡상의 잔상을 품으며 산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