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서,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라는 뜻이지요.
<페르 귄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작품 속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이성적이면서 현학적인 메타포들이 어려운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비유적으로 해결책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언제나 삶에서 헤맬 때마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는 한다. 20대 초반에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은 책이 <해변의 카프카>라면.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왠지 모르게 한 켠에 언제나 <기사단장 죽이기>를 끼고서 살아왔다. 정석적인 성장소설(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를 소설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인가를 나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성장의 메타포"들로 가득 차 있는 <해변의 카프카>는 어렵긴 해도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부조리한 세계를 방황하는 소년의 성장"이었기에 막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는 처음 읽었을 때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작품이란 말인가.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단순히 하루키의 유려한 문장들을 느껴보기 위해서 읽고 또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를 <기사단장 죽이기>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불가항력적으로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번을 거듭해서 읽어가면서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가 오랜 시간 동안 굳어온 자아상(헌 이데아)을 깨고서 , 다시 변화(메타포)로 나아감으로 다시 새로운 자아(새로운 이데아)를 수립하는 회복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했다. 2권으로 나눠진 책들의 부제가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인 것처럼 말이다.
그제야 , 내가 이 책을 그렇게나 끼고 살았던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변화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방구석에서 벌벌 떨다 용기를 내 뛰쳐나와서 미친 듯이 열심히 살던 3년간의 시간처럼. 다시 그 시간을 되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와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도달한 현재가 왠지 모르게 비참해 보였으니.
열심히 준비해 왔던 취준이 생각만큼 안되고, 착실히 쌓아왔고, 많이 배워왔다고 느낀 인간관계들이 무너졌다.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압박감속에서 나는 열정보다는 과거를 바라보며 슬픔과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오며 하루하루 무력감으로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완벽하게 방향성을 잃고 표류 중이었다.
지금까지 내 길인줄 알고 별생각 없이 걸어왔던 길이 갑자기 발밑에서 쑥 사라져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허허벌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런 느낌이야.
소설은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끝까지 공개되지 않는 주인공의 이름은 하루키가 독자 스스로가 주인공에 쉽게 투영하도록 만든 장치이다. 잘 나가는 초상화 화가로 활동 중인 주인공은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공허함을 느끼고 ,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시도한다.
내가 원해서 이런 화가, 이런 인간이 된 건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사정에 휩쓸리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를 위한 그림은 그리지 않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자화상을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나는 스스로에게 애정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품을 수 있을까?
작은 조각 하나라도 좋으니,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는 우연한 계기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마주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빠져든다. 표류하고 있던 내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 그림은 뭔가 호소하고 있어요. 좁은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리고, <기사단장 죽이기>의 그림 속 기사단장은 이데아의 모습으로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주인공(독자)을 이끈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는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의 부조리 속에서 동생을 잃는다. 그 트라우마로, 그는 슬픔과 분노로 응어리진다. 유명한 서양화 화가였던 도모히코는 잠적을 한 후,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일본화풍의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은 지금까지의 그가 그려왔던 스타일과는 완벽히 반대의 스타일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에는 피가 흘렀다. 그것도 매우 사실적인 피가 넘쳐났다. 두 남자가 묵직한 고대의 검을 들고 싸운다. 아마도 개인적인 결투인 듯 보인다. 한쪽은 청년, 다른 한쪽은 노인이다. 청년이 노인의 가슴 한복판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청년은 새카만 콧수염을 가늘게 기르고 폭이 좁은 엷은 쑥색의 옷을 입었다. 노인은 흰옷을 걸치고 흰 수염을 풍성하게 길렀다.
노인이 손에서 놓친 검은 아직 지면에 닿기 전이다. 그 가슴에서 피가 세차게 솟구친다. 칼끝이 대동맥을 관통한 것이리라. 그의 흰옷이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고통으로 입이 일그러졌다. 부릅뜬 두 눈이 원통한 듯 허공을 노려본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똑똑히 알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고통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반면 청년의 눈빛은 지독히 냉정하다.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 눈빛에는 후회의 심정도 , 당혹감이나 두려움의 그림자도 , 흥분의 빛도 없다. 지극히 냉정한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이윽고 닥칠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확실한 승리다. 용솟음치는 피는 그 증거일 뿐, 청년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서양화를 그리던 작가의 일본화. 그리고 평화로운 풍경을 주로 그려오던 작가가 피로 얼룩진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작품을 기점으로, 화풍이 크게 변한다. 그는 서양화풍에서 전환한 일본화풍의 그림들을 통해서 더욱더 유명한 화가가 된다.
"사람은 때때로 크게 변하곤 합니다.
멘시키는 말을 이었다.
자기 스타일을 대담하게 깨뜨리고 그 잔해 속에서 힘차게 재생하기도 하지요.
아마다 도모히코 씨도 그랬어요. 젊은 시절에는 서양화를 그렸어요. 알고 계시죠?"
아마다 도모히코의 정신이 이데아로 살아난 기사단장은 주인공에게 온전한 현재를 살아내는 일은 과거로부터 수립된 자아(이데아)를 죽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그림 속 청년처럼 과거로부터 차곡차곡 쌓여서 응어리진 분노와 슬픔을 결연한 정신으로 한 칼에 베어내야만 온전한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것이 현재를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알려준다. 그렇게, 기사단장의 심장에서 붉은 피로 뿜어져 나오는 응어리진 분노와 슬픔은 기사단장의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현재라는 치유와 재생의 메타포로 전이된다.
<해변의 카프카>가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면. <기사단장 죽이기>는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어른들을 위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다, 스스로를 잃고 무의미하게 표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시 한번 펼쳐서 읽고 싶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