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표정에서 무관심보다는 온화함을 기대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하철을 타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지하철 속에서 나는 삶의 고통스러운 단면들을 마주한다. 무기력하게 쓰러져있는 노숙인들. 피곤에 찌들어서 퇴근하고 있는 사람들, 하나 같이 생기가 없고 죽어있는 표정들. 너무나도 외로워 보이는 노약자석의 노인들. 자신의 생계가 오늘 팔아야 할 물건에 달려있다는 듯이 부끄럼을 무릅쓰고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사람들.
그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섦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한 개의 돌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완강하게 닫혀 있는가를,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얼마만큼 고집스럽게 우리를 부정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의 밑바닥에는 비인간적인 그 무엇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하여 이 언덕들, 다사로운 하늘, 이 나무들의 윤곽이 지금까지 우리가 부여해 왔던 허망한 의미를 단숨에 잃어버리고서 이제부터는 잃어버린 낙원보다도 먼 존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세계의 원초적 적의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우리들을 향하여 밀고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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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한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기를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 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