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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Jul 03. 2024

부조리의 세계 속 _ 시지프 신화

그의 표정에서 무관심보다는 온화함을 기대한다.

카뮈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군대 내 훈련소였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인지도"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방인이라는 작품을. 나는 그저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고자 논산훈련소 복도 책장에서 무심하게 꺼내서 읽었다. 그 당시에는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소설이 다 있구나"라는 감상평을 뒤로하고 나는 책을 남겨두고 훈련소를 떠나왔다. 담배를 시니컬하게 물고 있는 중년의 남성의 표지. 그의 표정 속에서는 세상을 향한 왠지 모를 무관심과 온화함이 묻어 나와 보인다.  


 20대 초반,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뒤로하고, 군대를 전역하고 20대 중반의 나이에서 나는 그의 작품을 다시 마주한다. <시지프 신화>라는 이름의 책. 이방인의 철학적 안내서인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를 다룬다. 살아가면서 고통의 단면들을 만나본 누구라도 '부조리'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누구나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질문들. "삶은 왜 이리도 불공평한가." "삶은 누군가에게 왜 이리도 잔인한 건가" 그리고 그러한 질문을 품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미성숙하여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신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나의 삶의 고통과 원망감을 합리화하고는 했다. 스스로의 못난 모습들이 나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이 원래 그러한 것이라고. 눈을 돌려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난, 폭력, 범죄, 이기심으로 얼룩덜룩 진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라고. 그렇게 분노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살아갔다.


이러한 분노가 그다지 의미 없음을 깨달았을 때, 전혀 생산적이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자연스럽게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거기에서 멈춰 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에게 주어진 세상 속 한계 안에서 나 스스로의 자아를 꽃피워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카뮈의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 삶의 부조리함을 다루는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내가 오랜 시간 고민해 왔던 것들을 카뮈라는 작가의 명확한 문장을 통해서 해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조리. 부조리란 무엇인가. 부조리란 우리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삶의 고통의 단면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하철을 타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지하철 속에서 나는 삶의 고통스러운 단면들을 마주한다. 무기력하게 쓰러져있는 노숙인들. 피곤에 찌들어서 퇴근하고 있는 사람들, 하나 같이 생기가 없고 죽어있는 표정들. 너무나도 외로워 보이는 노약자석의 노인들. 자신의 생계가 오늘 팔아야 할 물건에 달려있다는 듯이 부끄럼을 무릅쓰고 물건을 파는 잡상인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사람들.

그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섦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한 개의 돌이 얼마나 낯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완강하게 닫혀 있는가를, 그리고 자연이, 하나의 풍경이 얼마만큼 고집스럽게 우리를 부정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의 밑바닥에는 비인간적인 그 무엇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하여 이 언덕들, 다사로운 하늘, 이 나무들의 윤곽이 지금까지 우리가 부여해 왔던 허망한 의미를 단숨에 잃어버리고서 이제부터는 잃어버린 낙원보다도 먼 존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세계의 원초적 적의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우리들을 향하여 밀고 올라온다.  
 ...  
 ...  
 나의 추론은 추론을 유발한 자명함 자체에 충실하기를 원한다. 그 자명함이란 곧 부조리이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주는 세계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 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나는 지하철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묘사한 부조리의 감성을 징명하게 느끼고는 했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부조리한 감성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사람들의 눈빛에서 삶에 대한 무력감을 느낄 때. 나와 오랜 시간 같이 살아온 다운 증후군 친구인 A가 이제는 죽을 나이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한없이 아픈 삶을 헤매고 있는 다양한 외롭고 아픈 사람들을 만날 때. 허망하고 어이없는 사고로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의 소식을 뉴스로 들을 때.  


누군가는 이런 나에게 왜 이리 예민하고 피곤하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묻고 했지만, 나는 내 안에서 맴도는 이러한 감상들을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었다.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피하려 할수록  나를 더욱더 붙잡는 면이니까. 하지만 으레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때로는 그러한 부조리한 진실들로부터 무던한 자세로 스스로의 감정을 평탄하게 만들어서 보호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가다 그의 작품들을 읽고서 , 해소감과 함께 일종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시지프 신화>는 이러한 부조리의 세상을 신에게 저주를 받아서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시지프의 신화를 통해서 설명한다. 시지프는 정상을 향해 돌을 굴린다. 하지만 정상에 도달했을 때 돌은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는 그런 상황에서 다시 돌을 굴러야만 한다. 끊임없이. 참으로 부조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카뮈는 그러한 시지프의 상황 속이더라도, 시지프 그 자신이 자신의 행동을 환희에 차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그 본인이 강인하다면, 그는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하나의 의미 있는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 희망을 가지고 강인한 정신으로 기쁨 마음으로 끊임없이 돌을 굴릴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나는 그의 표정에서 무관심보다는 온화함을 기대한다. 삶이 설령 너무나도 부조리해서 우리가 매 순간 그 부조리를 직면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시지프처럼 돌을 굴릴 수 있다는 희망이. 그 행동이 우리에게 숭고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우리가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 속이라도 서로를 사랑하고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를 바란다. 시지프 신화에서 다 올린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듯 그 희망이 다시 부조리한 귀결로 끝나더라도.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며 다시 그것들을 해나가기 위해서 끝없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시지프처럼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강인한 인간이기를 희망한다. 그러기에 나는 그의 무심한 표정 속에서 그렇게나 온화한 표정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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