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책 상징 읽기
글·그림 피터 H. 레이놀즈 김경연 옮김 /문학동네
제롬은 단어를 모은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드는 단어를 만나면 낱말책에 적는다. 제롬은 수집한 말이 많아지자 단어들을 분류해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낱말책 더미를 한꺼번에 들고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기껏 분류해 놓은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제롬은 낱말들을 모두 줄에 매달아 놓고 보았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나란히 놓인 것을 발견한 그는 그 단어들로 시를 썼다. 그리고 시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더니 사람들이 감동했다.
제롬은 많은 낱말을 알게 될수록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꿈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는 결심이 뚜렷해졌다. 제롬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지금껏 모은 말들을 모두 날려 보냈다. 자기의 말들이 많은 사람들의 것이 되는 걸 보고 제롬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제롬은 단어를 모은다. 대화 중에 관심을 끄는 말, 그의 눈에 번뜩 들어오는 말. 책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말... 제롬의 관심사는 온통 낱말이다. 특별히 말에 관심이 많고 낱말을 좋아하는 성향을 타고 났다. 음악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또는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제롬은 낱말을 좋아하여 마음에 드는 말들을 모으는 것이다.
제롬은 말들에 여러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단음절이지만 근사한 말, 두 음절로 된 말, 여러 음절을 가진, 노래처럼 들리는 말. 음절에 따라 다른 억양이 생겨 발음할 때 노래하는 듯한 운율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또 제롬은 이런 말들도 있다는 걸 안다. 뜻은 몰라도 뭔가 신비하게 들리는 말, 말소리만 들어도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게 되는 말...
낱말마다 가진 매력이 무한함을 안 제롬은 낱말을 모으는 일이 매우 즐겁다. 제롬의 낱말책은 나날이 두툼해졌다.
여기까지는 제롬이 언어에 특별한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낱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롬이 가진 말들은 아래 그림처럼 아주아주 많아졌다.
제롬은 수집한 말들을 분류했다. 온갖 분야의 수많은 말들의 의미를 세분화해서 이해하고 습득하여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제롬이 뛰어난 어휘력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제롬이 낱말책 더미를 쏟는 사건이 생긴다. 그 바람에 기껏 분류해 놓은 말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제롬이 모으는 일, 즉 어휘력을 쌓아 올리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그러나 제롬이 원하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 그 말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말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했다. 이미 알고 있는 수많은 말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창조적인 시각 말이다. 잘 분류해 놓은 말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은 낱말들의 창조적인 조합이 가능해졌음을 뜻한다.
제롬은 낱말들을 쭉 늘어놓고 새로운 눈으로 보았다. 나란히 쓰이리라 상상도 못해 본 단어들이 같이 놓여 있었다.
“코뿔소 옆에 밀라노, 파랑 옆에 초콜릿, 슬픔 옆에 꿈... ”(원문은 BIG words next to LITTLE words. SAD next to DREAMY words.)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말들의 조합 -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이다! 시 창작은 대상을 새롭게 보는 눈에서 출발한다. 남들이 지금껏 가지지 않은, 또는 가지지 못한 새로운 눈으로 볼 때 새로운, 창조적인 시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제롬은 모아 놓은 낱말들로 시를 썼다. 또 그 시로 노래를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다. 제롬은 시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었다.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 되었다.
제롬이 모은 말들은 그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해준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말들은 말의 힘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었다.
"어떤 말들은 간단해도 아주 힘이 셌다." (좀 더 섬세한 번역이 필요한 부분이다.) → “그가 하는 이런 말들은 간단해도 아주 힘이 셌다.(Some of his simplest words were his most POWERFUL.)”
제롬이 모은 말들 중에서 가장 간단하면서 가장 힘이 센 말들...
“괜찮아”(원문은 'I understand.') “미안해” "고마워" "보고 싶었어."(YOU matter. 네가 최고야)
제롬은 남들보다 단어를 많이 아는, 즉 말에 대한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단어를 모은 것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게 사용하는 걸까를 깨닫고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음 말에 집약되어 있다.
“그가 아는 말들이 많아질수록 그는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고 꿈꾸는 것을 세상과 나누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The more words he knew the more cleary he could share with the world what he was thinking, feeling and dreaming.)
(번역문엔 “제롬은 더 많은 낱말을 알게 될수록 여러 생각과 느낌과 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 - 이 문장에 작가가 들려 주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는데 번역문은 원문에서 말하는 바와 사뭇 다르다.
아는 말들이 많아져서 세상을 잘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많이 알게 된 것을 세상과 나누겠다는 말이다. 의미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 생각이 뚜렷해지자, 제롬은 낱말 더미들을 끌고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제롬이 지금껏 모은 낱말더미들이 수레에 실려 있다. 어린 체구의 제롬이 끌기에 버거운 무게로 보인다. 그것을 끌고 언덕을 끙끙거리며 오르는 모습이 펼친 면에 가득하다.
낱말 더미를 높은 곳으로 힘들게 끌고 올라가는 모습은 창작의 고통을 상징한다. 창작은 재료를 모으는 것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모은 재료들로 자기의 생각과 느낌과 꿈을 잘 빚어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일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창작의 고통을 해산의 그것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드디어 산 정상에 다다른 제롬은 흐뭇한 마음으로 낱말들을 바람결에 날려 버린다.
산 정상에의 도달은 작품의 완성이다. 고통도 끝났다. 낱말들을 저 아래 계곡으로 날리는 것은 낱말들로 완성한 시를, 문학작품을 온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자기의 시가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준다. 그것이 작가의 보람이요 행복이다.
“단어들이 골짜기에서 팔락팔락 나부꼈어. 바람에 실려 온 단어들은 이제 모두의 것이 되었지.”
“제롬은 행복했어. 그순간 제롬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세상에 없을 거야.”
마지막 페이지엔 작가가 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너만의 단어에 손을 뻗어 봐
네가 누구인지 세상에 말해봐
그러면 세상은 더 멋진 곳이 될 거야.”- 피터 해밀턴 레이놀즈
이 책의 작가는 모두에게 작가가 되라고 말하며 작품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