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상징 읽기
글·그림 앤서니 브라운/옮긴이 공경희/웅진주니어
늘 외롭게 지내는 찰스는 엄마의 계획에 맞춰 공원에 산책하러 갔는데, 엄마의 명령대로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때 어떤 여자아이가 함께 놀자고 하여 모처럼 즐겁게 노는데 엄마가 불러서 아쉬워하며 공원을 나간다.
실업자인 아빠를 즐겁게 해 주고 싶은 스머지는 아빠가 공원에 가자고 하여 기쁘게 따라 나선다. 거기서 찰스를 만나 즐겁게 논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빠의 기분을 풀어 주고 찰스가 준 꽃을 정성스레 컵에 꽂아 놓는다.
원제는 'voices in the park'이다. 본문은 네 명의 화자가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각각 들려 주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었다. 표지는 붉게 단풍 든 나무 아래에 아이들이 마주보고 서 있는 그림이다. 자세히 보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꽃을 건네고 있다. 한쪽 옆에 뛰어노는 개 두 마리도 보인다.
속표지엔 빨간 중절모가 그려져 있는데 이 모자에 뭔가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빅토리아와 찰스를 데리고 산책 갈 시간이었어요.
빅토리아는 귀하고 멋진 우리 개고,
찰스는 우리 아들이랍니다.
첫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부잣집 부인이다. 산책도 계획에 맞춰 한다. 개를 자랑스럽게 먼저 소개하고 아들은 그 뒤에 이름만 소개한다. 부인에겐 개가 더 소중한 존재로 보인다. 부인과 개는 뚜렷이 보이는데 아들의 모습은 엄마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게 그려 놓았다. 아이가 존재감이 없음을 암시한다.
부인은 산책하는 사람의 차림이 아니다. 빨간 중절모에 코트를 입고, 긴 부츠에 스카프, 진주목걸이까지 한껏 차린 모습이다.
공원에서 어떤 개가 빅토리아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굴자 부인이 질겁을 한다. 그녀는 차별하는 성향을 보인다. 자신의 ‘귀하고 멋진’ 개에게 ‘꾀죄죄한’ 개가 가까이하는 것을 용납 못한다.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하는 것을 ‘괴롭히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면 무지한 면도 있다.
그녀는 아들에게 위압적이다. 드넓고 아름다운 공원에 데리고 와서는 벤치에 앉아 있으라 명령한다. 자신도 굳은 표정으로 앉아만 있는다.
얼마 후 아들이 보이지 않아 놀라고 당황한 심정을, 입을 벌린 나무들로 표현해 놓았다. 그녀는 ‘공원에 수상한 사람들이 많아’ 아이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옆에 앉아 있는, 차림새가 꾀죄죄한 남자를 보고 가진 선입견이다. 그녀는 ‘말괄량이 같은 애’와 같이 있는 찰스를 불러 ‘말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닫혀 있다. 자신이 쌓아올린 성곽 안에 자신과 아이를 가두고 살아가는 사람인 듯하다. 삶에 정신적인 여유나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와의 친밀감도 찾아 볼 수 없다.
두 번째는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도 딸과 개를 데리고 공원에 간다. 그들이 공원으로 가는 길은 어둡고 우울하다. 그림액자 속의 인물들이 흘리는 눈물이 도로에 흥건하다.(액자 속 그림은 ‘모나리자의 미소’와 ‘웃는 기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심리상태가 어둡고 우울하고 슬프다는 것을 상징한다.
실업 상태인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신문에서 일자리를 찾아 보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딸 스머지가 있어서 기운이 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까 지나간 길과 같으나 정반대로 완전히 바뀌었다. 어두웠던 건물들은 아름다운 불빛으로 빛나고, 앙상하게 휘어 있던 나무들은 싱싱하게 살아나 별빛같은 열매들을 달고 있다. 꺼져 있던 가로등은 백합꽃으로 피어났다. 불쌍한 거지, 그림액자 속의 울고 있던 인물들이 액자 밖으로 나와 즐겁게 춤을 춘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딸 스머지에게서 위로 받아 기운을 회복한 그의 마음 상태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세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은 찰스다.
좋은 집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그는 ‘또 혼자’이고 ‘너무 심심하다’고 말한다. 공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억압 때문이다. 오른쪽 그림엔 아이의 심리를 압박하고 있는 엄마의 존재를 가득 배치해 놓았다. 구름과 나무, 가로등 들이 엄마의 모자 - 속표지에 그려 놓은 빨간 모자, 그것은 바로 엄마(부인)의 상징이다. - 모양이다. 아이의 몸 위로 비치는 엄마의 큰 그림자는 아이를 인도 수도승의 모습으로 만들고 있다. 엄마의 억압 때문에 욕구대로 살지 못하고 억눌린 아이의 심리를 상징한다.
엄마의 명령대로 의자에 앉아 있는 찰스에게 한 여자아이가 말을 건다. 그림에서 찰스가 있는 쪽은 어둡고 여자아이가 있는 쪽은 밝다. (개들의 위치도 교묘하게 갈라 놓았다.) 두 사람의 심리 상태의 표현이다. 두 아이의 표정에도 차이가 있다.
단언컨대 찰스는 미끄럼을 처음 타 본다. 뒤의 어두운 구름은 곧 그의 마음 상태다. (여자아이 주변만 하늘이 맑다.) 그뿐이 아니다. 찰스의 그림자가 뭉크의 ‘절규’ 그림을 본땄다. 미끄럼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두려움에 대한 표현이다.
개들은 여전히 신나게 뛰어다닌다. (놀라운 배경 그림을 눈여겨 감상해야 한다.)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옮겨가며 논다. 찰스는 여전히 두려운 표정이다. 찰스와 달리 여자아이는 많이 놀아 본 아이라는 게 확연히 보인다.
두 아이가 행복한 장면이다. 아이들의 행복감을 만발한 꽃으로 표현했다. 수동적이었던 찰스가 조금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엄마 따라 공원을 나가면서 찰스는 서운한 표정이다. 찰스의 발자욱마다 꽃잎이 떨어져 있다. 꽃잎은 스머지와의 좋은 추억의 조각들이다.
네 번째는 스머지의 이야기이다. 요즘 아빠가 지쳐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다. 아빠에게 위로가 될 것 같아 공원 가는 걸 기뻐한다. 앉아만 있는 찰스를 이끌어서 함께 즐겁게 논다.
찰스를 바라보는 스머지의 마음을 나타낸 장면이다. 예쁜 과일 배경은 그녀의 예쁜 마음이다. 그녀는 내내 거침없이 즐겁게 논다. (많이 놀아 봐서 놀 줄을 안다.)
아이들과 개들이 다 함께 어울려 노는 절정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뛰어놀아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해 놓은 그림이다.
찰스가 꽃을 꺾어 스머지에게 주는 장면이다. 표지와 같은 장면인데 차이가 있다. 주변은 어둡고 아이들이 있는 곳만 황금빛으로 빛난다. 아이들이 서로에 의해 행복감으로 충만함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집에 돌아온 후 그녀는 찰스가 준 꽃을 컵에 꽂아 놓았다. 꽃의 그림자가 예사롭지 않다. 사람의 뇌 모양과 같다. 자기에게 꽃을 준 찰스의 마음을 뇌 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다는 상징이다. 컵에 오늘 하루의 추억이 그려져 있다.
꽃이 양귀비인 듯하다. 양귀비의 꽃말은 ‘위로’라고 한다. 스머지의 따뜻한 마음이 아빠에게도 찰스에게도 위로가 되었다.
위의 그림에 쓰인 본문을 보자.
집에 와서 꽃을 컵에 꽂았어.
그리고 아빠와 따뜻한 차를 마셨어.
해석에 뭔가 부족함이 느껴진다.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면 작가의 생각이 잘 전달된다.
"When I got home I put the flower in some water, and made Dad a nice cup of cocoa." (나는 집에 와서 꽃에 물을 주고, 예쁜 컵에다 코코아를 타서 아빠에게 드렸어.)
꽃에 물을 주고, 아빠에게 코코아를 타 드리는 것, 그것은 사람에게도 꽃에게도 생명을 불어넣는 정성스럽고 따뜻한 행위이다. 이런 따뜻한 마음씨는 억압된 환경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과 배려를 충만하게 받으며 자란 사람이라야 갖게 될 것이다.
스머지 아빠를 잠깐 돌이켜보자면, 그는 실업 상태여서 새 일자리 구하기에 고심 중이다. 신문 구인란을 보러 밖으로 나갈 때 스머지와 개를 데리고 간다. 심적 압박이 큰 상태에서도 아이와 애완견을 배려한다. 공원에 가면 그들이 좋아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물질로는 채워 주지 못할지라도 넓고 아름다운 곳에서 맘껏 뛰어놀게 해 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으리으리한 집에 갇혀 엄마의 억압 아래 외롭고 갑갑하게 사는 아이와, 형편이 비록 어렵지만 아이의 자유와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아빠를 가진 아이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이들의 대조적인 삶의 단면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선명히 드러난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부유함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이 책은 장면마다 상징성을 가진 그림들로 가득해서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또 하나 주의해서 볼 것은, 네 사람의 목소리에 따라 다르게 쓰인 글씨체이다. 글씨체마다 각각 그 인물의 특성을 드러낸다. 부인 목소리의 글씨체는 ‘고급스러운(?)’ 정자체이고, 남자의 것은 굵고 힘있는 글씨체이다.(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찰스의 것은 가느다란 글씨체로 그의 약한 내면을 반영하며, 스머지의 것은 손으로 쓴 자유분방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필체로 그녀의 성품을 드러낸다.
이 그림책은 한 번 보고 넘겨서는 안 될 책이다. 여러 번 보아도 볼 때마다 보이는 것이 더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책을 다시 들여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