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기록하는 이상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 팡팡(方方)의 <연매장 2025>

by 조윤지
“그녀는 아주 이상한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바깥을 향해 뛰어오르며 자신의 기억을 자극하려 한다고만 느꼈다. 그런데 그것들은 그녀가 평생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무언가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우리는 종종 중요한 것을 잊는다. 그리고 가끔씩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도 한다. 소설 <연매장>은 이러한 잔상으로 남은 기억을 다루는데, 여기서 희미하게 남은 것은 권력과 선동 사이에서 ‘부서진 개인의 얼굴들’이다. 기억을 잃은 여인 ‘다이윈’은 부서진 얼굴 중 하나이자, 동시에 부서진 얼굴들을 매장한 인물이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강물에서 건져진 그녀는 새로운 곳에서 ‘딩쯔타오’라는 이름으로 살지만, 종종 이상한 행동을 반복한다. 알 수 없는 이름을 부르거나 알 수 없는 말을 하거나 시조를 읊는 행동이 이것인데,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그녀의 아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의 비밀을 쫓기 시작한다.


그러던 도중 사회사를 쓰고 싶어 하는 대학 동기 ‘룽중융’을 만나서 어머니의 비밀을 함께 추적한다. 마침내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 가문과 1940년 토지개혁이 얽힌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러나, 진실 앞에서 칭린과 룽중융의 선택은 엇갈린다. 칭린은 ‘망각’을, 룽중융은 ‘기록’을 선택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거야.” 청린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전화를 끊은 뒤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앞의 넓고 탁 트인 호수에 바람이 불자 물결이 층층이 일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나는 망각을 선택했고 너는 기록을 선택했어 하지만 네가 기록하는 이상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수많은 우리 중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한다. 그 선택이 무엇이든 우리는 각자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고, 그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기록을 선택한다면, 기억한다면, 그 진실은 매장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기록하는 이상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으니까.


‘잊히지 않는 기억’은 어쩌면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는 늘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늘 과거가 된다. 그렇게 된 과거는 자연스레 더 먼 ‘대 과거’가 되며, 자연스레 사라진다. 하지만 정말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그건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닌 마음이 기억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 기억함만으로 고통이지만 사실은 너무도 중요해서. 사라지지 않게 자신이 처절하게 움켜쥐고 있는 기억. 그런 기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지우고 지워도 자국이 남고 종이가 패여 오히려 더 아파진 기억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 <연매장>의 14장, 69번의 제목은 ‘뼛속에서부터 나오는 슬픔’이다. 한국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뼈 묻는다’. 이 뜻은 한 장소에 평생 헌신하며 살아가겠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면 또 이런 비슷한 표현이 있다. ‘뼈 묻히는 한 恨’. 뼈 묻히는 한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마음속에 단단히 응어리가 진 상태를 뜻한다. 이때의 ‘한’도 한 장소에서 평생 머무는 ‘한’이다. 이미 과거에 자신을 묻어버렸기에 물리적으로는 숨 쉬고 있을지라도 심적으로는 영원히 ‘과거’에 묻혀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뼈 묻히는 한’이 서리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행히 운 좋게 죽음을 면한 사람’이 아니라 ‘죽기를 실패한 사람’들이다. ‘죽지 못해 산다’라는 표현이 그들의 삶을 대변한다. 거대한 집단 속 개인이 철저히 무시되고 짓밟힐 때, 자신조차 미워. 스스로 쥐어짜고 때려봐도 그 원망이 사라지지 않아, 결국엔 자신을 버린 삶. 트라우마는 자신의 기억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며, 충격이 심해 자신의 의지 없이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기억이다. 그렇다면 그 아픔은 누가 기억해 줄까.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과거를 완전히 버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모든 망각을 배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망각은 살아남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견딜 수 없는 기억

“다이윈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라서 덜덜 떠는 게 보였다. 쪽이 풀려 어머니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목까지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회색 두루마기에는 언제 구멍이 났는지 비죽이 드러난 솜이 찬바람 속에서 아버지가 떨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눈도 돌리지 못했다. 사람들의 분노 섞인 외침 속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그게 부모님이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모습이었다.”


소설은 기억을 잃은 후와 과거 사건들을 교차로 보여준다. 망각 전은 ‘00번째 지옥’이라는 목차로 서술되어 있는데, 그중 열세 번째 지옥(:모든 게 잿더미로)은 다이윈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기억이었다.


“그 일 때문에 자신을 한없이 원망하고 증오했다. 그런데 지금 그 광경이 가차 없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꽉 쥐었지만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손이 언제까지나 자신의 죄를 기억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처참한지 위에서처럼 서술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자신의 가문을 스스로 고발하는 기억인데, 그 와중에 부모님의 덜덜 떠는 모습을 본다. 그런 아버지는 태어나서 처음 본 모습이었고 동시에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속에 얼마나 오래된,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임대계약서가 들었을까? 다이윈은 몰랐다.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조부, 심지어 증조부의 서명까지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이후 그런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날 다이윈이 태운 것은 임대계약서와 토지 계약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가문을, 그녀의 부모를, 자신의 기억을 태웠고, 전부 한 줌의 잿더미로 변했다. 그리고 갑자기 분 바람으로 모든 것이 공기 중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장례식은 사람이 죽었을 때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겪는 모든 상실에 장례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장례 없이 다음은 없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선 이 장례식이 누구의 장례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즉, 상실한 대상을 알지 못한다면, 애도는 불가하다. 이를 ‘미지의 상실’이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다이윈은 망각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보는 시간’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녀는 ‘전등을 보며 불을 끄자마자 뭔가 나타날 것만 같아’, ‘예상치 못한 소리와 자극적인 색’에도, ‘집에 들어오는 낯선 사람이 들어올 때나 주위나 갑자기 조용해지는 경우’에도 깜짝 놀랐다. 또 종종 등이 번개 치듯 아파졌는데, 그건 마치 총개머리로 맞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도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정신과의사는 그녀가 과거에 엄청난 충격을 입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스스로 푸는 수밖에 없다면서 그녀가 과거를 되찾으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이 기억을 거부했다. 옛일을 떠올리려고만 하면 알 수 없는 통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그녀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다이윈에게 ‘원인 불명의 두려움’은 유혹의 뿌리이다. 원래 이 감정은 ‘가문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표상과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녀는 망각을 선택했기 때문에 유혹과 사건의 표상 사이에 고리가 끊어졌다. 하지만 이 불쾌한 감정은 전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 유혹은 모습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변이한다. 어떨 때는 ‘마귀’라는 형상으로, 어떨 때는 무수한 바늘이 인정사정없이 몸을 찌르듯 한 감각으로 그녀 곁에서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정신은 불편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억압하는데, 그 억압의 방식은 ‘망각’인 것이다. 기억을 강요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강요하지 마요.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어요. 생각만 하면 죽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소설 중반, 딩쯔타오는 지옥인지도 모를 곳에서 18층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 그곳에서, 다시 찬바람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피부를 찌를 것 같았던 겨울 어느 날, 그녀는 똑똑히 한 사건을 기억하게 된다. 그날 이후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그 사건을. 그리고 그 기억으로 인해, ‘보는 시간’에서 ‘이해의 시간’으로의 이행이 시도된다.


그리고 곧바로 다이윈은 꽁꽁 숨겨진 열네 번째 지옥(:아빠와 엄마는 너만 믿는다)이 기억난다. 그 기억은 투쟁대회 바로 전날이었다. 다이윈이 어머니 생신 때문에 잠시 들렀던 날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건져야 해. 너는 땅문서를 태우고 집을 마을의 학당으로 내놓겠다고 해. 그리고 반드시 우리와 연을 끊겠다고 말해라. 그들이 믿어야 널 놓아줄 거야.” 다이윈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어머니, 그런 말을 제가 어떻게 해요?”


여기선 독자들에게도 그리고 다이윈에게도 새로운 서사가 등장하며, 다이윈은 기억을 회복한다. 비로소 ‘이해의 시간’으로의 이행을 시도하지만, 가장 처참했던 그 일로 이미 오래전 감각을 다 잃어버린 뒤였다. 열다섯 번째 층에 도달했지만 그건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심지어 가족의 죽음이 더 나은지, 자기 삶이 나은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오빠 부부 시신마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왜 아직도 살아 있어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어떻게 그토록 단순하게 생각했을까? 훨씬 잘 이별할 수 있었는데 그 어리석은 고육책 때문에 본인들 목숨도 구하지 못하고 오빠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잖아. 나도 목숨만 건졌을 뿐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이 증오하게 되었고. 내 손까지도 그 죄를 기억하고 있잖아.”


자아를 붕괴시킬 만큼, 이 사건은 거대하다. 그녀는 비로소 지옥의 층에서 자신이 상실한 대상을 알게 되었지만, ‘애도’로 나아가지 못했다. 자크 데리다(Jackie Élie Derrida)에게 ‘용서’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때의 용서에는 조건이 있다. ‘용서 불가능한 것’을 ‘용서할 때’만을 말하며, 덧붙여 데리다는 용서가 가능해지는 조건을 함께 제시한다.


첫 번째는 가해자의 참회나 보상이 있을 때, 두 번째는 용서가 다른 이유 없이 순전히 받아들이는 환대의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이 될 때, 세 번째는 가해자가 저지른 행위가 용서할 만한 수준일 때이다. 다이윈의 경우에는 가해자의 참회도, 보상도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행위조차 용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누가 가해자인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다이윈은 누굴 용서하고 누구에게 용서받아야 할까? 즉, 이 상황에서 용서가 어떻게 가능한가. 상실한 대상을 상실한 다이윈은 몇십 년을 거쳐 거의 죽기 직전 기억해 냈지만 다시금 가해의 대상을 상실해 버렸다.



칭린의 망각

“네가 기록하는 이상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누군가는 망각을,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한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를 알아내지만, 결국 망각을 선택한다. 여기에서 망각은 단순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어머니 다이윈은 생존을 위해 유일한 선택이 ‘망각’이었듯, ‘칭린’에게도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망각’을 선택한 것이다. 다이윈은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과거에서 끊어냈다면, 칭린은 이미 돌아가신 사랑하는 어머니의 삶이 그저 평온하게 완결되길 바라며, 진실을 밀봉한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안다고 해도 진실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인다. 이 질문은 칭린의 입을 빌려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물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답하기에 복잡하다. 역사적 진실의 직면이 불행한 삶을 만든다면, 기억 대신 망각을 선택해도 될까?


기록되지 않는 과거는 ‘대 과거’가 되어 부서지고 사라질 것이며, 동시에 희생된 얼굴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칭린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이 망각은 어쩌면 개인의 사적인 선택이라기보다 역사의 잔인함이 망각이라는 선택을 피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칭린의 망각은 보편적인 현대인들의 삶을 대변하는 초상일지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온전히 직면했을 때, 자신이 받을 고통 대신 이를 망각함으로써 과거의 비극을 과거에 묻기로 한다.


칭린은 모든 것을 단단히 밀폐했다. 그리고 나직하게 “아버지, 엄마, 안심하세요. 저는 강하고 홀가분하게 살아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룽중융은 기록

반면 룽중융은 기록을 선택하는데, 이는 연매장된 고통을 다시 수면위로 불러내는 행위이다. 즉, 다이윈이 겪은 비극을 개인의 영역에서 완결짓지 않고, 1950년대 중국 거대한 역사의 영역으로 끄집어낸다. 그의 행위는 단순히 ‘글’로 남는 것이 아닌 부서진 얼굴들에 장례를 치러,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후에 귀신이 되어 무덤 없이 떠돌지 않기를 바라는 연대의 장례이다.


그렇지만 룽중융의 기록은 완벽한 진실을 담을 수 없다. 이는 작가 팡팡의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기록의 행위는 망각 불가능한 사건을 만든다.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 개인의 부서진 얼굴들을 지워낸다면, 룽중융의 기록은 그에 대항하는 기억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니.’


이는 얇고 가냘픈 연필로 매장된 사건을 증언하는 것이지만, 그때 쓰인 텍스트는 가장 강하다. 이 텍스트는 망각을 무효하고 방향을 암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그래 나는 망각을 선택했고 너는 기록을 선택했어 하지만 네가 기록하는 이상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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