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옥 - 사건의 상속자(2)

사건의 상속자(2)

by 채다원

사건의 상속자(2)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가족들이 많이 와있었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였다. 1인실 독방에 누워 계셨던 증조할머니는 이미 병신 안 계셨고, 그 침대 주위를 둘러싼 일가친척들이 장례를 논하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벽에 붙어있는 의자로 향했다. 엄마가 외할머니와 앉아있었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품 듯 안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표정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하지만 슬픔으로 인한 괴로움이 아닌 어딘가 굉장히 고통스럽게 아픈 듯한 모습이었다.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증조할머니가 보였다. 목이 매이는 상황에도 병실은 사늘했다. 목이 매이는 것조차 나뿐인 듯했다. 누구도 울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아픔도 잠시, 그들은 할 일이 있는 듯했다. 엄마와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서려 하자 외할머니는 강하게 저항했다. 외할머니는 빨간 월계화가 담긴 유리병을 침상 머리맡에서 급히 챙겼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주목됐다. 그들의 얼굴은 야릇했고, 여름이 무색하리만큼 서늘했다.

노환으로 올해 초부터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증조할머니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나와 대화를 즐길 수 있으실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돌아가셨다.


잠시 잊고 있었던 현실을 다시 자각한 건 그로부터 24시간 뒤, 동아리 후배로부터 독촉 연락이 날아왔을 때였다. 내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뒤집어 다리 밑으로 집어넣었다. 증조할머니는 여전히 말없이 나무 테두리 안에서 웃고만 계셨다.

증조할머니는 딸 둘, 아들 하나를 낳고 딸 둘은 또 각각 딸 둘을 낳았다. 유일한 아들은 딸 하나를 낳고 일찍이 돌아가셨다. 나는 검은 옷에 특별한 완장을 차고 엄마와 이모와 함께 증조할머니 왼편 앉았다. 외가 집안의 유일한 직계 남자였던 나는 자연스레 그중 한 명이 되었다. 증조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나를 누구보다 사랑해 주셨다. 푸른 가을에도, 얼어붙은 겨울에도, 내 삶에 언제나 알 수 없는 침묵과 외침으로 방황하는 내 삶에 양분이 되어주고 거름이 되어 주셨다.

선택의 순간에 증조할머니의 죽음은 나에게 멈춤을 요구했다. 나는 요구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증조할머니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인생의 멈춤이라는 선물을 주고 가신 것일 지도 모르겠다. 옆 호실에서 들리는 곡소리가 내 마음속에서도 연신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겉으로 울 수가 없었다. 모두는 서로를 바라본 채 눈치만 보고 서 있었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그녀가 남기고 간 돈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할머니의 죽음 이용되고 있었다. 자신들을 위한 이해의 장이 열리고 있었다.

상주 자리에 앉아 할머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웃고 계셨다. 나를 봐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안에 아직은 실체로 남아있는 할머니는 내게 무언가 말씀하시고 있었다.

할머니는 살아생전에 참 기이한 삶을 사셨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모두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삶의 진실된 의미와 할머니의 생각은 그 누구에게도 시원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운명이 찾아올 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항상 말씀을 아끼셨다. 그녀의 기이한 삶은 그저 전설처럼 혹은 지난날의 무용담처럼 불리다가 초라한 끝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은 그걸 타고난 팔자라고 불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주어진 이치, 거스를 수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이렇게 여기 있는 사람뿐이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더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보죠.”

그날 밤 친척들은 어떤 한 남자가 조문을 마치고 나오자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변호사님, 상속에 대해 어머니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니 저희는 금시초문입니다. 조금 당황스럽군요.”

“역시, 할머니는 끝까지 특이하시다니까.”

이모가 뒤를 돌아 멀리 있는 영정사진을 바라봤다.

친척들은 모두 상속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이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총명해 보였다. 초상집의 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남몰래 선을 긋고 있었다. 선을 온전히 다 그을 때쯤 선을 긋던 색연필이

‘뚝’

부러져 버렸다.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 그들 사이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순간의 호흡이 찰나의 경지를 넘어 영원히 멈추는 듯했다.


“근데 여러분이 생각하시지 못하고 있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의뢰인께서는 멀지만 직계이자 생전에 가장 사랑하셨던 분인 이한 님에게 상속될 부분을 직접 지명하시고 가셨습니다.”

모든 신경이 정신을 어느새 그들 안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었다. 고개 숙이고 상주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나는 모든 걸 들을 수 있었다. 순간의 정적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고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무언가 나를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친척들 중 상당수는 다음 날 있을 발인 때 다시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나에게 상속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혼돈의 사건들이 머릿속을 쉼 없이 휘젓고 있었다.

씻고 아침을 먹을 때 9살 난 친척 동생이 나의 휴대폰을 가져다주었다. 장례 때문에 신경 쓰지 못한다는 핑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회피하고 싶었다. 지그시 휴대폰을 쏘아봤다. 어두운 화면에 내 얼굴이 하얗게 비췄다. 표정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회피하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을 얻은 거 같았다.

휴대폰에 온 연락들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슬픔에서 안도로 그리고 내심 마음속 미래를 향한 계획이 떠오르기까지는 휴대전화가 귀 옆으로 가기까지 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먼저 율에게 사실을 알렸다. 머지않아 장례식장으로 달려왔다. 나를 부둥켜안고 우는 여자친구는 내 품에서 오랫동안 있어줬다. 하마터면 마지막이 될 뻔한 포근함에는 큰 안도감이 함께 맴돌았다. 율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이 촉감을 영원히 잃고 싶지 않았다. 결혼이야기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써 괜찮은 척 웃는 것이 아니라 본연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이었지만 나의 표정은 대배우 못지않은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친구의 뒤, 저편에서 사진 속에 증조할머니가 나를 보고 환히 웃고 있었다.

나는 친척들에게 처음으로 율을 소개해드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척들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지막 집안 어른에게 율을 소개할 때쯤 어느새 말한 적 없는 결혼의 이야기가 풍문으로 돌고 있었다. 율이 돌아가고 어른들은 나에게 결혼에 대한 잡담을 들어 놓기 시작했다. 궂은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럴수록 그들은 눈동자는 나를 부러워하는 걸로 보였다. 내던져진 현실에 대한 불안함이 사라짐과 동시에 야릇한 정복감이 목을 타고 머리에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