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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숙 Dec 26. 2023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 "읽기 쉬운 마음" 에서  작가들의 생각을 읽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개를 무서워했던 나는 개가 있는 집은 당연히 멀리한다. 이를 알고 있는 친구는 강아지를 방에 가둬놓는 배려로 나를 안심시키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병적으로 개를 무서워하는 습관은 커서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아들 역시 어려서부터 달리기 선수가 되어야한다는 이유를 강아지보다 빨리 달려야 하기 때문이라 했었다.    

지금 장성한 아들을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는 어릴 적 에피소드이다.



내가 태어난 시골 앞집은 한약방 집이었고 우리 집에 비해 꽤나 부유한 집에 사는 예쁜 언니는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엄마로부터 예쁜 언니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란 소리를 듣고 혹시 콩쥐팥쥐에 나오는 그런 엄마가 아니길 기도했고 줄 곧 그 언니가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그 후 난 서울로 올라가 학교를 다녔고 시골일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로부터 예쁜 언니의 엄마가 돌아가신 이유를 듣게 되었다. 엄마는 키우던 강아지에 물려 광견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으니, 제 아무리 용한 한의사인 남편이라지만 광견병은 막지 못했다며 아쉬워하셨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지방에 내려온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근처에 그 언니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가 만나게 되었다.     


그 언니가 털어 놓은 말은 이러했다.


어느 날 방물장수가 와서 마루에 걸터앉아 어른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5살짜리 어린아이는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만지작거리다 쇠 젓가락 뭉치가 눈에 띄어 그것을 들고 마당에 매어둔 강아지와 장난을 치고 놀았다고 한다. 그때 약이 오른 강아지가 자신을 덮쳤고 이에 놀란 엄마가 황급히 내려와 제지하는 과정에서 엄마가 대신 물렸다는 것이다.      


이후 아버지는 별일 아닌 듯 엄마의 상처 소독을 게을리 했고 그것이 화근이되어 돌아가셨을 것이라 했다.

광견병은 아니었다며 담담히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언니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한 질문을 했다는 자책을 하던 중, 이를 알아챈 언니는 오래전의 이야기라며 은 웃음을 지었다.

    

 당시의 엄마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지금, 우린 둘 다 그 잠재된 기억에서 여전히 개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출처 : 네이버


  

어제 읽었던 “읽기 쉬운 마음”이란 책 속에서 발견한 ‘개’에 대한 글이 하루 종일 머리를 맴돌았던 것은, ‘개’에 관련된 이분의 글에 꽤나 공감을 했기 때문이다.


제목은 “개는 훌륭하다”였다.

개가 훌륭하다니 어제 오랜만에 TV앞에 앉았다가 이와 유사한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유모차 보다 강아지 유모차 판매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였다.      


이러다가 사람보다 강아지 나라가 되는 게 아닌가란 우려가 생겼다. 아니,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이건 분명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만의 생각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 분은 애견인구의 증가로 인해 저런 프로까지 생겼겠지 라며 애완동물 가정 수의 통계까지 풀어놓고 계셨다.     


이어서 아파트 외곽을 산책하며 느낀 애견인들과, 함께 나온 강아지들을 보면서 개의 속성을 상세히도 적고 계셨다.      


“주인을 따라 한가롭게 걸음을 떼는 개, 바닥에 코를 대거나 나무에 발 하나를 걸치고 용무를 보는 강아지, 운동을 시키고자 나온 일명 강아지 엄마들의 심리까지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적어도 '강아지 용무를 밖에서 시키는 게 목적인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는 그 분은 땀을 식히려 잠시 쉬면서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강아지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쪽에서 개를 데리고 나온 남녀가 욕설을 하며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고 개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허옇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것을 목격하셨다'고 한다.      


이유는 '개들이 지나치다 서로 충돌한 모양인데, 개 주인들은 말끝마다 서로에게 ‘개’자를 넣으며 악다구니를 해대고 있었으니, 그 자리가 민망하기도 하고 세상에 제일 나쁜 것이 '개'인 것만 같아 자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TV를 켜는 순간 개에 대한 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프로그램 제목에 시선이 꽂혔다'고 한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읽기 쉬운 마음”(류초환)

    



나쁜개는 없다. 나쁜 주인이 있을 뿐.


애완동물이 우위를 차지함에 따른 언어도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일본에서도 무엇을 ‘주다’라는 일본어는 (아게루.あげる)와 (야루·やる) 두 가지로 명확히 사용했었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다’는 (아게루.あげる)이고, 아랫사람이나 동·식물은 (야루·やる)라고 써 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애완동물에게까지 사람에게 사용했던 ‘주다 (아게루.あげる)’라는 말을 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개의 위상이 왠만한 사람보다 나은 세상이 되어가는 지금,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청춘들이 다음 생은 강아지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건 아닐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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