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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쓰J Mar 24. 2022

인생인사(人生人死) 인사만사(人事萬事)

사람 때문에 사는 게 꽃 같네(1)

<커버 이미지-직접 찍은 연남동 어느 골목 가게 외관>

나는 언제나 사람 때문에 피고 또 사람 때문에 지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 사는 건 정말로 꽃 같다.





어떤 1+1,  2 되지  하나 


십수 년 전 내가 아직 신입 티를 벗지 못 했을 때, 당시 나이가 지긋했던 인사부 헤드는 정년퇴임을 맞이했다.

송별회 자리에서 그분이 첫마디에 하신 말씀이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수십 년 직장생활 내내 HR 업무를 했던 그가 늘 가슴에 담고 있는 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개인의 인생에서도 조직의 운영에서도 결국 사람들이 전부라는 생각을 했다.


인사만사(人事萬事) - ‘사람의 일이 곧 모든 일’이라는 그 뜻 그대로, 삶의 시시 때때 곳곳에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또 깨닫는다.



나는 늘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그러나 그 대가(?!)인지 ‘남자복’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몇몇 벗들은 전생에 내게 무슨 빚이라도 졌나 싶을 만큼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내 삶을 지지해 주어 왔다. 말로 다 표현 못할 만큼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서로를 향해 같은 마음을 내는 그런 관계는 1+1=2가 아닌 몇 곱절의 시너지로 정이 쌓이고, 세월이 갈수록 사랑도 더 불어났다.


반면, 혼신의 힘을 다해 나 하나를 전부 쏟아부어도 1+1이 2가 되기는커녕 계속 마이너스가 되는 관계도 있었다. 그런 소모적인 관계는 시간에 비례해 점점 좋은 감정이 깎여나가고 고통만 더 커질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들과 나는 ‘하나에 하나가 더해져 둘이 되는’ 그 쉬운 셈조차 답을 낼 수 없는 건지, 혼자서 묻고 또 물으며 좌절했었다.

그런 어떤 사람 아래서는 성장 아닌 퇴보를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 옆에서는 한때 내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 마치 관 속에 누워있는 송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 모두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힘은 상당 부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비롯됨을 배웠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강력하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사람에 피고 사람에 는 삶


가족 구성원들끼리 주고받는 영향은 의도가 있든 없든 그야말로 막강하다는 걸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니 차치하고, 인생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나를 때론 활짝 피게도 또 때론 맥없이 지게도 했다.



회사에 처음 들어가 아직 모든 게 어색하고 서투를 때, 옆에 나란히 자리한 팀의 한 선배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건장한 나와는 달리 코스모스같이 여리여리하고 그에 어울리게 말씨도 조곤조곤한 고운 사람이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외모만 고운 게 아니라 마음씨도 곱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향도 성향도 참 다르고 한 번도 업무적으로 엮일 일이 없었으나, 우리는 누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손가락 브이를 했다. 모든 사진 속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한 걸 알게 된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곧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회사에 익숙해져 갈 무렵 아쉽게도 언니는 퇴사하여 매일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우리는 이날 이때까지 인생을 함께하며 친자매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는 내 성인기 성장과정 내내 나의 행복과 고난을 모두 지켜보며 곁에서 인생을 함께해주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후 홀로 되기를 택해 무거워진 나의 삶과 내 아이의 삶까지 응원해 주었다. 이제까지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내 딸을 같이 키워준 것과 다름없다고 여겨지는 은인 중의 하나이다.


우린 서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옆집에 산다. 딱 1년 6개월 차이가 나는 언니의 딸과 나의 딸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이제 엄마들을 빼고 저희들끼리 연락해 종종 따로 만나기도 한다.

엄마들 자매결연이 대를 이은 걸 보며 가슴이 뭉클함과 동시에 미소가 번진다.





 선배와  선배 그리고 후배


입사 처음 나의 부서는 크게 두 가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막내인 나는 부서장의 비서 역할과 함께 양 업무를 각각 담당한 선배들을 보조하며 일을 배워나갔다. 두 업무는 전혀 달랐고, 그 사수들의 성향도 매우 달랐다.


한 업무가 장기적으로 경력개발에 있어서 더 유망할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선배로부터,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부하직원으로서도 인생의 후배로서도 배울 것이 별로 없음을 직감했다. 그의 행태로 보아 그 아래 있는 한 나는 그야말로 보조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소모만 당하고, 크지 못할 것이 뻔해 보였다.


또 다른 한 업무는 재미도 있고 나와 잘 맞다 싶었지만, 우리 회사를 벗어나 직무 자체로만 보았을 때 커리어가 발전적 일지 살짝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이쪽 사수를 따라 나의 주 업무를 정했다. 그는 회사 생활에 있어서나 인간적으로나 그 자체로 롤모델이 되어 줄 선배라는 것에 한치의 의심도 들지 않은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결정에 직감을 따른 결과는 옳았다. 나는 그의 아래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지시를 내리거나 자잘하게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이 그저 몸소 보여주는 방법으로 나를 키워주셨다. 모르는 것들을 자상하게 가르쳐 준 후, 그다음엔 나 스스로 해 보면서 깨우치고 경험을 쌓도록 이끌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겸손과 배려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아낌없이 베푸는 인정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첫 사수는 몇 년 동안 내게 업무뿐 아니라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며 애송이였던 나를 어엿한 꽃으로 피어나게 했다.

내가 회사에서 홀로서기를 배워가던 무렵, 언제까지나 나의 지붕으로 있어줄 것 같던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이별을 하게 됐을 때 선배와 나는 이산가족이 떨어지듯 울었다.


몇 년 후 미국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 친구의 청첩장을 받고,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도시에 사는 선배를 만나기 위해 국내선 항공권을 추가로 끊었다. 유명 관광지 목록이 넘치는 LA에서 단 이틀 일정에 나의 볼거리(!)는 그녀의 얼굴 하나로 충분했다. 그러니 몇 년 만에 우리의 재회는 정말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았다.

태평양을 건너가셨지만 나의 첫 사수는 직장 선배를 넘어 인생의 큰 형님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또다시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내게도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후배가 생겼다. 내 선배들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래서 내가 잘 배울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밀고 마음 곁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동생은 전 팀장 D와 1년을 넘게 부대끼며 울고 불며 싸우다 결국 못 견디고 회사를 떠났다. 다른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데 그 하나가 힘든 이유였던 나의 경험을 그대로 했고,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은 친구라 떠나보내기가 더욱 가슴 아팠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회사에서 또 하나의 자매를 얻었다. 이직한 회사의 이야기며, 연애사까지 언니 언니 하며 시시콜콜 내어 놓는 녀석과도 역시 인생의 친구가 되었다.





사는   같네 


국경을 넘어서도 자주 연락을 나누고, 또 종종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이 수개월 잠수를 타자 자매들의 걱정도 커졌다. 더 이상 걱정 끼치고 기다리게 할 수 없게 될 즈음 다행히 나도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문자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글이 대신해 줄 거라며 브런치를 전했다. 연락을 받지도 주지도 못 해 미안하고, 염려 끼쳐 미안하다고 했다.


브이 자매 언니는 이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를 위해 무알콜 맥주를 잔뜩 사놓고 집으로 초대했다. 예쁜 주안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 없이 그저 무알콜을 연신 따라주었다.


동생은 소개팅을 하던 중, 수개월 만에 내 메시지를 받고 반가움과 안도감에 너무 눈물이 나서 (이상한 사람인 줄 알까 봐) 아예 상대남에게 양해를 구하고 울었단다. 늦은 저녁, 가족들에게 실례가 되더라도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집으로 찾아왔다. 홍삼을 손에 들고 현관에 내려놓으며 눈물을 펑펑 쏟는 동생을, 나 이제 괜찮다며 끌어안았다.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고, 내게 힘을 주는 강하기만 한 줄 알았던 언니가 이렇게 아프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럴 사람이 아닌데 너무 연락이 안 되니…그동안 진짜 걱정되고 무서웠어.

이렇게 얼굴 보니 괜찮아서 정말 다행이야, 언니!”


우리는 그날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몇 시간을 앉아 이야기 나누었다.



미국에서 그간 밀린 소식을 들은 형님은 내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글 안에 자기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있어 읽는 내내 울컥울컥 하네.  이 험한 한 세상 내가 중심을 잡고, 마음을 강하게 먹지 않으면 상처받고 힘들게 되지.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는 법.  추락하지 않고 한걸음, 한 걸음씩 잘 내려와야 하는데, 어떻게 잘 내려오느냐도 중요한 것 같아.  눈앞의 것만이 아니고 항상 멀리, 길게 보고.  끝이 좋아야 성공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는 거 같아.  그리고, 혼자 끙끙대고 마음속에 담아 두지 말고, 부모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자꾸 털어놓아.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나와야 다른 새로운 것들이 들어갈 수 있고. 자꾸 털어놓다 보면 한결 편해지고, 두 번 세 번 자꾸 얘기하다 보면, 별일 아닌 일들이라 생각들 때도 있어.  내 바람이긴 하지만, 건강 완전히 회복하면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살아남던, 전투적으로 싸워 장렬히 전사하던, 한몫 단단히 챙기던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기가 미련 없고 후회 없을 것 같아.  대신 몸과 마음이 완전히 회복되어야 하고, 살아남으면 기쁘겠지만 굳이 개똥밭에 뒹굴고 있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오롯이 자기를 위해서 후회되지 말라고 권하는 거야.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하는 거 보니 너무 반갑다. 기운 내라 J야! 모든 게 다 잘 될 거다. 이 또한 지나갈 거고.
새해 복 많이 받아.



어쩌다 풀썩 시들어 버렸던 나는 소중한 사람들에 힘입어 다시 피어나려 애쓰고 있다. 지나간 젊음처럼 아주 싱그럽고 예쁜 꽃은 아니더라도, 또 한 번 새로이 피어나 보기를 소망하고 있다.


언제나 나는 폼생폼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람에 살고 사람에 죽는 인생인사(人生人死)였던 것 같다. 인생은 사람 때문에 피고 지고 또 피고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나는 피고 지고를 반복하지 않을까.

더 이상 꽃잎을 피울 수 없이 완전히 져버릴 때까지.



사는 건 참으로 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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