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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쓰J Mar 02. 2022

사회 친구, 회사 친구

‘자본주의의 노예들’ 사이에 우정은 존재하는가?

<커버 이미지-나란하게 놓인 두 개의 의자에 홀로 앉아있는 나의 모습>

부러 고독을 설정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빈 의자 옆에 앉은 사진이 어쩐지 고독해 보인다.

가족과 인생의 동반자 그리고 좋은 벗들이 있어도 결국에는 홀로 오롯이 내 몫을 하고, 책임지고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이 아닐까.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독일어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이는 '손해를 끼치다, 해가 되다’라는 뜻의 샤덴(schaden)과 '환희, 기쁨'이라는 뜻의 프로이데(freude)의 합성어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철학적 이유>라는 책에서 저자(피터 케이브)는 남의 불행을 고소하다고 느끼는 그 마음 - ‘샤덴프로이데’를 ‘무너진 평등의 부활을 느끼는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생존경쟁에서 상대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인해 종종 타인의 불운에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는 인간 본성이 진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경 생활 문화 2011.05.26 기사 참고)





내 사람 그리고 진짜 내 사람


40년 넘게 살면서 인생의 중턱을 넘어오다 보니, ‘내 사람들’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진짜 내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지는 순간이 두 종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아주 힘들고 어렵고 슬플 때 - 즉 내가 고난에 처했을 때,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은 정말 행복하고 기쁠 때 - 즉 내게 매우 좋은 일이 생겼을 때,였다.

진짜 내 사람들은 나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슬퍼하고 염려하고 아파한다.

그리고 나의 행운에 나보다 더 많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한다.(-고 난 믿고 있다.)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속세를 사는 인간들에게 어쩌면 ‘타인을 향해 한결같이 고운 마음 쓰기’는 득도하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시절인연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나는 늘 사람들을 좋아했다. 말과 마음이 통하는 것 같으면 더욱더 그가 좋아졌다. 학교에서, 동아리에서, 봉사활동에서, 여행에서, 동호회에서, 취미활동에서, 파티에서, 동네에서 그리고 회사 안팎에서 함께 일을 하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그 모든 관계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넓고도 깊게 마음을 쏟기도 했다.


그러다 그 많던 사람들이 한 해 한 해 쌓이는 세월에 자연스레 반비례하는 것을 경험했다. 인연에 미리 정해진 유통기한이라도 있던 듯, 한 시절 만나고서 함께 보낸 시간 뒤로 퇴장하는 ‘시절 인연’ 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계속해서 깔때기를 통과하며 진액이 걸러지듯, 시간을 통과하며 추려지고 또 추려졌다. 그러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어줄 ‘진짜’만이 남게 되더라는 것을 지금도 계속 알아가는 중이다.


그렇게 피고 지는 시절 인연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야 함은, 나이를 먹음으로써 배우게 되는 지혜 중의 하나였다.





나의 절친한 회사 친구


‘사회에서 만난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갑론을박은 사회인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늘 있어왔지 않나 생각한다.


좋든 싫든, 맞든 안 맞든 일터에서 매일 만나 하루 동안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 지내는 게 동료들 아닌가.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니, 간혹 서로 떨어지면 죽고 못 살듯이 가깝게 지내는 경우도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가도, 한 번 틀어지면 돌이키기 어렵고 또 퇴사하면 끝인 게 ‘회사 친구들’ 이더라는 냉소적인 말들을 심심찮게 들었다. 한 때 어린 나는 그런 말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말 그 말이 맞다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들이 내게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회사에서 선후배, 동료로 시작해 진정한 인생의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나, 사회에서 만나 ‘찐친’ 되기는 어렵다는 그 말을 보란 듯이 반증하듯 그들과 난 친형제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정말 행운아구나!

인생 이만하면  살았구나!’


라고 생각한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녀’도 나에게 그런 동료, 아니 언니이자 친구였다.

같은 회사지만 다른 팀의 직원들로서 각자의 고충을 나누었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는 것만큼 내 속을 모두 까 보여준 사람이었다. 나의 개인사-이혼 과정과 싱글맘으로 살아온 삶-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단 3명의 동료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수많은 점심을 함께 했고, 셀 수 없을 만큼의 술잔을 기울였다. 독서 소모임을 만들어 같은 책들을 읽고, 다른 생각들을 나누었다. 갖가지 문화생활은 물론 국/내외 곳곳 여행도 몇 차례 함께 다녀왔다.

우리는 그렇게 회사 생활과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같이 웃고 또 울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추억과 사진을 남겼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내가 한 때 인생을 걸었던 어떤 남자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많은 것을 함께한 사람이다.


그런 절친한 친구이니, 언제나 서로 ‘당나귀 귀 임금님 나라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나와 전 팀장 D와의 모든 역사와 회사에서 내가 해 온 일들, 그리고 새로운 팀장과의 사건들도 전부 들어 알고 있었다. 위로도 해주었지만 어느 부분은 냉철하게, “회사는 그냥 개인의 삶을 누리기 위한 돈을 버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불필요한 말들은 무시하고 주어진 일만 해라.”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혼자 아이를 키우고 살아야 하는 그대의 현실이 더 중하지 않느냐”라고도.


나의 괴로움이 커져가고 불면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녀의 염려와 걱정도 늘어갔다. 어느새 나는 점심을 함께 하자는, 저녁에 맥주 한 잔 하자는 그녀의 제안을 고맙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말로 미루었다.


조금 더 지나 회사도 못 나가고 그 누구의 연락도 받지 못할 만큼 깊은 동굴에서 웅크린 두세 달 동안, 그녀도 몇 차례 연락을 해왔다.


“아프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떠세요?

연락이 안 되니 걱정이고 답답해요.”


작년 10월 그녀의 메시지는, 읽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경을 헤매던 그때의 나는 답하지 ‘못’ 했고,

컨디션이 나아진 몇 달 후의 나는 답하지 ‘않’ 았다.





사내 안전 보건 관리자, 그녀


근로자가 산재를 신청할 때 본인의 신청서 및 진술서 그리고 의사의 소견서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이후 보험 가입자인 회사는 ‘사실 관계 확인서’를 작성해 제출한다. 산재 절차상 <사실관계 및 업무내용 확인 등> 기본 조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회사에서 ‘해당 사항 없음’의 답변을 보냈기 때문일까, 그 내용이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첫 표지에 두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재해자 인적사항>
성명: 나의 이름

<확인자 인적사항>
성명: ‘그녀’의 이름


[사업장의 의견]

당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구조조정 상황은 신청인 및 신청인의 부서에만 국한된 사항이 아니며, 지난 2년여에 걸쳐 모든 지원부서의 직원에게 충분한 사전 커뮤니케이션이 실시됨은 물론, 실제 구조조정 시점 또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각 부서의 업무적 특성 및 기타 상황을 고려하여 상이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구조조정으로 인한 퇴사는 회사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며, 희망퇴직 프로그램 제공에 대한 근로자의 자발적인 동의하에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신청인의 업무는 구조조정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희망퇴직 프로그램 제공 등의 공식적인 퇴사 권고는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신청인이 처한 구조조정 상황으로 인한 업무 환경은 다수의 다른 직원과 동일 또는 유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신청인이 산재 신청의 직접적 원인으로 제기한 매니저(직속 상사)와의 갈등 및 자필 기재한 사건에 대한 회사의 확인 결과는 신청인과 매니저의 입장이 매우 상이하며, 양측의 입장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은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 및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이로 인한 산재 발생의 인과성에 대해 회사는 부득이하게 입장표명이 어렵습니다.  


위에서 확인한 사항은 틀림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2021년 11월 9일,

‘그녀'의 자필 이름, 서명.



나의 절친한 그녀, 가 우리 회사 '안전보건 관리자'라는 것을 정신없던 순간들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안다. 이해한다. 직장인인 우리는 모두 회사가 부여한 역할에 부합한 롤 플레이(role play)에 최선을 다 하고 월급을 받는다는 것을.

그러니 그녀도 당연히 회사가 준 역할에 충실한 답변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건 나였어도 그랬을 테다.


산재 신청서에 딸려간 진단서와 의사 소견이 그녀가 몇 달간 궁금해하던 나의 상태와 소식을 충분히 전해주었을 터였다.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과 우울, 불안으로 자살사고 증가. 입원 치료 권유함  

그런데 딱 산재 신청이 접수되었을 즈음부터는 그녀로부터 전화도 메시지도 없어졌다.





사회 친구 그리고 우정


사람이 타인에게 서운한 마음은 '나 같지 않음, 내 맘 같지 않음'에서 오는 게 분명했다.

먼저 전화를 못 받고 메시지에 답을 못 한 건 나였지만, 그래도 공문서로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어쩐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나 같으면 사실을 알게 된 후 더욱 안부를 물었겠다, 싶었다.  


'연락이 닿지 않던  달을 그런 암흑 속에서 지냈었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나는 네가 겪은 일을  알고 있었지만, 회사를 대표해야 하는 나의 입장 때문에 어쩔  없이 그렇게 답변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어. 오랜 친구로서  이상 이하도 아니야.’


라고.


사회 친구, 회사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냉소적이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만은 내 마음 같을 거야, 라는 생각이 한편 무색해졌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조직에서 만나 스스로에게 매겨진 값을 다하는 것이 소명인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우정은, 그 사이에 자본주의가 끼어드는 순간 허물없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끝에,


'자본주의의 노예들' 사이에 우정은 존재하는가?


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진심 


그 물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의 답은 여전히 예스(Yes)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인간다운 맛과 우정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를 잃었다고 다 잃은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잊지 않고 나의 안부를 물어오고, 사무실에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웃으며 다시 만나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 또, 이미 회사를 떠난 인생의 선배들, 내 인생의 동료들이 시간을 넘고 국경을 넘어 나를 응원해 주고 있다.

그러니 사람의 '진심'이야말로 자본주의 아니라 그 어떤 제도나 사상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친구들과 형님들이 또 한 번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바로 들리지는 않겠지만, 내 마음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나의 사람들'에게 내 진심을 소리쳐 본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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