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색감은 회색이다. 가볍고 행복할 것 같은 흰색과 무겁고 슬플 것 같은 까만색 사이의 회색빛. 책은 저자 전성원의 삶들이 마치 에세이처럼 사이사이 녹아들어 가 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은 사람들의 손길을 쉽게 끓어 당긴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삶에는 관심이 약하다. 익명성을 가진 평범한 일상의 삶은 이미 다들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저자의 삶과 그가 읽었던 책들 속에서 그의 깊은 사색의 무게 그리고 외면당하기 쉬운 주제 관해 과감하게 드러내는 화법은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했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건 무관심이다.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사회는 한순간에 신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인간이 자기 식으로 부당함에 대해 대항하는 수많은 노력이 쌓여 사회적 안전망이 형성되는 것이다. 덕분에 후손들은 그 안전망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것이다. 마치 거미가 한 줄 한 줄 거미줄을 치듯이 그렇게 오랜 노력과 시간 속에서 사회적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지와 교육 그리고 안전은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인생 선배님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흔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
저자의 인생길은 울퉁불퉁한 자갈길이었다. 어린 시절 두 남매만 남겨두고 떠난 어머니와 미국에서 돈 벌어 오겠다고 떠난 아버지가 암 환자가 되어 돌아왔으나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한 달 간격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결국 작은아버지 댁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어린 삶은 칼바람을 정면으로 홀로 맞고 있는 풍경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공사판을 전전해 살던 그가 뒤늦게 전문대를 들어가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박사과정 공부 중인 그 삶의 위치는 안도감을 준다. 너무 일찍 가정의 울타리가 열려 있었고, 중학교 때 교회에서 본 5.18 광주 항쟁의 비디오를 보고 그 열린 울타리조차 부서진 느낌이다. 외국인이 직접 촬영해 편집 없이 날것의 화면이라 어른들만 보도록 허락된 비디오를 마음 한구석이 시린 사춘기 중학생이 몰래보고 받았을 충격은 컷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의 부당함과 보이는 사회의 격차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과 권력의 무거운 수레바퀴를 너무 일찍 알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 87 항쟁에 참여했지만 변하지 않는 사회의 그 큰 돌에 기가 눌려 결국 자신을 막노동이라는 형태로 삶의 변두리를 헤매게 만든 그의 젊은 시절의 좌절이 느껴졌다.
책의 큰 주제는 자기 성장의 길, 타인의 고통, 시대와의 공명, 다른 삶의 가능성이라는 큰 주제로 8권에서 10권 사이의 책들을 소개해 준다. 몇 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처음 듣는 제목들이었다. 그의 책들은 독립운동, 민주화 항쟁, 일본 원자폭탄, 독일 나치즘, 외국인 노동자 등 너무 무거워 눈을 돌리지 않던 주제를 담고 있어 쉬이 손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초반부는 아이들의 동화를 가지고 저자의 사색이 펼쳐진다. 읽기 시작하면서 살짝 독특한 기대를 했었다. 동화를 소개하는데 어른의 비장한 사색이 들어가서 불편한 자리에 정장 차림을 하고 가야 하는 느낌이랄까. 헝겊토끼의 눈물, 떠돌이 개, 하멜론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가지고 정치 이야기를 해낼 수 있는 저자의 독특한 무게감이 나름 매력이 있다.
책 사이사이 발견되는 좋은 문구들과 저자의 글쓰기 탄탄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달아나고 있다.'라는 에밀 시오랑의 말도 인상 깊다. '말이 끊기는 곳에서 사유가 꽃핀다.'라는 저자의 표현은 시적이다. '삶이 죽음보다 아름다울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만, 나는 살아간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산다.' '오늘의 괴로움을 버티게 해 준 것은 내일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었다.'라는 다양한 사색의 표현들은 중후함을 준다.
솔직과 정직의 정의 또한 명쾌하다. 솔직은 누가 묻지 않아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고 정직은 누군가 요구할 때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감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솔직하기는 쉬워도 정직하기란 어렵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결국 글이란 하나의 무대이고, 그 무대 위에 나를 올려 보낸 사람은 무대 위의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닥에 글을 쓰는 행위는 남에게 내보이지 않고 혼자 보는 글조차도 하나의 비평이자 성찰이 된다. 만약 글쓰기에 어떤 치유의 의미가 있다면 그와 같은 효능 덕분이다.'라는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모교 졸업생들에게 청년시절 선배의 위치에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인상 깊다. 저자가 그들에게 눈을 감을 것을 요구하고 잠시 후 눈을 뜨게 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저자의 요구를 따르는 후배들을 보며 이야기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우리 시대의 절망과 빈곤, 불평등에 대해 우리가 외면할 때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침묵해도 괜찮다고 할만한 알리바이라면 우리 모두 그 이유를 한두 가지쯤 가지고 있다..... 나의 풍요와 평온을 위해 타인의 머리를 밝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할 때, 알고도 침묵하는 순간 어두움은 더 깊고 더 무겁게 자라난다. 사회적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공범이 되는 길이다.' 유독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이 스스로 목숨을 담보로 민주주의 항생에 뛰어든 역사이야기는 침묵으로 공범이 되었던 우리들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 같다.
인류는 이미 종교 또는 단일 종파론으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이다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물질주의와 상업주의 두 측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겨냥한 다양한 전법으로 개인의 삶을 휘두른다. 코카콜라 광고 대행으로 시작된 산타클로스와 디즈니사에서 제작된 아기 사슴 밤비를 통해 빨간 코 사슴 루돌프의 등장을 보고 예술인 가 쓰레기 인가를 시종일관 혼란하게 만드는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진실을 보는 눈은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다. 책을 통해 다양한 소리를 경청하고 그 다각도의 눈으로 사회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내 삶을 공범자가 아닌 협조자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고, 묻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며, 마침재 알려고도 하지 않는 침묵의 공모에 동참한다면, 아버지란 이름으로 우리의 양 어깨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림자는 영영 걷히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역사관은 교훈적이다. 저자의 책에서 소개된 인물들의 사진 중 잊히지 않는 미소들이 있다. 독립 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 젊은 날에 죽음을 맞이한 장지락 필명 김산의 미소는 32살이라는 나이에서 나올 수 없는 그 깊고 온화한 빛이 전달된다. 닮고 싶은 미소다. 그리고 부라질의 빈민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카마라 대주교의 환한 미소는 어떤 삶도 송두리째 받아들이겠다는 자비의 미소가 담겨있다. 얼굴이 그 사람의 인품과 생각을 담에 낸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리라. 첼리스트 카잘스 키를 회고한 <나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과 인연을 맺고자 한다.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간 그들의 삶을 배우기 위해 님 웨일스와 김산이 공동으로 쓴 <아리랑>도 읽어야 할 것 같다. 알면 알수록 맘 편하게 무관심과 무지로 살아온 안일한 나의 발자취에 대한 반성이 든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정의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진정한 소유란 이 세계 속에서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 만이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이야기하는 '바람 구두 연방의 문화 망명지' 그의 홈페이지가 궁금해진다. 문화 망명지라........
회색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존재가 달라진다. 어두운 이미지의 회색빛보다는 멋스러운 회색빛을 긍정한다. 회색빛은 싫증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집안 인테리어 기본을 회색으로 두고 그 위에 파란색이나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주면 세련됨과 중후함을 선사하는 빛이 회색 빛이다. 부모님 댁의 물난리로 다시 인테리어를 했을 때 회색톤에 파란 거실 문이 볼 때마다 좋아지는 이유는 그 회색빛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 때문인 것 같다. 저자의 책은 중후함이 느껴지는 세련된 회색빛이다. 그의 삶에 포인트가 될 빨간색이나 파란색의 색채감이 그의 어린 딸이 선사하길 바라본다.
책을 통해 단 한 문장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한다. 이 책에서 발견한 빅토르 위고의 <레미 제라블> 마지막 문장이다.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진정으로 무서운 건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지...' (It is nothing to die. It is horrible not to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