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휴대폰, 컴퓨터, 아이패드 물결 안에 넘치는 정보 속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해서도 안될 것 같은 편리함과 불안감 속을 오간다. 성인인 나조차도 스트레스가 소복이 쌓일 때 가끔 나를 잃고 온라인 쇼핑을 하기도 한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아들도 시험이 어렵거나 에세이를 제출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더 게임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 같다. 노트북에 다양한 제한 장치를 걸어 두지만, 녀석은 쉽게 풀어낸다. 그로 인해 가끔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른다.
발도르프 교육은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자료를 찾는 전통적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학교다. 실제로 미국 실리콘 벨리에서 일하는 엘리트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고 있다. 하는 일이 디지털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일임에도 불고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기계와의 접촉을 최대한 늦추려는 그들도 교육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다. 나 또한 온라인 사용을 제한하는 보수적 부모 쪽이다. 하지만 저자는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부모가 멘토가 되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는 좀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극과 극의 만남이 필요하다. 그래야 중도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책을 반대자의 입장에서 경청했다. 책을 덮고 내가 지향한 길에 대한 약간의 타협점을 만들어야 함을 느꼈다. '모'아니면 '도'라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고 삶을 다시 돌릴 수 있는 힘은 내 영역 밖이라 늘 현명하게 판단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녀의 책은 디지털 세상에서 아이 키우기, 아이들은 멀쩡하다, 당신은 디지털 리터러시를 갖추었는가, 기술 친화적인 부모 되기, 공감은 필수, 디지털 시대의 가정생활, 디지털 시대의 우정과 사랑, 디지털 시대의 학교 생활, 공개 적인 세상에서 자란다는 것, 다음 세대를 위한 디지털 시민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낸다. 시대에 맞춰 다양한 어휘가 생기는데 그녀의 책 속에는 디지털 원주민, 디지털 이주민, 디지털 콘텐츠, 쇼셜 미디어, 디지털 공간 등등 10년 전에는 전혀 자리잡지 못했을 어휘들로 가득하다. 디지털 세상으로 쉽게 들어가 삶의 영역을 늘리는 사람 특히 아이들을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부른다. 반면, 아이들보다 디지털 기계를 활용하고 의존하는 빈도가 낮은 어른을 디지털 이주민이라 칭한다. 저자는 디지털 원주민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할 뿐 아니라 직접 생산하고 공유하는 세대를 가리키는 말로 디지털 원주민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디지털 기계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방법은 관계에 관한 것이다. 타인과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즉 신뢰와 조화에 관한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은 책 전반의 핵심인 것 같다.
'아무리 최신, 최고의 앱이 잇따라 사라지고 또 등장한다 해도 당신이 길러 준 시간 관리와 인간관계의 기술은 변함없이 아이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라는 말 또한 묘한 위로감을 준다. 그녀의 책이 디지털 원주민을 키우면서 마주치는 기쁨과 고통을 털어놓고, 아이, 배우자, 다른 양육자와 보호자들과 서로 대화의 창이 되는 키가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게임, 그룹채팅, 쇼셸 미디어 등 나쁜 일을 막기 위해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디지털 세상을 살아갈 지에 대한 긍정의 방식을 제안한다. 디지털 세계를 한번 짜낸 치약에 비유한다. 한 번 짝 치약은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 단지, 닦아 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디지털 세계의 편리함을 맛본 아이들에게 규제 대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법을 부모 멘토가 가이드 하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디지털 공간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바람 앞의 먼지처럼 쉽게 사라지기도 하지만, 막 발라놓은 시멘트 위에 발자국이 되어 평생 남을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라고 한다. 존중의 공간, 프라이버시의 공간, 영원히 남는 기록이 되는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게 부모여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디지털 공간에 노출되어 있기에 사용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어른인 부모가 가이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아이들은 멀쩡하다'라는 표현은 지나친 어른의 기우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한다. 콘텐츠를 소비하며 동시에 창작함으로써 디지털 세상을 잘 통제할 수 있는 디지털 원주민을 위해 부모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모의 열린 태도와 깊은 관심이 디지털 시대에 건강한 가정환경을 일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같이 해보며, 디지털 세상에서 함께 함으로써 부모가 자기편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라는 말은 여러 생각을 피어오르게 한다. 부모의 3가지 유형을 이야기한다. 사용시간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한형 부모와, 테크놀로지를 적극 참여해서 함께 비디오 게임도 같이 이용하고 웹과 관련된 기사나 프로그램을 보여 주고 특정 웹사이트를 책임 있게 이용하도록 돕는 멘토형 부모가 있다. 세 번째 유형으로, 전혀 관여 하지 않는 자유방임형 부모로 나눌 수 있다. 그녀는 단연 두 번째 부모의 형태고 나는 첫 번째 부모의 형태다.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이듯 그녀 책을 읽으며 햇살 가득 받은 넓은 잔디가 깔린 그녀의 육아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만의 게임을 설계하거나 기존 게임을 개선해 보라고 권유하고, 불안 요소를 차단하는 대신 아이가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게임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함을 권유한다. 나의 사고의 틀 안에서 재단하려 하지 말고 관심을 통해 공감하는 부모가 되라고 한다. 모니터링 대신 멘토링 방식이 테크놀로지와 관련해서라면 더 효과적이라 한다. 부모의 멘토링이 아이가 오프라인 세상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해줄 것이며, 온라인 소통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말은 제한형인 나에게 은밀한 유혹처럼 들린다. 읽으면서 제 한 형인 내 생각의 저변을 보게 되었다. 제한하기는 일차적으로 쉽고 단순한 방법이라 부모인 내가 좀 편하게 쓰고자 선택한 건 아닐까?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게임도 해보기도 하고, 전자 기기에 덜 의존할 수 있도록 오프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흥미롭게 하기 위한 나의 노력을 아끼고 싶은 욕심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자기가 이해하는 규칙을 더 잘 따르기 마련이다.' 이해를 시키고 공감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본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자기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은 디지털 기기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라는 말에도 공감이 간다. 범죄자의 손에 들린 칼과 요리사의 손에 들린 칼이 다르듯이 디지털 문화 속에서 사용자의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일 것 같다.
'청소년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올바른 판단, 아지트로서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가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다.'라는 말에 청소년 시기의 나를 떠올려 본다. 어른의 자로 규제하고 통제하기보다는 이해해 주고 공감해주는 힘이 더 큰 변화를 주는 건 당연하다. 단지, 인내가 필요할 뿐이다.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성격이 급한 부모가 참아 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아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디지털 원주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조금 강경한 규칙들을 서서히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디지털 기기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이든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더해 준다. 긍정적인 면을 활용하고 부정적인 면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디지털 시민이 되는 길이다.'
삶은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더 복잡한 문제들로 불안감을 만들어 내는 시대다. 디지털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준비를 차분하게 해나가야 한다. 사회의 룰이 바뀌고 있고, 그 빠른 흐름 속에서 균형감 있게 나를 유지하고 살아갈 방법을 얻기위해서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