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삶을 닮아 있다. 역사책을 통해 시대를 읽는 연습을 할 수 있듯이 소설책을 통해 삶을 느끼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오랫동안 들어온 소설이다. 가볍게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읽는 속도가 더디다. 글이 어렵다기보다는 배경 묘사나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철학의 실타래들이 얽혀 하나씩 풀어가면서 읽어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 카잔차스키는 신들을 길러낸 그리스 신화의 보금자리 그리스 크레타 출신이다. 1883년에서 1957년까지 74년의 세상을 살다가 신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이 남겨둔 역작이다. 공산주의적인 행동주의와 불교적인 체념을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책들 사이사이 언급이 된다. 실제 인물인 조르바를 그의 소설 속에 초대하고 지식인의로서 당시 카잔차스키가 꿈꾸던 소극적 이상과 온몸으로 직접 행하는 삶을 살다 간 조르바의 이야기를 전한다.
카잔차스키의 묘비명이 인상 깊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소설을 완독하고 나니 저자의 신념이 보였다.’ 신’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던 시대였을 당시 카잔차스키의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들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는 그 제한된 선을 넘도록 돕는다. 그의 책들이 그리스에서 금서가 되었고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그의 시신이 종극에 묻히는 것조차 거부되었다고 한다.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 저자의 과감한 시도가 소설 곳곳에 발견된다. 인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전도자로 신의 부름을 따르는 삶이 당연시되던 시절 그는 이단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베르그송을 통해 인간 존재가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딛고 넘어가게 마련된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에 경도된다. 따라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약의 디딤돌로 인간이 창조한 것이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은 성직자들에게는 마음 불편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체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진 지금, 우리 의지로써 그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호전적인 인간 즉 초인이라는 니체의 개념이 카찬츠키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조국 그리스를 축으로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누비고 다닌 저자의 생애는 정착이 아니라 모험을 갈구하는 삶이었을 것 같다.
책의 주인공 이름이 명확하지 않다. 책에서 조르바는 주인공을 두목으로 부른다. 35세의 주인공이 갈탄광을 채굴하기 위해 크레타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 60세의 조르바를 우연히 만나 그와 함께 여정이 시작된다. 산투르 연주를 하고 춤으로 언어를 표현하는 조르바를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 표현한다. 또한, 아직 모태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 표현한다. 주인공은 그림자만 보고 만족하는 자신의 삶의 양식을 바꾸기 위해 크레타로 향했지만, ‘정신적인 낙태 시기를 놓쳤다’라고 자신을 평한다. 본질 앞에 몸으로 실천을 해보고자 한 이론만 강한 주인공에게 조르바는 그림자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실천형 인물이다. 불꽃이듯이 감정을 쏟아내고 순간에 오로시 집중하는 조르바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 속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다. 크레타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한 적이지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과 번뇌를 보여 준다. 주인공은 갈탄광에 성공하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갖고 형제들처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일종의 공동사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새로운 종교 집단과 새로운 생활의 기폭제를 구상하는 주인공에게 조르바는 이야기한다. ‘두목, 사람들을 그대로 둬야 한다. 그 사람들을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마라. 왜냐하면 눈을 뜨면 비참함을 본다. 눈감은 놈은 감은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요. 그 사람들이 눈을 뜨면 지금의 암흑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요?’
‘학교도 다니지 않은 조르바는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라고 주인공은 이야기한다.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말을 더 잘 알 것 같아 아프리카 사람들은 뱀을 섬긴다고 한다. 조르바라는 인물 또한 두발에 온몸의 체중을 싣고 두 발로 대지를 밝고 있어 겨냥이 빗나갈 일이 없다고 한다. 조르바를 통해 주인공은 자신 안의 호랑이의 포효를 듣고 붓다의 모소리를 듣고 글을 쓴다.
조르바처럼 춤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되고, 육체와 정신이 하나 되는 경험도 겪게 된다. 주인공은 지금 까지 학교에서 배운 모든 지식을 걸레로 지우고 조르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진짜 알파벳을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이야기한다.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적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지금 한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말이 인상 깊다. 크레타 섬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조르바가 만나는 방식이 독특하다. 과거 속의 영광을 먹고사는 오르탕스 부인에게 보여주는 정열과 일을 하는 순간에 혼신을 쏟아내는 열정 그리고 성직자들에 대한 조롱의 말들이 대극 하는 무수한 개념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는 불교적 표현들과 ‘이 세상의 모든 유혹 가운데 가장 무서운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라는 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조르바식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자연과 교감하는 능력은 세상과 교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연과의 교감을 배우기에 인간 세상은 너무 요란한 느낌이다. 그 소음 같은 소리는 고요를 빼앗고 삶의 소리를 잡음으로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과부를 짝사랑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마브란도 영감의 아들 파플라냐로 인해 결국 과부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는 과정이 인간 사회의 내재된 잔인성과 닮아있다.
온정신을 몰두해서 일하는 조르바를 보고 주인공은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을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르바의 삶의 방식은 주인공을 매혹하던 시편들이 ‘지적인 광대놀음인 세련된 사기극 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조여왔다. 해오라기 울음소리와 함께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경고였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주교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진리 너머 진리보다 인간에게 소중한 인간적인 의무가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신의 섭리를 따르는 주교의 삶의 철학을 존중해 주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이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나머지는 길을 잃고 헤매거나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시어 종교를 내려 주신 것 이요. 이렇게 해서 오합지졸도 영원을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라고 주교는 자신의 철학을 말한다.
조르바가 들려주는 그의 삶의 이야기는 폭풍 같다.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조르바의 이야기는 터키인들과의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죽인 자신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조르바의 삶의 역사를 들으면서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나 악마나 똑같은 거라는 조르바. 여자, 술, 힘든 노동에 자신을 던져놓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여워 하지 않는 것이 젊음이라는 조르바는 영혼이 곧 육체라는 것을 주인공에게 깨닫게 해 준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보다는 조르바와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삶을 성찰하는 이야기와 주인공의 사색의 나열들이 글을 더디 읽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 무게감이 있는 책이다. 행하는 삶이 진정한 삶이다. 막연한 희망을 버리라는 말은 지금 현재 자신의 삶에 집중하라는 뜻이기도 한다. 종교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막연한 천국을 약속하며 인간이 딛고 있는 대지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시절, 지식인의 몸부림이 느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