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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Jun 28. 2024

하루 한 권 독서

[조선의 등 굽은 정원사]- 천영미

다른 책도 함께 읽어 내려가는 것을 허용하는 책들이 있지만,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책도 있다. 이 책은 후자의 경우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읽어가려 시작했다가 오로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다. 인물들의 섬세함과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마치 사극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왕조가 500년을 지속할 수 있는 경우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기반을 잘 다져준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실제 있었던 인물과 가공의 인물을 잘 섞어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어 낸 소설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집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서 외국에서 살아가는 저자가 써낸 책이고,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에서 최우상을 받은 작품이다. 

너무 희미하고 흐릿해져서 더 이상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꿈과 희망을......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잔잔히 표현해 보고 싶었다.’ 작가의 말이다. 


 세종실록 18년의 기록에 의하면, ‘기근에 죽어가던 백성들이 소나무 껍질을 먹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있고, 이에 따른 처벌은 없었다’라고 되어있다. 이 한 줄의 글이 저자가 소나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 구절이 란다. 소나무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충정과 의리를 장신 하는 정신적 표상이고, 궁궐, 병선, 조운선 축조에 사용되던 최상급 목재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정책인 ‘송정’을 시행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소나무의 역할이 생각보다 컸다는 것이 놀랍다. 소나무 껍질을 먹어야 할 만큼 굶주림이 일상인 백성을 위해 세종과 꼽추 허은수, 은수의 아내 다연 그리고 천출 출신인 전순의를 통해 굽은 소나무를 부러 키우 내는 이야기다. 예술을 사랑했던 세종의 아들 안평 대군 또한 이들과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어 낸다. 


 굽은 소나무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초반부가 신선하다. 그 소나무가 조용히 들려준다. ‘우리 삶을 결정짓는 딱 두 가지가 빛과 물이다... 내가 굽었다고 나를 차별하는 건 인간들 밖에 없다. 자기들이 유용함과 무용감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고, 나의 존재 가치에 멋대로 등급을 매긴다. 굽은 나에게도 별이나 바람, 비, 구름은 동일하게 다가온다.’ 마치 인간의 삶을 굽은 소나무가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 무지한 사람 같은 사회적 약자가 조용히 쏟아낼 수 있는 말처럼 들린다. 소나무가 은수를 바라보는 눈도 따스하다. ‘무엇이 이아이의 심연처럼, 깊어지도록 만들었을까.......’ 나무가 사람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다. 


 ‘공자의 유학을 내세워 책벌레들이 세운 나라 조선’의 사대부 집안에서 꼽추로 태어난 은수를 할아버지가 키워낸다. 은수가 태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떴고, 지아비를 잃고 꼽추 아들을 낳은 서 씨는 결국 은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은수의 할아버지는 은수를 닮은 굽은 소나무를 정원에 심고, 오랫동안 그의 손자의 벗이 되고,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은수가 정원에서 꽃과 나무 그리고 작은 벌레들을 관찰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성인이 된다. 그의 할아버지는 꼽추라 반듯한 사대부 집안과 혼사를 맺기 힘들거라 생각했지만, 상왕 등극 반대로 역적으로 몰린 박응의 여식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아영이 은수의 반려자가 된다. 


 당시 역적으로 몰린 집안은 ‘어미와 딸, 처첩, 아들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서 종으로 삼고, 만약 딸이 시집가기로 하여 그 지아비가 확정된 자는 연좌하지 않는다’라는 법으로 인해 아영의 어머니 박 씨 부인은 사대부 집안과 결혼해 딸을 낳았다.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어머니는 남의 종살이를 하는 광경을 봐야 했던 박 씨 부인의 시댁 살이는 살얼음 같았을 것 같다. 딸인 아영은 조용하게 땅에 그림을 그리고, 식물과 작은 생물을 관찰하면서 커간다. 


 은수와 결혼한 아영은 서로 닮은 점이 있다. 식물을 좋아하고, 조용하고 사색적이며, 미물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은수는 불구의 몸이지만, 과거 시험을 치도록 독려한 자신의 아내로 인해 장원급제를 한다. 당시 세종 대왕은 신분이나 신체적인 결함에 상관없이 그 능력이 뛰어나면 채용했던 열린 왕이었다. 총애를 받던 은수가 춘향 대제(이른 봄에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큰제사)에서 실수를 하고, 꼽추 은수를 경계했던 관료들에 의해 상림원으로 좌천을 당한다. 


 궁중의 식물과 꽃을 관리하는 한직이라 생각했지만, 세종은 이때부터 은수와 백성의 나무로 소나무를 키워내기 위한 전략을 짜낸다. '어떤 음식이 몸에 좋은지, 어떻게 먹어야 더 건강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음식도 약이 된다'는 것을 책으로 쓴 전순의가 상림원에 합류하게 된다. 실제 전순의는 실화의 인물이고, 그의 책 <산가요록>은 15세기초 조선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여기에 기록된 온실 설계법 또한 서양보다 170년이나 앞서 있다고 한다. 은수의 아내가 사실적으로 그림을 잘 그려내는 재주가 있어, 세종으로부터 이 세 사람은 백성을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글로 쓰고, 그림으로 남기는 일을 하게 된다. 굽은 소나무를 길러내는 방법을 연구하여 그렇게 자라도록 산에 심는다. 그래서 몰래 산에 심어 백성들이 소나무 껍질을 벗기거나 솔잎을 따다가 억울하게 곤장을 맞거나 옥살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소나무를 백성의 나무로 돌려주기 위한 세종의 뜻이다. 제주에서 바치는 귤들이 제주 도민의 시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고, 귤을 온실에서 재배해 내는 방법 또한 은수와 전순의가 해낸다. 


 하루에 천리를 달리려면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이고, 훈련시켜야 하는데 이를 몰라보고 일반말처럼 키운다면 명마가 사라진다. 글에서 세종은 천리마를 알아보고 그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백락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세종의 총애가 깊어지자 사대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집현전처럼 상림원의 역할이 커지는 것이 두려워 은수와 전순의가 빠져나갈 수 없는 계략을 세우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두 사람은 유배를 가게 된다. 습기와 충해로부터 실록을 지켜내는 역할을 하는 천궁과 창포 넣는 포쇄 작업이 사대부들의 계략으로 실패하게 된 것이다. 


 유배지를 향해 떠나는 그들을 몰래 지켜보는 왕 그리고 그 왕을 조용히 바라보는 은수와 전순의. 어쩔 수 없이 왕을 떠나지만, 그 떠나는 길에 자신들의 능력을 존중해 준 왕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유배지를 또다시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는 곳으로 계획하는 세종이 그들을 찾아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책에서 덩굴과 굽은 나무의 비교를 이야기 한다. 이는 마치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덩굴 같은 사대부와, 굽은 나무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비교한 것 같다. 덩굴은 존재 자체가 약하다. 오로시 빛이 있는 위쪽에 도달하기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하는 덩굴 같은 양반들. 그 들이 덩굴처럼 악력을 써서 높이 오르고자 하는 것을 보여 준다. 굽은 소나무처럼 깊이 뿌리내려 더 오랜 세월을 견뎌 내길 간절히 바란다는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덩굴처럼 사는 삶이 아니라 비록 굽은 소나무이지만, 자신이 가진 역량으로 만인을 위한 삶을 살라는 의미로 다가오는 소설이다. 오랜만에 잘 짜인 사극을 본 느낌이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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