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한국사]- tvNstory 제작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울 때가 많다. 작지만 강한 나라, ‘나’라는 표현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나라가 한국이다.
찬란했던 과거보다, 가장 암울했던 과거사를 통해 오늘을 보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성장은 고통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몸에 근육을 만드는 과정도 삶의 근육을 만드는 과정도 단연코 번뜩 찾아드는 고통과 긴장감이리라.
제작팀의 의도 데로 책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읽는 동안 마치 소설책 처럼 쏙 빠져들게 만드는 역사 이야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서서히 일본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빼앗겼는지 들려준다. 한순간에 합병이 된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물이 스며들듯이 그들은 우리 생활 속으로 밀려들어왔었다. 그 첫 시작은 1876년 강화도에서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부터다. 이는 물건을 사고파는 통상과 교류를 맺기 위한 조약으로 일본의 요구로 체결되었다.
국제 조약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조약에서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함으로써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일본의 세력 안에 들어오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부산, 인천, 원산의 항구를 개방하라는 의도도 뚜렷했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이고, 인천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가까웠으며, 원산은 당시 일본과 불편한 관계였던 러시아와 가까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일본 국민이 조선의 항구에서 조선 국민에게 죄를 지었더라도 일본 관리가 심판한다’라는 10조 사항이다. 당시 관료들은 10항 조항의 부당함을 왜 바꾸지 않았을까. 하지만, 일본의 황제, 조선의 국왕이라는 표현을 보고 조선은 깜짝 놀라 강력히 항의했고, 그 결과 ‘대일본국’과 ‘대조선’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약 체결 후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난다.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의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린 상황에서 한 달분의 월급마저도 모래가 섞인 쌀을 받았으니 그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알 것 같다. 군인들의 반란에 놀란 고종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일본군까지 조선으로 들어와 버린다.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도 구식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서다. 조일 수호 조규 체결 이후 조선의 쌀이 싼값에 일본에 수출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기 때문에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도 공격했었다. 일본이 자연스럽게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게 되는 계기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변화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고, 자신들의 권력 싸움에 백성들의 삶을 관찰하지 못했던 관료들의 어리석음이 조선의 운명을 흔들리게 한 것이다. 마치 지금의 우리 정세와 비슷한 느낌이다. 세계 무역 경제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조약을 내걸고 있다. 약삭빠른 일본은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한 달도 안 돼 재빠르게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한 협상을 마쳤다. 그러나 우리는... ...
조선의 젊은 관료들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임금이 머무는 궁 안에 폭탄을 터트린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김옥균은 일본 공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당시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점진적인 개화를 원했고, 갑신정변의 주역들(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은 일본처럼 조선도 빨리 기계를 도입해 근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의 차이를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청나라는 고종의 도움요청으로 조선을 도왔고, 갑신정변은 3일로 끝나 버렸다. 하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송환을 거부한 일본은 오히려 조선 정부를 향해 그들의 대사관이 파괴된 점과 일본인이 죽었다는 이유로 배상금을 요청하게 된다. 일본의 압박을 못 이겨 조선은 일본 공사관과 신축 자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한성 조약’을 맺게 된다.
이때, 훗날 조선이 긴급 상황이 발생할 때 일본도 파병을 할 수 있다는 ‘텐진 조약’을 청나라와 맺게 된다. 독립국가인 조선을 빼고, 강대국인 두 나라 끼리 맺은 협정은 마치 우리 집안의 문제를 옆집 아줌마 아저씨가 해결하겠다고 나선 모양새다.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는 자국민도 모르는 사이에 외부 세력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조약을 체력하고 결정을 해버리는 사례가 세계사에는 흔히 일어 난다. 텐진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일본군인들에게 집으로 들어오는 현관문의 열쇠를 쥐여주게 된 것 같다.
백성들은 쌀값 폭등으로 더욱 살기 어려워졌고, 결국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런 혼란 스런 상황에서 일본이 경복궁을 습격하고, 당시 아시아 최강대국이었던 청나라를 공격하며 청일 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이 청을 이겨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일본이 청나라를 대신해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를 자문한다. 힘이 없었지만,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해결책이 있었을 것이다. 외부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내부의 탄탄한 협력이지만, 관료들의 개인적 이익이 분열을 만든 것이다. 권력욕에 대한 사람의 욕심이 시대의 아픔을 만들어 낸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살아남기 위해 러시아의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명성왕후를 일본이 시해한 ‘을미사변’은 아픈 역사다. 왕비까지 죽인 일본올 보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간 머문 ‘아관파천’ 이후, 다시 경운궁으로 환궁해 ‘대한 제국’으로 국호를 바꾼다. 하지만, 1905년 11월 17일, 대한 제국의 국권이 침탈당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만다. 그 이후 러시아는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 ‘포츠머스 조약’을 맺는다. 약자인 조선을 상대로 강대국끼리 체결되는 조약으로 서서히 일본이 우리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 준비 기간이 40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가히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고종의 죽음도 일본이 개입되어 있을 확륙이 높다. 갑자기 승하한 고종 후 순종이 즉위하지만,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은 ‘한일 병합 조약 체결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었다. 일본 군인들이 대한민국 곳곳에 항일 의사들의 극심한 반발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먼저 전국 방방곡곡 감시를 하고 항일 의사들을 체포한 후 합방 조약을 알렸다. 합방이 알려지지만, 어떠한 소란도 소요도 없이 무척이나 고요했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키우는 것이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양친 부모가 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인에 의해 죽는 상황을 본 17살 유관순은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이끌어 냈다. 감옥에서 조차 만세 운동을 했던 그녀가 고문으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일본인과 결혼했지만, 일본 본토에서 조차 떳떳하게 한국인의 옷을 입고 법정에서 선 ‘박열’이라는 사람의 인생도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감옥생활을 하던 그가 출옥하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 앞에서 그를 기다린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의 삶은 더욱 기고하다. 고종이 60이 넘어 딸을 얻게 되어, 남다른 애정을 쏟았지만, 결국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강제로 일본인과 결혼시킨 후 일본에서 살고 있던 고종의 아들 영친왕 부부가 덕혜 옹주를 돌보았지만, 옹주 또한 일본인 황족과 강제 결혼하게 되었다. 딸을 낳았지만, 황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세금 정책으로 덕혜옹주 시댁은 경제적 어려움을 갖게 되었고, 집에서 옹주를 돌볼 수 없었던 남편이 그녀를 정신병원에 넣은 것이다. 당시 조현병(젊은 사람의 치매 일종)이라는 특이한 병은 시대에 입은 깊은 상처이다. 해방 이후, 덕혜옹주의 귀환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38년 만에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그녀 앞에 70대의 보모가 그녀를 향해 절을 했던 일화는 눈에 선하다.
천재 예술가 나혜석의 4남매는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당시 신여성으로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였고, 남편과 세계일주를 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던 그녀의 마지막 죽음 또한 안타깝다. 시대를 잘 만나야 예술이 꽃이 핀다.
윤동주 시집은 한글로 된 책을 출간하지 못했던 시절에 나온 책이다. 단, 3권의 시집 중 두 권이 남아 있어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책으로 살아있다. 일본 유학 중 3.1 운동과 연루된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지만, 그의 죽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죄수들에게 당시 인체실험을 했고, 그로 인해 윤동주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시가 2017년 일본의 국정 교과서에 실릴 만큼 문학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뒷이야기도 흥미롭다. 마라톤의 후진 양성을 위해 그가 걸어간 길에 대해서는 익히 알지 못했었다. 금메달을 따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사진을 볼 수 있다. 손기정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우려해 감시를 피해 결국 은행원으로 평범한 삶을 선택한 그는 해방 이후 마라톤 후진 양성을 위해 자신의 열정을 쏟았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그의 제자들이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게 된 과정 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운 조상들의 은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정치란 협력을 통한 대의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후손들의 삶을 위해 기꺼이 개인들의 삶을 희생한 조상님들의 은덕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