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어서 네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허동당 혜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 스님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11살에 합천 해인사에서 수도자의 삶을 선택한 인생길을 걸어온 분의 생각들을 만날 수 있다. 10명의 형제자매들 속에서 혼자만의 다른 색채를 직감하고 속세와 인연을 끊은 결단력이 놀랍다. 책사이에 어린 동자승(스님자신)과 노스님의 대화를 관찰자 입장으로 조용하게 과거 예기를 들려주는 장면도 인상 깊다. 1인칭 기법 보다 더 멋스럽다.
한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옮겨 가는 것 만이 윤회가 아니라, 한 생명체 안에서 벌어지는 윤회과정을 이야기하는 서두글을 통해 관점이 넓어진다. 엄마 배속에서부터 시작해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 자체가 새롭게 변신해 가는 생명체 안에서의 윤회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수행처라 어떤 이들이나 어떤 사건들이 스승이 될 수 있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윤회가 이루어지며, 그 과정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몇 해 전 ‘성불하십시오’라는 말을 원어민 숙소 주인에게 들었었다. 그 낯설지만 따뜻한 기운이 기억너머에서 살며시 올라온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라는 종교는 신과 인간의 거리를 밀첩 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을 준다.
‘많이 줘도 욕심, 적게 줘도 욕심’이라는 1부와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에 대한 2부 글들은 단편의 이야기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스님이 페이스북에 때때로 올렸던 글들이 책으로 존재의 형태를 달리해서 나와 인연이 된 것 같다.
늙고 병들어 죽는 삶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가엾게 여기는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아들의 뜬금없는 질문이 기억이 난다. ‘잊어 먹을 지식을 왜 외워야 해요?’라고 물었었다.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인데 왜 사니?’라는 질문과 닮아 있다.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동자승이던 스님에게 꾸지람을 주셨던 노스님 이야기도 나를 돌아보게 한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살려 주는 어린 동자승은 뱃속 알들을 키워내야 할 거미에 대한 삶을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호통을 듣게 된다. 세상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생각하게 만든다. 꽃의 허리를 잘라 부처님께 공양하고, 자신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화병에 꽂아두는 어리석음 까지는 생각을 못했었다.
천 원짜리 식사를 제공하는 한 분의 삶에도 깊은 교훈이 담겨있다. ‘밥 값이 싸니,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은 성품을 기르라는 것이다.’ 천 원이나마 밥값을 내니 당당하되 거만하지 않은 성품을 가지라는 그 할머니는 성불하셨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알고, 스스로 항상 즐겁게 편안하며 자유로운 삶이 된다면 끝내는 모두 성불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기 자신이 밝힘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을 통해 ‘내가 나를 이끄는 등불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자는 부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헛된 망상은 생명 존중 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의 유전자수가 2,300여 개 라면, 벼는 더 정교하게 진화되어 3,5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스님 말씀처럼 어찌 사람만이 최고로 진화된 존재라고 쉽게 속단할 수 있겠는가.
세상사 모든 현상은 진짜가 아님을 별을 통해 언급하신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별은 모두 다 하나 같이 신성 즉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뿜어낸 빛이다. 인간은 이미 죽은 별들을 보고 실존 개념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을 바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고, 본 그대로를 알게 되는 깨달음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다.
사람의 삶은 더 나은 삶으로 향하는 과정이고, 그런 삶을 향할 수 있는 도구가 마음과 몸이다. 그래서 소중하게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라, 사는 동안에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진정한 ‘나’를 찾는 첫걸음이 된다는 스님의 가르침이 깊다. 나는 나이되 한평생 또는 순간순간 사용하는 도구이기에,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잘 다스려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다.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림으로써 행복하고, 편안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끝내는 영원히 행복하고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성불의 경지로 향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바깥 세계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아치’, 몸과 마음이 참된 자기라고 착각하는 ‘아견’,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우쭐 대는 ‘아망’, 자신이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애지 중지 아끼는 ‘아애’가 망상의 원인이다. 환시와 환청이 이런 망상 속에서 싹이 튼다. 본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현상인 ‘데자뷔’와 항상 봐오던 것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처럼 착각이 되는 ‘자메뷰’ 또한 오감이나 생각이 갖는 한계성을 잘 보여 준다. 맹신이 망상과 결합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삶의 하인을 자처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베풂의 7가지 원칙도 지혜롭다. 바른 마음,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 바른말, 바른 눈짓, 바른 몸짓, 바르게 양보하기, 상대의 환경과 입장을 잘 헤아려서 고통을 호소해 오기 전에 돕기가 옳은 베풂이라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거창하게 보시하는 법도 있겠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법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의 마음을 맑고 건강하게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보시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쓸데없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이 항상 맑고 고요하고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그 첫 단추가 생각을 정돈하는 일 같다. 마음과 몸을 신전으로 여기고, 쓸데없는 생각들이 독버섯처럼 자라지 않기 위해서는 사성제인 ‘고집멸도’ 개념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욕심과 집착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운명을 알고 있지만, 그 정해진 숙명의 길 위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완전한 만족을 못하는 ‘멸’은 인간의 필연적 약점인 듯하다.
어떤 존재든 공짜보다는 자신이 땀 흘려 얻은 대가를 더 좋아한다는 ‘이케아 효과’가 당연한 듯하다. 타인의 성공은 결과만 보지만, 자신의 성공은 노력 과정과 결과를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 쥐조차 한번 누르는 버튼보다는 여러 번 눌러 나오는 단물 버튼을 선택한 다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을 거듭하다 보면, 편안해지고 나날이 맑고 건강하며, 지혜로워 진다는 스님의 조언을 실천해야겠다. 하루를 1초로, 반대로 1초를 하루로 느낄 수 있는 힘을 길러 낼 때, 순간이 영원이 되고, 영원이 순간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태어남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우리 모두 예정된 이별로 살아가고 있다. 그 사실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감정의 작은 찌꺼기가 낄 틈이 없어진다.
스님이 전하는 종교의 넓은 의미를 새겨 본다. 우리와 우리가 사는 우주는 물론 저 우주 너머의 우주까지 먼저 간 이들의 가르침을 받고 이해하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영원히 즐겁고 편안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게 종교다. 신의 하인이 아니라 나의 주인으로 몸과 마음을 삶의 도구로 잘 다스려 잠깐 살다가는 인생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