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살아 보기]-신중년 12인
지역 관광이 아니라 지역을 바라보는 사람 여행 같다. 강릉을 중심으로 12명의 삶을 살짝 맛볼 수 있다. 다양하게 살아낸 사람들 그리고 노년이 오기 전에 삶의 터전에 대한 진지한 사색들을 엿볼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글도 잘 쓰고, 삶이라는 선물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주는 책이다.
서울시에서 50+전후 12명을 선택해 강릉 한 달 살기를 기획했다. 이미 꽉 들어찬 콩나물시루 같은 서울 도심의 삶은 대자연이 품어내는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에게는 곧 떠나야 하는 숙박지다. 삶의 터전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하기 전에 한두 달 살아보며 지역의 자연과 사람들을 만나본다면, 마치 마트의 시식 코너에서 맛보고 음식을 사듯이 결정이 쉬울 것 같다. <남원에서 살아보기> 이후로 다시 <강릉에서 살아보기>를 기획한 패스 파이터 대표 김만희 씨의 서두글은 도시를 떠나 한적한 지방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준다. 그리고 이는 정부차원의 지원이 필요함을 알 것 같다. 일을 할 수 있고, 문화를 즐길 수 있으며, 생활이 안정되고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강릉이라는 도시다.
코로나 이후 사는 것과 여행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깊은 여행으로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일과 휴가가 결합된 형태의 여행도 살아보기 숙소인 에어비엔비, 리브애니웨이, 미스터 멘션, 스테이 폴리오 같은 사업을 번창시켰다. 한국 지방들은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취향이 다르듯 지역 특색에 맞는 곳을 선택해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스치듯 지나갔던 강릉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 휴게소를 모두 들러 보는 휴게소 여행을 해본 적이 있다. 새벽에 출발해 저녁 늦게 도착했던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역마다 다른 휴게소는 가야 하는 긴 여정을 즐거움으로 바꿔 주었다. 삶도 이와 닮아 있다. 목적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기보다는 가는 길들에 하나의 주제를 심어 두고 즐기면서 가다 보면,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보다는 간직하고 싶은 추억으로 자리 잡지 않을까.
강릉의 자연환경은 매력적이다. 동해바다를 끼고 있고, 대관령 숲이 시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바다로부터 분리된 석호나 습지의 환경으로 다채로운 생태계가 형성된 곳이다. 강릉 문화 자원도 도시의 매력을 더해 준다. 율곡 이이,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 허균과 허난설헌 등 역사적 인물들이 강릉의 좋은 자연 기훈을 받은 것 같같다. 바닷가에 나란히 자리 잡은 커피숍에서 풍미 가득한 커피를 맛볼 수 있고, 고택 선교장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울려 퍼지는 음악회, 아담하게 진행되는 전시회와 강릉의 자부심을 키우고 있는 서점들에 대한 소개는 도시의 가치를 한층 높여 준다. 2021년 강릉이 문화도시로 지정된 이유를 알 것 같다.
일본이 지방 활성화 목적으로 처음 사용한 개념인 ‘관계인구(주소 이전은 없지만, 해당 지역에서 생활과 소비를 하는 사람으로 그 지역에 도움이 되는 사람)’ 늘리기는 이제 모든 지역의 당연 과제 같다. 부산 근교의 창원, 양산, 김해, 울산은 주말이면 자주 들렀었다. 관계 인구의 흐름이 왕성해질 때, 지역 간의 차별적 발전들에 대한 우려가 사라질 것이다.
공기업을 퇴직하고 강릉 한 달 살기에 참여한 백남주 씨가 들려주는 국립 대관령 치유의 숲이야기와 숲 명상 체조를 통해 산림의 치유능력을 다시 생각해 본다. 영어교사로 퇴직한 김영희 씨의 습지 산책 이야기와 깨진 유리들이 바닷가에 밀려와 액세서리 목걸이로 변하는 이야기도 이색적이다. 한 때 좋아했던 문구가 불교 경전 <숫타니 파타>에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홀로 행하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처럼 살고 싶다는 닮은 소망을 만났다.
주얼리 마케터와 보석 감정사인 문미숙 씨가 들려주는 대관령과 바우길에 대한 이야기도 잔잔하다. 어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원 귀어 학교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여행을 통해 얻은 좋은 경험을 수입란에 넣고, 덜 좋은 경험을 지출난에 넣는다는 여행자의 탐색 통장이야기는 독창적 개념이다. 여행을 위한 탐색 통장을 개설해야겠다.
유치원 교사로 일하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낸 후 자신만의 삶을 꿈꾸는 고영숙 씨의 이야기를 통해 ‘그루 매니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산림 자원을 활용해 일자리를 발굴하는 구르 매니저가 지역 1명씩 전국적으로 44명이라고 한다. 그루 경영체가 지역의 산림 자원을 활용해 소득을 증대하고, 산림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신중년들에게 또 하나의 기회를 줄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2년 동안 해외 여행을 한 이소희가 들려주는 강릉의 보헤미안 커피와 수제 맥주 바이현에 대한 이야기는 삶의 다양성을 느끼게 해준다. 한 곳에 닺을 내리고 수년을 살아오고 있는 삶도 있고, 이렇게 언제든 떠날 준비를 갖춘 신 유목민 같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삶과 시간을 쏟아 넣는 사람들이 커피 마니아를 만들어 냈다. 강릉에서만 맛볼 수 있는 수재 맥주와 막걸리가 강릉이라는 지역을 더욱 멋스럽게 만든다.
대학에서 디자인과 콘텐츠 강의를 하는 이은아 씨는 25개국에서 살아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신선한 충격이다. 오로시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내 삶이 단조로운 음악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녀가 들려주는 마이클 데비 켐벨 부부의 이야기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유목민의 기질을 일깨운다. 은 퇴후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에어비엔지를 집 삼아 85개국 270여 도시를 여행했다고 한다. 어떤 경험과 생각들이 그들 부부 가슴에 자리 잡게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세상을 현지인, 여행인, 유목민으로 나눌 수 있다는 말도 신선하다. 현지인이 여행인이 되고, 오랜 여행이 유목민을 만들어 낸다. 어떤 삶을 그려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강릉의 서점 ‘고래 책방’ 대표 김선희 씨의 말은 교훈이 된다. 꽃길만 걷고 싶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꽃길을 만들어 가는 김선희 대표의 서점을 들러 봐야 할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 서점이라는 대표의 말을 통해, 책들을 만나는 일은 수많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과정임을 알 것 같다.
문화 해설사인 신동춘 씨는 300년 고택 선교장에서 들었던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인상을 잘 전해준다. 한국적인 전통 가옥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진다. 머리는 차게, 가슴은 뜨껍게 라는 젊은 이상이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면서 머리는 뜨거워지고, 가슴이 차갑게 식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착한 딸, 아내 그리고 엄마로 살아온 지영진 씨가 들려주는 대관령 치유의 숲은 삶의 생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약이 될 것 같다. 강릉의 단오제는 매년 4월에서 5월 초 까지 한 달간 진행이 된다고 한다. 2005년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성을 이정 받아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니 자랑스럽다.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비용이 들고, 문화는 단순히 즐긴다고 영속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
박옥기 씨가 들려주는 강릉 자수 소개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준다. 피카소의 추상화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세련된 자수 문양은 세계 무대에 올려 두어도 훌륭할 것 같다. 조실부모하고 4형제가 할머니 아래 자라면서, 뜨개질을 좋아했던 박옥기 씨 할머니가 어린 손녀에게 손재주가 많으면 고생하고 살까봐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는 너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아라’라는 말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이 느껴진다.
서울의 자동차 수만큼 소나무가 있는 곳을 강릉이라고 표현하는 김미정 씨는 나이 든 도시 재생 사업에 대한 소개를 해준다. 개발이 아니라 재생이 미래를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골 특유의 소박한 삶인 ‘러스틱 라이프 Rustic life’에 대한 김난도 교수의 말을 통해, 사는 곳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바뀌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미국의 작가 토니 모리슨의 인상 깊은 말도 소개한다. ‘당신이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이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그것을 써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공공기관 정년퇴직 후 3년 차인 류순이 씨는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너무 좋아요’라고 아이들로 부터 편지를 받았다. 퇴직날 받은 편지는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한 도시 출신의 모자(율곡이이와 신사임당)가 모두 그 나라 화폐에 등장하는 도시는 강릉 밖에 없습니다.’ 한 줄의 글이 ‘아하’라는 감탄을 준다.
‘ㄷ’ 자형 왕산골 한옥도 자연과 함께 잘 어울린다. CEO출신 이장이 왕산골을 경영의 눈으로 이끌고 있다고 하니, 지역의 성장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마을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영하는 것이다.’ 이장님 말은 더욱 믿음직스럽다.
이춘영 씨가 소개하는 21세기 형 구멍가게 파랑달에 대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지역의 고유 자원을 재해석해서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로 만드는 로컬 콘텐츠 비즈니스 기업이 필요한 시대임을 알려 준다.
덴마크 사회 운동가 로니 에버겔의 ‘사람책’ 즉 휴먼 라이브러리에 대한 개념을 이 책을 통해 만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나 철학을 이야기로 들려주고,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누는 휴먼 라이브러리. 인류의 정신이 집약된 활자 책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비유한 이 용어를 통해 다시 한번 느낀다. 나의 삶도, 타인의 삶도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이 소중한 한 권의 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