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의 철학 수업]- 미루야마 슌이치
‘어떤 철학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부제목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철학이 있는 삶은 무엇을 말하는가. 특정인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학문이 철학이다. 살아가는 일이 철학이다. 보이는 철학과 보이지 않는 철학 사이를 살아간다. 사회적 현상도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도 철학이 함께 할 때 명쾌해진다. 알면 두렵지 않다. 철학의 보편성이 커지는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저자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것을 찾아내는 방법을 말한다.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감각, 이것이 오늘날 필요한 개인주의 정체라고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라는 말이 이기적 삶이라는 말과 묘하게 겹치면서 집단주의 의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홀대를 받는 듯하다. 일본인 저자도 그 개념에서 출발한 것 같다. 개성의 발전과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는 개인주의가 필수임을 나쓰메 소케키의 책 <나의 개인주의>에서 인용한 말을 들려준다.
위대한 현자들 또한 나를 성장시키고, 타인을 이해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한 쓸모를 위한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왔다. 개인주의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위한 현자들의 관점을 보여 주는 책이다.
슬라에 보 지젝의 <팬데믹 패닉>, 로제폴 드루아의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라캉의 단 한 권의 저서인 <에크리>,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 <인간의 마음>, <자유로의 도피>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펼쳐 나간다. 노자의 <도덕경>, 장자의 <장자>,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마루쿠스 가브리엘의 <생각이란 무엇인>, 마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 나쓰메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와 <폴베개>를 개인주의자를 위한 철학 수업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
‘내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려 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이념, 철학, 사상 등을 탐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용글이 철학이 갖는 위치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남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려는 동조 압력은 약해지고 있지만 내면화된 동조 압력이 강해지고 있는 시대라고 한다. 자기다움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내면화된 동조 압력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내가 가지는 감정이 기업의 비즈니스에 사용되고 있고, 필요가 아닌 기분에 의해 소비가 일어나는 감정의 상품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게임, 드라마, 영화 구독, 다양한 캐릭터 굿즈를 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쓰는 시대다. 진정으로 원해서 구입한 것인지, 감정의 상품 광고로 사게 된 것인지 모호해진다.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지만, 안개가 쌓인 그 길을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소세키의 말처럼 자기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에 집중하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인생 전체를 염두에 두면서 판단한다면, 미래를 가리고 있는 안개가 걷힐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개인주의란 ‘다른 존재를 존경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존경하는 것이다.’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는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건 이런 차이를 느끼고 음미하는 일이라고 한다.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내가 일치하지 않는 이유가 공감이 간다. 사회적 위치와 매일매일 경험에 따라 가치관이 변하면서 내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인격에 대한 정의도 산뜻하다. 인격이란 변하지 않는 성질이 아니라 내가 유지하고자 하는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유지하고자 한 상태를 확신할 때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만들어 내야 한다. 생각, 말, 글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커진다.
‘막연하게 느끼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더 정확한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철학자들의 걷기를 통한 사색은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인간의 사고가 신체적 자극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걸으며 사색하는 습관에서 중요한 것이 목적 없이 걷기라는 것이다. 가끔 시간과 길이를 정해놓고 걸었었는데, 저자의 권유대로 목적 없이 걸어봐야겠다.
자신 안에서 먹구름이 피어오르듯이 부끄러움이나 응석이 나타난다. 부정하고 억압하기보다는 들여다보면서, 그 느낌을 해소하는 과정이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보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사 속의 존재임을 자각하라는 조언도 도움이 된다. 역사적 인물과 위대한 사상가들을 시대를 살아간 한 개인으로 볼 때 역사적 관점을 갖게 될 것 같다.
라캉의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는 잘 알려진 굴귀다. SNS가 현대 기술이 만들어 낸 거울이라는데, 그 거울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일상으로 우리도 모르게 타인의 욕망에 물들어 간다. 프롬이 조용하게 건네는 해결책이 눈여겨볼 만하다. 나 스스로의 고독감과 책임감을 직시할 때, 원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온라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포장된 행복과 일상은 자주 만날수록 행복감에서 멀어진다.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처럼 손에 넣은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구원을 찾아 스스로 자유를 바치게 되는 것을 프롬이 경고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의식한 최초의 생물이다.’ 프롬의 이야기다.
약한 존재는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다. 진정한 개인주의자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인 악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자유, 긍지 존엄등을 선택하는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개인주의가 세상과의 일치감을 느끼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자연 속의 생명체들의 그 존재 자체로 대자연을 이루듯 개개인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의지가 아름다움이 될 것 같다. 각자의 모습이 바로 나다움과 개성이라는 말도 공감이 간다. 남과 같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타인 존중에 대한 기본 마음이 된다. 내가 다르듯이 당신도 다르다. 서로 다른 존재가 있어 다채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갈등이 사라진다.
노자는 물을 가장 훌륭한 물체라고 한다. 깨달은 사람은 물과 같이 자신의 성질을 어느 상황에서나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길들이는 방식이 지혜롭다. 오류 없는 많은 지식을 취하기보다는 수많은 지식으로 가려진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할 때 한 개인이 우주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주적 존재인 내 몸을 소중이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장자의 말도 새겨본다. ‘내 안에는 나를 이끌 스승도 나를 무터 뜨릴 한심한 적도 함께 있다. ‘
깊은 곳에 있는 내 마음과 솔직하게 마주 할 때, 내 마음이 나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되어 준다는 말은 장자가 건네는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조언이다.
완전한 인간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완전하다는 몽테뉴의 역설이 위안이 된다.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차원이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과거는 현재를 통해 규정되고, 미래에 어떤 일을 격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시 바뀐다는 말을 통해 운명이 필연이 아니라 자유라는 말도 울림을 준다.
자신과 의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사람이 하나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는 다중적인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경험을 통해 세월의 폭풍을 지나가는 자아를 만나는 기쁨을 가지려 노력해야겠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진정한 나를 찾으라는 메시가 너무 남발되고 있다는 말도 생각을 부른다. 하나의 물질도 그 본질을 규정하기 어려운데 인간의 고유함을 설명하기는 더 어렵다. 불교의 무아 사상 즉 참다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매년 변하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바라보는 게 마음의 갈등을 줄여 줄 것 같다. 순간의 나를 소중히 여기고, 끝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고 사는 것이 행복을 크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도 넌지시 알려 준다.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사상으로 시작해서 그의 사상으로 끝을 맺는다. 오로시 나 개인으로 존재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름답다.
‘미래를 위해서’ 말은 원대해 보이지만,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수단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하는 행동, 생각 마음을 수단으로 평가한다면 미래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라로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일자체의 의미를 갖고 재미를 더하는 순수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것이다.
나를 없앰으로써 태어나는 개인주의. 여태껏 본적 없는 나를 찾기 위해 나를 없애라고 한다.
‘인간이 아름다움의 본질에 가 닿는 일은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 즉 개인주의라는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다.’
변하는 나를 관찰하는 관찰자로서 나를 이끄는 스승으로 대하며 살아가야겠다.
나쓰메 소세키가 전하는 개인주의를 통해 건강하게 나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