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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Kim Nov 18. 2022

블랙 스팟

5

어쩌면 의식이 돌아오던 순간 그는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별의 빌미를 제공해준 셈이었으니. 구급대원들에게 나를 신고하지 않은 이유도 서로 덮고 넘어가자는 의미일 수 있었다. 실수한 건 너나 나나 같으니 이쯤에서 깔끔하게 끝내자고. 아마 그런 얘기들을 통보하기 위해 집으로 오라고 한 것 같았다.


부엌은 어제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시켜 주었다.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스레인지 쪽으로 발을 옮겼다. 투명냄비에 하얀 국수가 가득했다. 뚜껑을 열면 퉁퉁 불은 국수 가락들이 탄산 거품처럼 밀려 나올 것 같았다. 물기가 사라진 채소들이 싱크대 주변에 널려있었다. 수납장 속에 가지런히 놓인 식기들과 상반된 모습이었다. 반듯하게 정돈된 거실 책장도 대비를 이루긴 마찬가지였다. 빈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기계적으로 정렬된 책들. 그의 손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느 것 하나 비껴있지 않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졌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거실 안으로 몰아쳤다. 창가에 놓인 더피 화분의 이파리가 파르르, 흔들렸다. 더피의 잎사귀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매일 잎사귀가 촉촉하도록 화분에 물을 주던 사람이었다. 방치된 지 오래되어 보였다. 시든 줄기 끝에 까만 점들이 곰팡이의 얼룩처럼 퍼져 있었다.


나는 책장으로 다가가 눈앞에 보이는 책 한 권을 집어 바닥에 던졌다. 옆으로 나란히 꽂힌 책들을 연이어 떨어뜨렸다. 책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닥에 곤두박질쳤는데 책이 떨어질 때마다 거실 바닥이 탁, 탁, 울렸다. 울림은 묘한 느낌으로 나를 부추겼다. 나는 집어내기의 달인처럼 책을 바닥으로 던졌고 발작처럼 손을 멈추지 못했다.  


바닥 여기저기 뒹구는 책들을 본 뒤에야 내가 한 짓을 깨달았다. 책장 한 칸이 텅 비어있었다. 감정적으로 그의 공간을 흩트릴 의도는 없었다. 내가 한 짓에 분명한 의도를 찾아내야만 했다. 내게는 두 번째 자발적 참여인 셈이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책장의 빈 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저런 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빈틈없이 채워진 책들 사이에서 볼품없이 비어버린 공간. 단단하지 못하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어쨌든 지지리도 빈곤한 모습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아무것도 덧칠되지 않은 무채색 계열의 책들을 골라 빈 책장에 하나씩 꽂았다. 책들은 어두운색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명도를 낮춰 배치했다. 책장에 책들이 채워질수록 색들이 사라져버리는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책장의 공간이 보기 좋게 채워졌다.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바뀐 책장을 훑어보았다. 화려한 책들 사이에서 아무 색도 가미되지 않은 무채색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바뀐 책들은 짙은 색으로 시작해 옆으로 갈수록 조금씩 옅어졌다. 반대쪽에서 보면 서서히 짙어지는 모습이었다. 짙고 옅음이 물결처럼 책들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발밑에는 책장에서 밀려난 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거치적거리는 책들 사이로 메모지, 명함 같은 것들이 발에 밟혔다. 책갈피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었다. 간단한 처방전에서부터 약도, 전화번호가 적힌 소소한 메모들. 그중에 작은 수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수첩을 집어 들었다. 


수첩 속에는 포스트잇 묶음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들을 휘리릭 넘겨보았다. 그가 남긴 메모들이었다. 냉장고에 붙이지 않고 수첩에 따로 넣어둔 이유가 뭘까. 나는 어쩐지 그의 일기장이라도 훔쳐보는 기분에 현관 쪽을 흘금거리며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유진 얼굴에 흑점

   뒤틀린 유진의 팔과 다리 

   망막의 변성

   태양의 흑점

   black spot          


메모는 그게 전부였다. 


나는 다른 메모가 더 있는지 수첩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여백의 수첩 중간쯤 반으로 접힌 페이지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펴자 생소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반변성     


굵은 펜으로 눌러쓴 글자들은 정갈하면서도 조금씩 휘어있었다. 


나는 책장에서 의학 백과사전을 뽑아 그것에 대해 찾아보았다. 각종 질환들이 가나다순으로 분류되어 어렵지 않게 찾았다.


망막에 비정상적 혈관이 생겨 혈관에서 누출된 혈액의 원인으로 시력 저하를 유발하는 질환. 


그것은 몇 줄의 설명과 더불어 실명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리고 격자무늬 중앙에 검은 점을 봤을 때 무늬가 휘어지거나 선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진단을 내린다고 했다.


나는 하나라도 놓칠까, 글자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증세와 치료법들을 찾아 읽었다. 다행히 조기 진단은 약물치료나 수술로 실명의 진행을 낮출 수 있다고 쓰였다.


그는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일들을 무분별하게 적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적힌 대로라면 그는 지금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정확하고 예리하게 사물을 보던 그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물이 흔들리고 뭉개져서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빛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망막을 뚫고 나온 혈관이 터지면서 그의 눈에 흑점들을 만드는 것이 그려졌다. 태양의 흑점처럼 어느 날부턴가 그의 눈에 생긴 검은 부분들. 나를 보며 찡그리던 낯선 표정들, 검은 점으로 덮인 시든 더피의 모습이 그제야 해독이 되었다. 왜곡되지 않은 진짜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여러 번 시선을 옮겼을 그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의학 백과사전을 접어 책장 위에 돌려놓았다. 바닥에 흐트러진 책들도 하나씩 주워 모았다. 벌어진 입으로 뜨거운 공기가 밀려들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열기 속에서 희미하게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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