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그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 때문일 텐데도 그는 그런 게 아니라고만 했다. 냉장고에 포스트잇마저 줄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였다. 여전히 나를 만나주긴 했지만 하나의 일과처럼 보였다.
그럴수록 나는 그의 포스트잇에 주목했다. 새로운 메모가 붙어있지 않으면 불안했다. 이따금 새 메모가 올라오긴 했으나 이전과 달리 글씨도 큼직해졌고 내용도 간략해졌다. 우편, 5시. 책, 전기, 물……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 단어나 짧은 명사형으로 끝이 났는데 그래서인지 혼자만의 암호처럼 보였다. 글자 수가 줄수록 해독이 힘들었다. 그가 남긴 글자들이 나에 대한 사랑의 척도라도 되는 듯 마음을 졸였다. 글자 수가 준 만큼 그가 내게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간혹 그는 안경을 손에 들고 책을 읽기도 했다. 한 번은 벼르고 벼르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그가 찡그린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안경도 한 번씩 벗어주는 게 눈 건강에 좋은 거야.
그의 말보다 찡그린 얼굴이 마음에 남았다. 동요가 없던 그의 표정에서 자주 짜증이 읽혔다. 그는 나를 옆에 두고 책 읽는 데만 몰두했다. 책을 읽는다기보다 뚫어져라, 보는 사람 같았다.
그는 변하고 있었다. 예전에 떠난 남자친구도 그랬다. 서서히 거리를 두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디 내뱉곤 돌아섰다.
널 보면 태엽 인형이 생각나. 태엽을 감아줘야만 움직이는 인형 말야. 대체 넌 무슨 생각으로 사냐?
나는 그게 내게 묻고 싶은 말인지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남자친구가 내게 왔을 때의 이유와 떠날 때의 이유가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뭐든 고분고분 따라주는 내가 이상형이라고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학창 시절 나의 생활기록부에는 소극적이라거나, 자발적 참여 부족 같은 말들이 반복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만나는 그도 저러다 갑자기 내게서 등을 돌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혼자 무언가를 끄적거리게 되었다. 그가 했던 것처럼 포스트잇에 짧은 일과를 적어 화장대 거울에 붙여두기도 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분량을 정해놓고 책을 읽는다든지, 혼자 영화 보기, 옷장 정리 등 구체적인 것들을 적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나로서는 첫 번째 자발적 참여인 셈이었는데 어제저녁 일도 그래서 벌어지고 말았다.
모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그의 집에서 나는 그를 위해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세미나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그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이전 같으면 직접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그였겠지만 어제는 그마저도 귀찮다는 듯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가 주방에서 부산을 떠는 동안 그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 뜯긴 책의 낱장을 일일이 접착제로 붙이던 중이었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책들을 보면 화가 나.
그는 나달거리는 책장을 손으로 들추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끼워져 있는 종잇장이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냄비의 물이 끓어 넘쳤다. 나는 서둘러 뚜껑을 열고 국수를 집어넣다가 국수를 삶기 전에 고기와 야채부터 볶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과 손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나를 불렀다.
저기 말야.
배고파요?
아니. 식탁 위에 면도기 보이지? 충전됐는지 좀 봐줘.
벽 쪽으로 붙여놓은 작은 식탁은 콘센트가 달린 벽면과 맞닿은 곳이어서 그는 매번 그곳에서 전자제품 같은 것들을 충전했다. 그런데 콘센트에는 면도기의 플러그만 꽂힌 게 아니었다. 휴대폰도 충전 중이었다. 그의 평소 성격대로 면도기와 전화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자로 잰 듯 열에 맞춘 그것들을 보자 긴장이 되었다. 불빛이 읽히지 않았다. 전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면도기의 불빛을 집중해서 봐도 어느 쪽이 붉은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실은 내가 색각이상자에요, 라고 밝히기도 난감했다. 왜 하필 지금인가, 그런 원망이 들 뿐이었다
충전됐으면 플러그 좀 빼줄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싱크대로 돌아가 손에 잡히는 대로 유리컵 하나를 집어 흐르는 물에 씻었다.
나 손에 물 묻었어. 직접 와서 봐요.
그가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짐짓 컵을 닦는데 열중한 척했다. 마지못해 일어서는 기척이 났다.
뭐야, 아직 빨간불이잖아.
그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그의 반응에 유리컵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컵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뒤로 물러서게 하곤 주방용 수건을 손에 들고 부엌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수건으로 유리 조각들을 쓸어 모으던 그가 갑자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삐꾸냐, 그걸 못 보게.
온몸의 신경이 송곳처럼 솟구쳐 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집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가 바닥에 깔개처럼 늘어진 뒤였다.
유리잔처럼 나는 그렇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말할 수 없이 슬프곤 했었는데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내게 등을 보인 채 불편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가 완전하게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