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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Kim Nov 18. 2022

블랙 스팟

3

자잘한 빗방울이 그의 아파트 창을 두드렸다.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투명했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검게 부푼 구름 덩어리들이 빗줄기를 쏟아냈다. 갑자기 쏟아지는 걸 보니 소낙비 같았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병째 마셨다. 찬물이 식도를 타고 흐르자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듬성듬성 붙어있던 포스트잇들이 몸을 들썩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냉장고의 여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촘촘하게 붙어있던 것들이다. 대부분 나와 관련한 계획들이었다. 


‘유진과 밥 먹기’, ‘유진과 영화 보기’, ‘유진과 자전거 타기’……. 


그는 평일에도 늦게까지 약국 문을 열었다. 주말에도 일요일 하루밖에 쉬지 못했다. 그런 중에도 나를 위해 틈틈이 시간을 내주었다. 대신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자전거를 타야 했다. 계획이 어그러졌다면 (그는 실행할 수 있는 계획만 세운다고 했으므로) 전적으로 날씨 탓이거나, 내 탓인 게 되었다. 바꿔 생각하면 적당히 어물어물 사는 여자 친구를 위해 일과도 정해주고 책임감도 준 셈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흔한 동호회나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 같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걸어오는 고교 동창들은 언제나 직장 문제 아니면 연애, 결혼과 관련한 이야기뿐이었다. 이야기 말미에는 친절하게도 넌 어때? 하는 물음을 잊지 않았다. 나는 약사인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악사를 만난다고?


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되물었다. 


악사가 아니고 약사라니까.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자 그가 악사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던 날에도 나는 순순히 유니폼을 벗고 쇼핑몰 로비를 걸어 나왔다. 건물 벽에는 대자보들이 포스트잇처럼 매달려있었다.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동료들이 건물 앞에 모여서 살고 싶어요, 를 외쳤다. 그들이 보는 시선과 나의 시선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보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틀렸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리 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 밀어낼 것이 걱정되었다. 


언젠가 잡지에서 우리나라 여성 색각이상자 수가 0.5 퍼센트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잡지에는 색각이상자들을 위한 교정 안경이나 지하철 노선도 같은 것들도 소개했다. 안경을 쓰고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는 감동의 사례들까지. 그들은 단지 불편할 뿐, 부끄러운 건 아니라고들 했다. 그들이 착용했다는 안경값이 비싼 편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처럼 하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검은색 교정 안경을 돋보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며 세상 밖으로 나를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다.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세미나 장소와 시간이 적힌 포스트잇이었다. 그는 이제 세미나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일정은 적어두었다.


석 달 전부터 그는 매주 두 번씩 약사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해고당하던 그즈음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그는 수강생들과 밤늦도록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는 세미나 준비로 바빴기 때문에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우리는 한 달에 서너 번밖에 만나질 못했다. 나는 지루할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그는 잠자는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 그가 정말 보고 싶을 땐 약국에 찾아간 적도 있었으나 근처에서 번번이 발길을 돌렸다.


실직 후 새 직장을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른이 코앞인 고졸 여성을 원하는 회사는 없었다. 쇼핑몰도 마찬가지였다. 안내데스크는 참신하고 발랄한 이십 대 초반이, 계산대나 판매대는 과외비를 벌려는 아주머니들이 독식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동료들이 재계약을 하거나 정규직 전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 나도 인근 제과점의 알바 일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면 제과점에서 얻은 빵으로 요기를 하고는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상은 똑같은 벽지의 무늬처럼 펼쳐지다 다음 날로 이어지곤 했다. 며칠 동안 그의 전화는 없었다. 안부를 묻는 문자메시지마저 뜸했다. 나는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꺼버렸다. 그가 집에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한 게 문제였다. 


빵 쪼가리를 우물거리면서 현관문을 열자 그가 서 있었다. 말끔한 슈트차림의 그가. 반사적으로 신발장 거울을 돌아보았다.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에 부스스한 얼굴. 내가 오히려 십 년은 늙어 보였다. 어안렌즈로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빵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바람에 손바닥으로 가슴을 쳤다.


괜찮아?


그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저녁에 커플 동반 모임이 있어. 전화기가 꺼져 있길래.


후회가 밀려왔다.


밥을 먹지 그래. 다시 연락할게.


잠깐의 정적과 함께 문이 닫혔다. 


인사할 타이밍마저 놓쳐버렸다. 하지만 신발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보자 그쯤에서 사라져준 그가 고마울 정도였다. 게다가 커플 동반 모임이라니. 그가 지인을 소개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나를 여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게 아니라면 공식적인 자리에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같은 무늬의 연속이던 일상 속에서 그날 밤 나는 새로운 무늬를 발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를 따라 모임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뭉그러진 빵처럼 다시 주눅이 들었다. 


고급스러운 한지로 마감된 벽지, 은은한 할로겐 조명을 따라 대형 홀이 펼쳐졌다. 홀을 가로지르자 통유리로 둘러싸인 룸이 보였다. 그런 고급 횟집은 처음이었다. 긴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여섯 쌍의 남녀가 일제히 우리를, 정확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다들 품위 있는 모습이면서도 눈빛만큼은 끈질기게 내 몸을 훑었다. 나는 백조 무리 속에 끼어든 까마귀처럼 쭈뼛거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오십 대로 보이는 커플 한 팀과 나머지는 삼, 사십 대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오십 대 커플부터 돌아가며 동행을 소개했다. 두 팀을 제외하곤 모두 약사 커플이었다. 우리 차례가 되자 그가 내 이름과 나이를 밝혔다. 모두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린 여자 친구 만나려면 긴장 좀 해야겠어.


건너편에 앉은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가 그와 나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웃었다. 잔을 받은 그는 묵묵히 맥주를 입으로 넘겼다. 


유진씨는 무슨 일을 해요?


대각선으로 앉은 턱선이 갸름한 여자가 톤이 높은 말투로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오십 대 남자가 말을 이었다.


하던 얘기나 끝내지. 아까도 말했지만, 경영에 실패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자존심 때문이겠죠.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내 옆에서 줄곧 듣고만 있던 그였다.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도 그랬고, 아마 여기 계신 선배님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매달 임대료 내기도 벅찬 상황에서 경영 수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큰소리만 쳤으니까요.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많습니다. 


저 친구 단단히 작정했군.


누군가 던진 농담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약국을 성공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전략들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그동안 그가 들였을 노력이 짐작되었다.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그가 그토록 들떠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속내를 드러낼 줄도 알았다. 그의 약국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알고 있었다. 정작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약사라는 사실과 그런 그가 현재 나의 연인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유리잔에 든 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때 유니폼 차림의 종업원이 대형 접시를 양손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화려한 꽃과 이파리로 장식된 접시 위에는 커다란 바닷가재가 누워있었다. 술기운 탓인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껍질을 가르고 살을 발라놨는데도 가재의 아가미가 살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여러 개의 젓가락이 가재의 살점을 집어갈 때마다 가재는 기다란 집게를 필사적으로 꼼지락거렸다. 살아있는 가재를 먹다니. 


먹어봐.


그가 옆에서 팔을 툭 쳤다. 


내가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자 가재가 눈알을 굴려 날 쳐다보았다. 살아있는 가재를 먹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재는 계속해서 나를 노려봤고 그는 옆에서 나를 채근했다. 먹어봐, 라고. 


살아있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숟가락으로 가재 머리를 툭, 내리쳤다. 가재는 여전히 집게를 꿈틀거렸다. 


숟가락보다 단단한 뭔가가 필요했다. 그때 가재 접시 위에 장식용으로 놓인 납작한 옥돌이 눈에 들어왔다. 돌멩이라면 한방에 기절시킬 수 있었다. 옥돌을 집어 드는 순간, 그가 내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의 침묵. 냉랭한 기운이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자 수십 개의 눈이 나를 향해 쏠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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