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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는 책을 읽느라 인기척을 듣지 못했다. 아주머니 하나가 들어와 총각 선생, 하고 부르자 그때서야 책을 덮고 일어섰다. 숱 없는 곱슬머리에 넓은 이마, 적당히 여윈 얼굴에 짙은 뿔테안경. 조금은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껌 한 통만 한 타이레놀을 사면서 약의 효능, 사용법, 주의사항까지 듣긴 처음이었다.
이튿날 퇴근길에 약국 앞에서 걸음이 멈춰졌다. 먼지 한 점 없이 잘 닦인 유리문이었다. 여전히 책에 심취한 그가 유리 너머로 보였다. 종일 쇼핑몰 안내데스크를 지키는 나처럼 그도 답답하고 좁은 유리문 안에 갇힌 기분일까? 고객들에게 매일 비슷한 질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떠올랐고, 누군가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구나, 생각할 때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리면 뭔가를 들킨 상황이 되고 말아서 나는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는 듯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열대 앞쪽에 세워진 염색약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새치머리용’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색상은 없나요?
내가 묻자, 그가 안쪽에서 염색약 세 박스를 들고 오더니 진열대 위에 늘어놓았다.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 모델의 얼굴이 박스마다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모두 어두운색이네요.
그가 나를 잠깐 바라봤던 것 같다. 그는 곧 박스를 하나씩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와인 빛이 도는 레드 계열, 이건 카키, 그리고 이건 밝은 갈색 계열입니다. 젊은 여성분들이 선호하는 색들이죠.
나는 그때서야 내가 여배우의 머리 색을 읽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내 선택을 기다린다는 듯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걸로 할게요.
나는 아무 상자나 집어 들고는 서둘러 계산을 마친 뒤 약국을 나왔다. 나와서 보니 상자를 쥔 손이 축축했다.
얼마 뒤 압박붕대를 새로 사기 위해 약국에 들렀다. 종일 안내데스크 앞에 서 있으면 부어오르는 다리 때문에 압박붕대로 다리를 감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머리 색이 잘 어울리십니다.
네?
나는 조금 뒤에야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곤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내준 붕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진 붕대를 주우려다 다시 떨어뜨렸다.
잠깐만요.
그가 내 눈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나를 따라 해봐요.
나는 그가 하는 대로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간단한 심호흡이었는데도 긴장이 풀렸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타이레놀을 사던 날처럼 압박붕대를 오래 사용하면 다리 색이 변하거나 피부가 딱딱해질 수 있다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만 명 중 하나가 걸릴지 모를 부작용이라면서.
그때부터 자주 그의 약국을 드나들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웬만한 물건들은 약국에서도 팔았다. 나는 그의 설명들을 듣는 게 좋았다. 그도 그런 나의 태도가 싫지 않은 것 같았다. 약국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다 저녁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다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볼 만큼 친해졌다. 가끔 펍에서 맥주도 마셨다. 어느 날 맥주를 마시고 나서 그가 어색하게 첫 키스를 시도한 뒤로는 그의 집을 드나들며 그가 만든 요리를 먹고 그의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
그렇게 그와 거짓말처럼 연인이 되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그의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형이나 아우가 있는지. 누나나 여동생은. 그도 저도 아니면 나처럼 형제 없이 혼자 자란 아이인지, 그가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묻기가 어려웠다.
그는 여간해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공포, 멜로, 코미디 어떤 장르의 영화를 봐도 표정에 동요가 없었다. 사정을 할 때조차 마찬가지였다. 미끄러지듯 내 위에서 내려오면 끝난 거구나, 였다. 그때마다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체불명의 물질이 인간의 뇌에 침투해 감정을 없애버리는 내용의 영화였다. 침입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면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시체처럼 걸어 다니던 사람들 속에서 그를 본 것만 같았다.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양말만큼은 꼭 신는다는 거였다.
그는 땀이 찔찔 나는 한여름에도 양말을 벗지 않았다. 잘 때는 물론 섹스할 때도 양말만큼은 고수했다. 만난 지 삼 개월쯤 돼서 그가 입을 열었다.
발을 보온시켜서 기를 순환시키는 일종의 단전호흡이지.
그러고 보니 ‘기공 수련’이라고 쓰인 포스트잇을 냉장고 문에서 본 것도 같았다.
그는 포스트잇에 계획을 적어 냉장고 문짝에 붙여두는 걸 좋아했다. 공간이 너른 벽은 실행하지 못할 계획들을 무분별하게 늘어놓게 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적어놓은 계획들을 반드시 실행에 옮겼다. 그래선지 알몸에 양말만 신은 그가 그닥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내가 그의 입에서 기공 수련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 얼마 뒤에 생긴 일이었다. 막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던 길이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쯤 휴대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곧장 발길을 돌렸다. 여러 번 벨을 눌렀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일전에 그가 알려준 도어록 비번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알몸으로 욕실에서 나오던 그가 나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침입자라도 본 얼굴이었다. 그의 맨발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라다 만 듯 기형적으로 짤막한 발가락들이.
어…… 무슨 일이야?
그는 수건을 발 쪽으로 늘어뜨리며 더듬거렸다. 일은 내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 보였다. 나보다 열 살이나 더 먹은 그가 친구처럼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덤벙대긴.
달라진 건 없었다. 이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내 앞에서 양말만큼은 벗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