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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그가 정신을 잃던 순간 나는 119에 전화를 걸고 그의 집을 도망쳐 나왔다. 아파트 화단 펜스 뒤에서 구급대원들이 그를 실어 나르는 걸 지켜보았다. 다행히 그는 그들과 말을 주고받을 만큼 의식이 돌아와 있었다. 새벽녘쯤 병원에 간 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경미한 부상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침에 그의 집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하므로 그때나 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의 집 앞에 오긴 했는데 막상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없었다. 책임을 물라면 얼마든 용의는 있었다. 두려움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다면 기준치를 훌쩍 넘어섰을 터였다. 더 소심해지기 전에 나는 저울에서 뛰어내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 안은 어젯밤 그대로였다.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섰다.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퀭한 눈에 짙은 다크서클. 밤새 못 잔 티가 역력했다. 세면대 위에 나란히 놓인 칫솔 두 개가 보였다. 빨간색이 내 것이고 초록색이 그의 칫솔이었다. 손잡이가 말짱한 쪽이 초록색이었다. 나는 빨간 칫솔을 집어 휴지통 속에 던졌다.
칫솔은 그가 야심 차게 준비한 커플 목록 중 하나였다. 그는 칫솔뿐 아니라 슬리퍼, 티셔츠, 쿠션, 심지어 모기퇴치 세트까지 커플용을 고집했다. 나이 마흔에 그럴 수 있다니.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멋쩍어하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문제는 칫솔이었다. 시중에 판매되는 칫솔 대부분이 파랑과 빨강 계열로 구분을 짓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빨간 칫솔 손잡이에 조그맣게 잇자국을 남겨두었다. 사물에 표식을 남기는 건 나의 오랜 습관이기도 했는데 시작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전교생 신체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한 줄로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나의 차례가 돌아오자 담임선생은 손바닥만 한 책을 눈앞에 펼치며 무슨 숫자가 보이느냐고 물었다. 책에는 조잡한 색깔의 점들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게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화려한 불꽃들이 책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숫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담임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여기 적힌 숫자가 안 보이니?
나는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얘, 말해봐. 안 보이냐고 이게?
담임의 집요한 물음이 이어질 때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이들이 웅성거렸고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날 누군가 내 체육복 등판에 삐꾸, 라고 낙서질을 해놓았다. 어감만으로도 나쁜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말의 의미도 모른 채 덩달아 나를 삐꾸라고 놀렸다. 한동안 이름보다 그렇게 불렸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빨간색이 칠해진 교과서나 학용품에 남몰래 흠을 내놓기 시작했다.
욕실을 나오면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세 평 남짓한 거실에는 커다란 책장이 마주 보고 서 있었고 양쪽 모두 책들로 빽빽했다. 약학 서적에서부터 각종 인문서, 경영서, 자기 계발서……. 책들은 종류별로 분류되었다. 그것은 다시 책의 크기라든지 발행 연도, 저자 순으로 나뉘었다.
그는 그 많은 책의 위치를 모두 기억해냈다. 책을 꺼내 읽고 아무 데나 꽂아두면 귀신같이 집어내곤 했다. 한 번은 양쪽 책장에 책들을 일부러 바꿔놓아 보기도 했는데 며칠 뒤 어김없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빈틈없고 꼼꼼한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그가 나를 왜 만나는지 가끔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