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와 사이드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4
이튿날 평소처럼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팀장이 날 보자마자 버럭 소릴 질렀다.
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대체 정신을 어따 팔아먹은 거야? 교정하러 들어왔으면 일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니가 기자야? 니가 뭔데 기사를 이따위로 고쳐? 한두 개도 아니고 아주 작살을 냈네.
정신 나간 사람은 팀장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격양돼 있었다.
팀장의 손에 들려있던 신문이 내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신문을 펴자 전날 내가 수정한 몇몇 기사에 군데군데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 외국의 운동선수들 이름이거나 외래어로 된 지명들이었다. 알면서 틀린 부분도 있었고, 수정해야 할 부분을 놓친 것도 있었다. 사정이 어떻든 동그라미 속 그것들은 규칙과 많이 어긋나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한 거 같은데 그게 또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조판이 되기 전 최종 검토에서 오류를 잡아내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마감 직전 연예부에서 특종을 넘기는 바람에 모두 혼이 나가 있었다. 바로 인쇄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다들 대충 훑어보고 넘겼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줄이나 알아? 니가 망친 기사 대놓고 비꼬는 기사가 올라왔다고. 눈 있으면 와서 봐.
팀장이 가리킨 화면에는 XX일보, 어설픈 외국어 표기 논란, 맞춤법 틀린 기사에 비난 댓글 폭발,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올라와 있었다.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을 사이가 좋지 않던 경쟁지에서 작정하고 여론몰이에 한창이었다. 팀장의 욕설 몇 마디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포털 메인에 올라갔던 우리 쪽 기사가 밑으로 떨려날 분위기였다. 뒤쪽에서 해당 기사를 쓴 기자가 정정 기사 내게 생겼다며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마침 은성 씨가 는적는적 사무실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오자마자 분위기를 파악한 은성 씨 표정이 오묘하게 흔들렸다. 미안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자기가 없으면 신문사 편집부가 돌아가질 않는다는 듯, 이제야 알아먹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었어야지. 발끈해서는.
팀장은 은성 씨를 흘끔대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은성 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에 앉아서 일 준비를 시작했다. 사고의 책임 여부는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왔다.
영상팀 출입문 앞에서 서성이는데 누군가 안에서 나왔다. 조안의 행방을 묻자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자리를 비운 것 같다고 했다. 조안이 틈만 나면 사옥을 돌아다닌다는 편집기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갈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건물은 생각보다 광범위한 조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어설퍼지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걸 실감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편집부 사무실이 있는 10층까지 되돌아가는 동안 자책은 체념으로 바뀌었다. 무엇을 따지겠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건물 내부를 미친놈처럼 헤매고 다녔는지. 조안을 만난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텐데. 10층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생각에 골몰하느라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그녀를 보고도 지나칠 뻔했다.
이번에는 올드스쿨 록밴드 로고가 그려진 파란 원색의 티셔츠 차림이었다. 자기보다 작아도 한참은 작고 어려 보이는 어떤 여자를 붙들고는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화풀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보내서였다.
안녕, 친구. 꼬모 에스타?
안녕, 조안.
친구라는 말에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처음 만나도 쉽게 친구가 되는 외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한다 해도 정말 그녀와 친구라도 된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신문사에서 나를 그토록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다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같이 있던 여자를 엘리베이터에 태워 보내고는 조안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좋은 사람들이란 다큐 알지? 같이 일하는 막내 작가야.
조안은 계속해서 묻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내가 하는 일은 리얼리티를 저지먼트 하는 거야. 다큐가 사실과 다르면 그건 코미디니까.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근데, 자기 왜 슬퍼 보일까?
그 말에 뭔가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치밀었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세상일이란 게 다 그래. 어쩌다 일이 생기기도 하고.
조안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정작 도움을 구하는 순간에는 중립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녀다운 모습 같기도 했다. 난데없는 참견질 덕분에 일시적으로 뇌 신경에 혼선이 생긴 것이라 해도 조안을 붙잡고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었다.
남편이 날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뜬금없이 그녀가 물었다.
내가 알 리 없는 질문이었기에 말없이 눈만 끔벅였다.
사이다.
네?
어릴 적 내 애칭이 사이드였거든. 친할머니가 붙여준 애칭이었는데 아랍계 분이셨어. 그땐 부모님도 친구들도 모두 나를 그렇게 불렀지. 근데 그게 스펠링은 s. a. i. d. a란 말야. 한국인 남편이 그걸 듣고는 장난처럼 사이다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사이드든 사이다든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조안은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손가락으로 누르고는 말했다.
처음엔 아랍어 발음이 어색했지만 사이드의 의미가 마음에 들었어. 스페인어로 Feliz인데 행복과 기쁨, 즐거움을 담고 있는 이름이라고 할머니가 말해줬거든. 그래서 그렇게 불릴 때마다 난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 나중에야 그게 남자 이름이라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어. 지금도 인스타나 페북에서는 그렇게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지. 옛날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말야.
어깨를 으쓱, 올리며 조안이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아이처럼 행복해 보였는데 생각해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얼굴을 했던 것 같다.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울리지 않았다면 그 웃음을 조금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휴대폰을 보던 조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끔은 이런 메시지가 나를 시험에 들게도 하지만 말야.
농담처럼 투덜대면서 그녀는 쫓기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문이 닫히는 사이로 그동안 너무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고질적인 언어들이 이방인의 입을 통해 한결같고 지루한 어감으로 쏟아져나왔다.
요즘 애들 왜 이렇게 끈기가 없니? 일 얘기만 나오면 워라벨이 어떻고, 꼰대가 어떻고. 한국 시스템에 맞추려면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어? 나도 남편 따라 한국 사람 됐어. 근데 내가 안 하면 또 누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