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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Kim Nov 18. 2022

사이다와 사이드

[20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3

그날 퇴근길에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는 은성 씨가 보였다. 함께 나온 건 아니었는데 가끔은 그렇게 역으로 가는 길에 은성 씨를 보았고 각자의 길을 가고는 했다. 은성 씨 주변으로 깃발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대가 시위 행렬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시내 한복판에서 심심찮게 보는 광경이었지만 그날은 규모가 남달랐다. 개혁을 외치는 구호 소리와 함께 보수단체와 진보단체가 실랑이를 벌였다. 시위대 앞에 멈춰선 은성 씨와 어쩌다 보니 나란히 서게 되었다.


출구가 막힌 것 같은데요.


날 선 눈빛이 나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란 걸 알고는 그제야 은성 씨는 표정을 늦추었다.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은성 씨는 그렇게 말하며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나도 그녀를 따라 대로변 옆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수라장 같은 현장을 조금 벗어나자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 풍경이 펼쳐졌다. 직장인들을 유혹하는 고만고만한 술집들과 음식점을 뒤로하며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걸었다. 은성 씨가 불쑥 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글쎄요.


내가 고개를 젓자 그녀가 턱 끝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착한 빵집, 이라고 쓰인 돋움체의 단정한 간판이 눈앞에 보였다.


착하다는 말요.


아, 그거요.


언제부턴가 착하다는 말이 윤리나 칭찬의 기준이 돼버렸어요. 아이들은 밥 잘 먹어도 착하고, 어른 말만 잘 들어도 착해진다고 믿어요. 심지어 이제는 구두도 착하고 빵도 착하대. 착한 게 그런 식으로 정의가 되는 건가요?


흥분한 은성 씨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커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러게요. 착한 것에 너무 가둬진 느낌이네요.


내가 동조하자 은성 씨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길 한쪽으로 떡볶이와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들이 보였다. 참고 있던 식욕이 발동됐지만 은성 씨와 내가 사이좋게 서서 포장마차 음식을 먹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어색했다. 나는 같이 먹을래요, 대신 그렇게 물었다.


어묵 좋아해요?


은성 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뎅 좋아해요.


아, 오뎅 좋아하시는구나. 근데 그거 잘못된 표기잖아요.


은성 씨는 눈썹을 내려뜨리며 말했다.


오뎅만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나요. 할머니가 오뎅, 오뎅 할 때마다 오뎅이 뭐야 할머니. 어묵이라고 해야지, 그러면 할머니는 도토리묵도 아니고 고것은 뭔 묵이다냐. 난 내 새끼 맛나게 먹으면 그걸로 되었다, 그러곤 하셨어요.  


은성 씨는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저도 할머니 마음이 뭔지는 알아요. 소주 한잔 하자고 누가 그러면 뭔가 메마른 느낌이 들어서 별로예요. 쏘주라고 해야 정감이 가더라고요. 로브스터라고 표기하면 그게 랍스터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엔도르핀도 그래요. 표기법대로 쓰면 일본말 같기도 하고 그냥 좀 이상해요. 엔돌핀이라고 해야 저는 그런 기운이 막 느껴지거든요.


은성 씨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다. 뾰족하게 세운 고슴도치의 가시가 왠지 둥글둥글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뎅에는 쏘주가 최고죠.


내가 말해놓고도 쑥스러워 금방 후회가 되었다. 은성 씨가 나를 보더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성 씨가 웃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 때문에 웃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은성 씨의 웃는 모습을 보면서 머릿속에선 나도 모르게 착한 오뎅을 떠올렸던 것 같다.


골목을 벗어나자 우리가 가려는 역 주변까지 시위대의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버스들은 정류장을 지나쳐갔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집 방향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걷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며칠 뒤 은성 씨의 갑작스러운 조퇴 선언이 있었다. 편집 마감을 얼마간 남겨둔 시점이었다. 출근 때부터 창백한 얼굴로 버티던 은성 씨를 팀장도 막진 못했다. 앉아있을 기운조차 없어 보이는 은성 씨를 붙잡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까지 치며 보내긴 했으나 막상 혼자 남으니 자판을 치는 손이 덜덜 떨렸다. 밖에서 일할 때만큼은 금연하듯 버텨왔는데 그날은 조바심에 뭐든 먹고 싶어졌다. 눈앞에 치킨이며 라면 같은 것들이 어른거리면 마감이 끝나는 대로 먹어야지, 다짐하며 정신을 차렸다. 믹스 커피라도 마시면 집중이 될 것 같았지만 엉덩이를 뗄 여유조차 없었다. 볼펜 꽁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모니터에 눈을 바짝 대고는 눈에 익은 단어도 두 번 세 번 검토했다. 그렇게 교열 작업이 막바지쯤 이를 때였다.


모니터에 띄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외야수 엔젤 파간의 빈자리로 시작하는 야구 기사를 손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면 Angel이었지만, 푸에르토리코 선수였기 때문에 엔젤을 앙헬로 바꿔주었다. 그게 회사 방침과도 맞았다. 다음 기사로 넘어가려는데 갑자기 손가락 하나가 쓱 들어와 모니터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조안이 거기 있었다.


우리 푸에르토리코 선수네. 앙헬? 스페인식으로 쓴 거야? 자기야 근데 이름 저렇게 쓰면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알아들을까?


그게, 현지 원음에 맞춰 써 주다 보니 그렇습니다.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모니터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쌘프런씨스코우, 푸얼터리코, 앙흐헬, 이게 네이티브야. 근데 이렇게 쓰면 외국 사람들이 알아듣는단 말야? 자기는 한국말로 모든 발음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 발음이 원음인데 들어볼래? 구글 번역기보다 훌륭할걸.


그녀는 보란 듯이 팔짱을 끼더니 자국의 스포츠 선수들 이름을 멋대로 불러대기 시작했다. 유창한 스페인어였다.


어때, 자기가 쓴 글자랑 내 발음이랑 같냔 말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자꾸만 말을 시키는 바람에 대꾸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선 다들 나를 조안이라고 불러. 푸에르토리코에 가면 호안이라고 부르지. 근데 헝가리 친구들은 요안이라고 한다니까.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멍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다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뭔가 잠깐 왔다 간 기분이 들긴 했으나 그런 걸 여념 할 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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