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민규의 <아침의 문> (2010년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
2000년대 한국 소설은 1980년대의 역사적 상처와 1990년대의 역사적 후일담을 통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개인을 찾기 위한 노력에서 벗어나 현재의 사회 문제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2000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이 박민규이다.
박민규가 현실 사회 문제를 문학으로 수용하는 모습은 전방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넓게는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를 해학적으로 다루기도 하고(『지구영웅전설』), 좁게는 고등학생들의 왕따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핑퐁』). 이러한 그의 작품은 전통 문단과 단절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문학을 표방한다는 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탈권위, 탈중심의 정신과 일치한다. 첨예한 현실 인식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문학을 통해 굴절시켜 보여 주는 점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실험적 글쓰기는 환상성으로의 도피, 전망 없는 글쓰기라는 문단의 우려와는 달리 독자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수용되었으며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술성과 오락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국내에서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이러한 특장들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2010년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아침의 문』이다. 자살을 하려는 한 청년과 미혼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문체를 통해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지 않게 만들어가는 작가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글을 끌어간다. 죽음과 탄생이라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수레바퀴를 부딪치게 함으로써 죽음과 탄생이 결국은 하나의 수레바퀴 안에서 회통(回通)의 궤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침의 문』에는 자살을 하려는 30대 ‘나’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그녀’가 등장한다. 자살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간 ‘나’와 맞은편 옥상에서 아이를 출산한 ‘그녀’가 아이를 죽이려는 순간 서로를 목격하게 된다. 죽으려는 자와 탄생을 맞이하고 있는 자를 한 순간에 부딪쳐 놓은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죽음의 장소와 탄생의 장소는 그 순간 어떤 것이 죽음이고 어떤 것이 탄생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죽는 것과 태어나는 것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삶에 대한 허무함과 그 허무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던져지는 삶의 소중함을 엿볼 수 있다. 탄생은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탄생의 의미를 삶의 의미로 확장시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삶과 죽음은 굳게 융합되어 떼어 낼래야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결부되어 있다. 분리가 되지 않으니 구별이 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속에는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항상 자리를 잡고 있고, 죽음의 의미는 삶의 의미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렇듯 삶과 죽음은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안팎의 구별이 없으니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흘러간다. 옥상 위의 ‘나’와 ‘그녀’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그들의 동인(動因)을 구분하기 어렵다. ‘나’와 ‘그녀’의 심리 상태는 산다는 것이 죽음이고 죽음이 사는 것이다. 우리가 이 순간 살고 있는 것은 이 순간만큼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기에 ‘그’와 ‘그녀’의 심리 상태는 같다.
[쪽수는 2010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34 기준]
삶을 부정하는 인간의 나 자살할 거야, 란 떠벌림이다. 그런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알콜릭 정도가 적당하다. 삶을 인정하지 않고선 실제로 자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뭐랄까, 결혼을 한 인간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16쪽)
‘삶을 부정하는 인간’은 ‘자살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삶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죽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실존은 삶과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삶의 욕구와 죽음의 욕구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진 사람만이 삶에 대한 회의와 고뇌를 갖게 되고, 이러한 회의와 고뇌 속에서 비로소 죽음의 욕구가 표출된다. 삶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아서 죽는 것이다. 삶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은 굳이 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이 순환성을 갖게 되는 이유도 이러한 심리 경계의 모호성 때문일 것이다. 삶의 욕구 끝에 죽음의 욕구가 있고 죽음의 욕구 끝자락에 삶의 욕구가 버티어 서 있다. 뫼비우스의 띠 안쪽 면에 볼펜을 대고 선을 긋기 시작하면 바깥쪽 면으로 선이 이어진다. 이렇듯 뫼비우스의 안쪽 면이 죽음의 면이라 보고 바깥쪽 면이 삶의 면이라 가정한다면 죽음의 면에서 출발한 볼펜의 선은 삶의 면에서 멈추게 된다. 삶의 이면에 죽음이, 죽음의 이면에 삶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살을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죽으려는 욕구의 이면에 삶의 욕구가 같이 드러나 있다. 삶과 죽음의 동일성은 ‘나’의 행동과 말 속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나’의 죽으려는 이유에 대해서 작품은 직접적으로 밝히려 하지 않는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그것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31쪽)에서 보듯 당사자가 한사코 말하지 않겠다는 바에야 우리가 알 수는 없다. 다만 ‘나’가 갓 낳은 아이의 목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허약한, 무방비 상태의 생명을 공격하는 그 느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끝끝내 대면한 자신의 진짜 이유 앞에서 그는 갑자기 이성을 잃는다.”(35쪽)라는 부분을 통해 사회에서 ‘나’가 어떠한 상태로 살아왔는지를 짐작하게 하면서 ‘나’의 자살 이유가 힘없는 자신(무방비 상태의 자신)을 사회가 공격한 데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에서 힘없는 약자(아이)를 공격하는 공포스러운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독자들에게는 현대 사회의 모습에 대한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사회학자인 뒤르켐은 자살 현상을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보았으며, 연구 대상을 개인이 아닌 사회로 삼았다. 그는 자살은 개인적 행위가 아닌 사회의 특정한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박민규는 ‘나’의 자살 이유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병리적인 문제라는 것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죽으려 하지만 살려고 한다. 이는 ‘나’가 동반 자살에 실패한 후 하는 행동에서 발견된다. “배가 고프다”(12족), “다시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나’는 편의점에 가서 비스킷을 먹고 우유를 몇 모금 마신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우유와 비스킷을 토하고 만다. 살려고 먹은 비스킷과 우유를 토하는 모습에서 육체적으로는 살려고 하는 ‘나’와 심리적으로 죽으려는 ‘나’ 사이의 충돌이 느껴진다. ‘나’는 비스킷을 먹고 우유를 마신 후 다시 죽으려 자살을 시도한다. 죽으려는 자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지만 육체와 심리를 분리시켜 살펴보면 이해가 어렵지만도 않다. 결국 ‘나’의 육체와 심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욕구를 ‘나’, 하나의 몸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나’가 지니고 있는 죽으려는 욕구와 살려는 욕구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가 장면이 있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까지 드러내지 않은 ‘순간접착제’를 구입한 이유이다. 편의점을 나온 ‘나’는 다시 동반 자살을 시도한 자신의 옥상으로 올라간다. 그 순간 주머니 속에서 편의점에서 구입한 ‘순간접착제’를 발견한다. 그러난 ‘순간접착제’를 왜 구입 했는지를 ‘나’는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경과한 후 옥상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려고 하는 순간까지 ‘순간접착제’를 산 이유를 모르겠다고 반복하고 있다.
다시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지다 이건 뭐지? 편의점에서 산 순간접착제를 나는 손끝으로 확인한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접착제를 산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겠다. 도무지 알 수 없다. 살아, 인간이 하는 일은 실은 모두 이상한 짓들이다. (18쪽)
순간접착제를 산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뜯지도 않은 플라스틱 튜브를 나는 결국 휴지통 속에 던져버린다. (26쪽)
작품의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드는 이 순간접착제를 산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분명 여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18쪽에서 단락을 바꿔가면서까지 접착제를 산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자살을 하려는 마지막 순간에서도 모르겠다고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순간접착제’를 구입한 분명한 이유가 있다. 순간접착제는 어떠한 접착제보다 접착력이 강하다.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강한 접착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강력하게 접착하고자 한 것일까. 죽으려는 자가 강력하게 붙이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이 정도의 의문만을 가지고 접근해 보아도 ‘순간접착제’를 구입한 이유를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죽으려는 ‘나’는 아마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죽음을 삶과 붙이고 싶은 ‘나’의 심리가 ‘순간접착제’를 구입하게 한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기 위해서는 띠를 엇갈리게 붙여야 한다. 작품에서 끝까지 감추고 있는 ‘순간접착제’를 구입한 이유는 죽으려는 욕구의 끝을 살고 싶은 욕구의 끝에 엇갈리게 붙이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이렇게 붙여진 삶과 죽음의 욕구는 안팎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고, 그 띠를 타고 유유히 삶과 죽음이 엉키어 흘러간다.
‘나’를 통해서 알아 본 뫼비우스의 띠는 ‘그녀’에게서는 좀 더 복잡한 심리상태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그녀’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 이론을 더욱 구체화 시킨 칼 메닝거의 이론을 적용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의 이론을 대략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남을 죽이고자 하는 욕구(Wish to kill)와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Wish to be killed), 그리고 죽고 싶은 욕구(Wish to die)의 세 가지가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남을 죽이는 행위와 반대로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같은 동시에 그밖에도 자기 아닌 남이나, 또는 여타 방법으로 죽음의 결과를 자초하는 염원마저 동질적인 것임을 밝혔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의 욕구는 ‘나’가 지니고 있는 것보다 복잡하다. 이는 ‘그녀’가 ‘나’의 상황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그녀’는 ‘나’에 비해 죽고 싶은 이유가 분명하다. 그러나 ‘나’와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어 보인다. 죽고 싶은 욕구가 아닌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로 나타난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란다. 또 아이를 출산하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미친 인간이 나타나 편의점 주변에 휘발유를 뿌린다. 그리고 불을 붙인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0쪽)
지금 이 순간 골목 어딘가에서 가스가 폭발한다. 출근 시간이고, 또 늘어선 가판들이 소방차의 진입을 가로막는다. 한순간 모든 게 끝장나고 누구도 자신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 (32쪽)
이러한 ‘그녀’의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는 다름 아닌 뱃속에서 꿈틀대는 아이에서 비롯된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욕구가 뱃속에서 살려고 꿈틀대는 아이에 있다는 설정은 하나의 몸에서 죽음의 욕구와 삶의 욕구가 함께 존재하는 모습을 의미 있게 표현한 문학적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살려고 하는 아이의 꿈틀거림이 ‘그녀’에게는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양가치성이 결국 동일가치가 되어 그녀의 몸을 지배한다.
‘그녀’가 죽임을 당하고 싶은 다른 이유는 아이의 아빠와 가족에게도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낸 ‘괴물’인데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녀’ 자신이 그 ‘괴물’이 된다. ‘그녀’ 자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를 제공해 준 ‘괴물’로 자신이 변주(變奏)되는 장면을 통해서 가학과 피학의 대상이 모호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도려내어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진단서를 떼 오라고 미친년아. 사실을 알아야 할 단 한 명의 인간은 그렇게 소리쳤다. (중략) 이 세상은 주민등록증을 가진 괴물, 학생증이며 졸업증명서며 명함을 가진 괴물들이 가득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로를 괴물이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낸 단어가 인간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었다. (중략) 꺼내 든 칼로 아랫배를 누르며 왜, 병원에서 못 지운대? 내가 지워줄까? (20쪽∼21쪽)
간섭이 지독하나 실은 딸에 대해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한집에 살면서 서로 괴물이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낸 단어가 가족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22쪽)
아이가 운다. 아이가 울므로 그녀는 덜컥, 겁이 난다. 존나, 하고 그녀도 흐느낀다. 지금껏 느껴온 공포와는 또 다른 성질의 공포가 그녀를 범하기 시작한다. 아이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그렇잖아? 그런 표정으로 그녀는 울고, 숨을 몰아쉴 뿐이다. (중략) 아이의 목을 그녀는 바라본다. 자꾸 우니까... 하여간에 자꾸 우니까, 하고 그녀는 입술을 떤다. (34쪽)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를 죽이려 하는 모습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아이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신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죽이는 것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들이 욕하면서 살아온 괴물로 인해 생긴 죽음의 욕구가 결국 자신을 새로운 괴물로 만들면서 다른 이들에게 죽음의 욕구를 생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보편적인 현대인의 상징일 수도 있다. 죽음의 욕구로 충만되어 있는 그녀가 아이를 죽이는 모습에서 삶과 죽음의 뫼비우스의 띠를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작품 속 ‘나’와 ‘그녀’를 통해서 본 삶과 죽음의 욕구는 작품 제목인 ‘아침의 문’에서 더욱 의미있게 구축된다.
‘문(門)’은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밖으로 나가기 위한 구조물이고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구조물이다. 「아침의 문」에서는 삶을 시작하기 위한 ‘탄생의 문’과 삶을 마감하기 위한 ‘죽음의 문’, 두 가지가 존재한다. 이 두 개의 문은 옥상 위에서 마치 ‘하나의 문’처럼 만나 부딪친다. ‘나’는 자살을 하려 압박붕대를 타원형으로 만들어 넥타이처럼 목에 두른다. 이 타원형의 문이 ‘나’에게 삶을 나가는 ‘죽음의 문’이다. “축 늘어진 타원형의 문을 열고서 나는 머리를 집어넣”(31쪽)은 후 ‘나’는 반대편 옥상에서 그녀의 밑에서 “붉게 부푼 타원형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발견한다.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탄생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두 개의 문은 “이곳을 나가려는 자와 그곳을 나오려는 자는 그렇게 대면하고 있었다.”(33쪽)라는 본문처럼 서로 대면하고 있는 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을 나가려는 자와 삶으로 나오려는 자는 문에서 서로를 목격한다. 이는 상반된 두 개의 문이 마치 ‘하나의 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가 ‘죽음의 문’에서 목을 빼내어 ‘탄생의 문’을 통과한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장면을 통해서 ‘하나의 문’이 완성된다. 또한 이 장면의 시간적 배경이 아침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아침’은 하루를 구성하는 첫 번째 국면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아침의 상징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천지창조의 시작, 어둠을 상징하는 악, 암흑의 세계를 물리친다는 의미가 있고, 이런 의미에 따라서 소생, 부활, 광명, 재생을 상징한다. 이러한 ‘아침’은 밤과 구별되나 아침과 밤은 하루라는 하나 속에서 순환된다. ‘죽음의 문’에서 나온 ‘나’와 ‘탄생의 문’에서 나오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하는 ‘아이’가 ‘아침’이라는 시간에서 만나면서 죽음의 욕구를 삶의 욕구로 바꾸는 희망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아침’ 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도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에 힘을 실어 준다. ‘아이’는 미래의 가능성, 잠재력, 단순함, 순진무구를 상징한다. 한편 심리학의 경우 아이는 영혼을 상징하며, 이 영혼은 무의식과 의식이 결합될 때 태어난다. 또한 ‘아이’ 중에는 괴물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키는 영웅적 아이도 있다.
그는 아이를 내려다본다. 아이가 운다. 울고, 숨을 쉰다. 주섬주섬 붕대를 모아 그는 일단 아이의 몸을 덮어준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는 잠시 아이를 안아본다.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가, 매달린 태반을 어쩌지 못해 통째로 안아 올린다. 그의 품에서 아이는 울다, 훌쩍인다. 바닥의 콘크리트보다도 무뚝뚝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씨발, 하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 외의 다른 말은 딱히 떠오르지도 않는 아침이다. 그는 계속 그러고 있을 뿐이다. 다른 아무것도 해줄 생각이 없으면서 (36쪽)
‘죽음의 문’에서 나온 이가 건너편 옥상에서 갓 ‘탄생의 문’을 나온 후 죽임을 당할 뻔한 아이를 ‘아침’의 시간에서 안고 있다. - ‘괴물’을 없앨 지도 모를 영웅을 희망의 시간에 안고 있다. - 결말을 장식하고 있는 ‘아침’과 ‘아이’의 상징을 통해서 작가는 현실의 척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현대인들에게 지금보다는 밝고 나은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는 그로데스크한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찬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침의 문』이 갖고 있는 매력이다.
박민규의 대중적인 인기의 이유가 그의 다소 가벼워 보이는 문체와 욕설의 여과 없는 사용,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쉬운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 문제의 천착에서 오는 문학적인 완성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나’와 ‘그녀’의 심리에서 드러나고 있는 삶과 죽음은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현재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흐르고 있다. 박민규가 「아침의 문」에서 보여준 삶과 죽음의 깊이있는 고찰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망로 다가올 지는 독자 개개인의 몫이지만 현재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나’의 심리 상태와 ‘그녀’의 심리 상태는 전혀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은 인간의 삶이라는 하나의 궤적 안에서 돌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 ‘나’의 자살 이유와 ‘그녀’가 태어난 갓난아이를 죽이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욕구와 죽음의 욕구라는 양가치성을 동일가치성으로 환원시켜 인간 실존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희망’이라는 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침의 문」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