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알베르 카뮈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사람을 만날 때 강렬한 첫 인상을 주는 이들이 있다.
소설을 읽을 때 이토록 강렬한 첫 인상을 주는 문장이 또 있을까.
처음 책을 넘기자 등장한 이 문장은 한 겨울 찬물을 한바가지 뒤집어 쓴 느낌을 주었다.
감정이 배제된 이 문장에는 엄마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안타까움도, 그리움도 없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만 존재한다.
인간은 본질에 앞서 실존(實存)하며,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간다.
본질(本質)은 어떤 것이 그 어떤 것이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풀어서 말하면 다른 것과 구분되는 특성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은 효(孝)를 행해야 한다.
유가 사상에서는 이 효가 사람과 동물을 구분 짓는 특성이다. 공자는 “효를 행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효는 사람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방인』의 뫼르소에게는 본질에 앞서 실존이 버티고 서 있다.
효는 차치하더라도 엄마가 죽었는데 이런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효와 같은 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실존)’하는 인간의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철학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문학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삶에서 실천하는 캐릭터는 『이방인』의 뫼르소와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이다.
실존주의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어려우니 작품 속의 문장을 통해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조금씩 느껴보도록 하자.
먼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부터 이야기해보자.
조르바는 이상적인 생각보다는 행동을 중요시한다. 그에게 행동은 실천이고 실천이 곧 삶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는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조르바에게는 삶 자체가 놀라움의 연속이다. 항상 놀라고 감탄을 한다.
조르바는 여자를 보고, 자연을 보고, 물 한 잔을 마시면서도 감탄을 한다. 이것이 조르바이다.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잘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어린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삶은 감탄의 연속이다. 항상 깜짝 놀라죠. “와!” 아이들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때 그 아이의 눈을 보세요.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이런 조르바의 눈에 주인공인 두목은 한심한 사람이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과 계산기를 넣고 다니면서 끙끙 앓는 소리를 하니 조르바는 주인공 두목이 너무 답답하다.
이 시대에 조르바가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너무 계산하고 계획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의 걱정도 모자라서 미래의 걱정까지 현재에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현재에 하는 대부분의 고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한다.
“…… 당신 대가리는 아무리 봐도 아직 여문 것 같지 않소. 올해 몇이시오”
“서른 다섯이오”
“그럼 앞으로도 여물긴 텄군.”
조르바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답답하다.
싯다르타의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세상은 모두 고통이다.)에서 고통의 기본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이다. 싯다르타가 생노병사를 왜 고통으로 보았냐면 이 네 가지는 사람이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서 늙는 것을 안 늙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병과 죽음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이렇듯 생노병사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데 이걸 통제하려고 하니까 고통스러운 것이다. 역시 싯다르타는 성인(聖人)이 맞다.
조르바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을 한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조르바가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르바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삶에 녹이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멋진 사람이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조르바는 이렇게 모든 것에 놀라고 삶을 즐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의 마법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르바에게는 여자가 너무나 신비로운 대상이다. 모든 여자가 신비롭다. 그러니 바람둥이가 될 수밖에 없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는 묻는다. “여자란 무엇인가요? 왜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요? 말해 봐요, 나는 저 여자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거예요.”
이상과 현실이라는 말을 바꾸어 이상을 영혼으로 현실을 육체로 바꾸면 실존주의 철학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해진다.
육신이 만족하자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했다.
2007년 겨울, 나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중환자실에서 1개월, 병실에서 6개월 정도를 입원한 아주 큰 사고였다. 지금도 내 허리에는 철심이 두 개나 박혀있다.
난 이 사고로 인해 삶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렇게 사람이 죽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사고 이후에 나는 두 번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고 이전에 나는 조르바가 답답해하는 두목 같은 삶을 살았다.
항상 무엇인가에 쫓기고 바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했다.
아파트 단지에 핀 꽃도 하늘의 별도 나에게는 그냥 무용한 것이었다.
아파본 사람은 알지만 정말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삶 자체를 앗아간다.
육체가 움직이고 건강해야 영혼도 이상도 미래도 있다.
현재가 없는데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미래란 현재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병실에 누워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의미 있는 것들이 없다. 돈도 명예도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난 사고로 허리에 철심을 박았지만 그 철심으로 인해 머리로 이해하는 것들의 한계를 느끼고 가슴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의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내가 정말 어이없는 일이 발생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웃기지 맙시다’이다.
웃기지 맙시다는 조르바가 두목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고? 웃기지 맙시다!
얼마나 통쾌한 문장인가.
자 이번에는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를 살펴보자.
뫼르소는 조르바 같은 사람이다. 뫼르소도 실존주의를 실천하는 캐릭터이다. 뫼르소에게는 현실이 중요하다. 이상, 도덕, 뭐 이런 종류의 것들과는 뫼르소는 어울리지 않다.
뫼르소는 엄마가 죽은 날 여자랑 섹스를 한다. 뫼르소에게 엄마의 죽음은 잡히지 않는 슬픔의 감정이다. 이 잡히지 않는 슬픔의 감정을 억지로 갖게 하려면 본인을 속여야 하고 거짓 감정을 만들어 내야한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뫼르소가 끝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도 이런 거짓 감정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인간의 마음에 대한 것일 때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건 삶을 좀 간단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뫼르소는 거짓말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느낀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뫼르소에게는 사실과 실재가 중요하다.
이것이 실존이다. 본질에 앞서 있는 실존.
뫼르소는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가는데 감옥 안에서도 그는 실재하는 것만을 그리워한다.
감옥에서 담배, 연인과의 해수욕, 섹스 등을 그리워한다.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유죄를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눈물이 나지 않아서 거짓으로 울지 않는 것인데 세상은 그에게 거짓 눈물을 보이지 않아서 유죄라고 한다.
카뮈의 놀라움은 이런 소설의 얼개가 그가 가지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과 너무나도 완벽하게 버무려진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따사로운 햇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말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어머니가 죽었지만 햇살은 여전히 좋다.
일반인들이 보았을 때에 뫼르소는 패륜아이다. 그러나 그는 그냥 따뜻한 햇살과 그 햇살을 받으며 하는 산책이 좋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뫼르소에게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달라진 것은 없다.
도덕과 이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하면서 분노하겠지만 말이다.
갑자기 장자의 일화가 떠오른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가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했다고 한다.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문상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항아리를 두드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함께 살았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었다.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도 모르겠거니와, 거기에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처음 죽었을 때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었고,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본시 기(氣)조차도 없었던 것이었다.”
“기(氣)가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해 죽어간 것이다.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다.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 편안히 잠들고 있는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천명에 통달하지 못한 짓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양의 뫼르소보다는 동양의 장자가 한수 위인 듯싶다.
뫼르소에게는 애인 마리가 있다. 마리는 뫼르소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다. 그때 뫼르소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뫼르소는 사랑 앞에서도 본질보다 실존이 앞서 있다.
뫼르소는 자신의 생각을 거짓 없이 말한 것이다. 내가 마리를 사랑하나? 아닌 것 같은데.
요즘 이렇게 말을 하는 남자가 있다면, …… 뒤는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뫼르소가 살인을 저지르고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는데 여러 가지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때 뫼르소가 말한다.
사실인즉 나는 그의 이론을 뒤쫓아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첫째로 몹시 더운데다가 그의 사무실에는 큼직한 파리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얼굴에 달라붙었기 때문이고, 또 나는 그의 태도에 좀 겁이 났기 때문이다.
취조를 하는데 뫼르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더위와 파리이다.
취조하는 사람의 이론이 중요하지 않다. 너무 덥고 파리가 달라붙고 그가 무섭다.
실재에 대한 반응만 있다.
뫼르소는 감옥에 가서도 그리워하는 것이 육체적인 것밖에 없는데 조르바와 뫼르소의 닮은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조르바도 머릿속의 생각보다는 만져지는 것들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죠.
뫼르소는 결국 감옥에 갇히고 그는 감옥 철장에 달라붙어 빛을 향해 얼굴을 내밀며 햇살을 그리워한다.
뫼르소가 감옥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전부 만져지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바닷가에 가서 물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 물속에 들어갔을 때의 촉감을 그리워하죠.
뫼르소가 죽기 직전 그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신부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처음으로 엄청 화를 낸다. 그리고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거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신부는 영혼을 구원하겠다지만 뫼르소는 영혼을 구원받을 생각이 없다. 왜냐면 영혼은 만져지지도 실재하지도 않는 것이니까.
신부와 같이 죽은 사람처럼 살지 않겠다는 뫼르소의 울부짖음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지금까지 조르바와 뫼르소가 어떻게 실존을 삶을
살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르바와 뫼르소가 외치는 ‘카르페 디엠’이 여러분의 머리가 아닌 가슴 속에 들어가 싹이 피워나기를 바라본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남긴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자유롭다는 것은 거절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롭다면 당신은 나쁜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