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 외교(外交)

4. 조선(朝鮮) - 이념의 동굴 속에서 일어난 호란

by 이중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건으로 이루어지는가. 개념으로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직장에서 일한다. 직장에서 퇴근을 해서 집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신 후 잠을 잔다. 그렇다면 여기에 개념은 없다. 그냥 사건만이 존재한다.

사건에 개념의 옷을 입히면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밥을 먹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퇴근 후 맥주를 마시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물론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건을 사건 자체로만 보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사건의 순서만을 이해하는 것을 역사라 하지는 않는다. 사실만 있고 의미가 없으면 꽃도 열매도 없는 나무가 된다.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의미는 차이가 난다.

역사적 의미는 역사적 사건의 식민지이지만 항상 독립을 꿈꾼다.

의미가 없는 사건은 가끔씩 악취를 풍기는데 얇은 지식수준이나 이념과 융합하면 더욱 짙은 악취를 풍긴다.

사건은 보이는 거짓과 뒤에 숨어있는 진실과 숨바꼭질을 하며 역사적 의미를 만들어낸다.


此身死了死了(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일백번갱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白骨爲塵土(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혼백유야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與之(영유개리여지)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는 죽는다. 정몽주의 죽음은 사건이다. 역사는 이러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진행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되이셔라,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성삼문도 죽었다. 성삼문의 죽음에도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성삼문은 왜 죽었는가.' 같은 의미를 부여해야 역사가 살아난다.

사건 앞의 글자를 떼서 암기하는 역사로는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


위의 두 시조는 성리학자의 절개를 보여준 시조이다. 정몽주는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였고, 상삼문은 단종의 폐위와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성리학이 무엇이길래. 사람이 죽으면서까지 성리학을 지키는 것일까.

자, 지금부터 이 두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성리학을 공부해보자.

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이 아닌 한국사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성리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기원전 5세기 경 중국 춘추전국 시대 공자에 의해 등장한 유학은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 유학은 오랜 기간 동안 부침을 거듭하다가 12세기 남송 때 주자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는데 이를 성리학이라고 일컫는다. 성리학을 다른 말로 신유학이라고 한다.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한 신유학은 우리나라 조선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성리학자, 즉 신진사대부에 의해 세워진 나라가 조선이다.

성리학을 공부하면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을 조금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주자는 기존의 유학을 리(理)와 기(氣)라는 코드를 사용해 새롭게 해석하였다.

두 가지 코드를 사용해 해석하는 철학은 의외로 여러 가지가 있다.

『주역』은 우주 만물의 질서를 양(陽)과 음(陰)이라는 두 가지의 코드를 사용해 분석하였고, 『도덕경』에서는 우주 만물의 질서를 유(有) 무(無) 상생(相生)의 코드로 설명하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위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했다.

성리학에서 우주 만물은 리(理)와 기(氣)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기(氣)는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에 해당하는 것으로 형이하학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에서 삼라만상은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삼라만상에는 각각의 원리가 내재해 있다. 돌은 돌의 원리가, 호랑이는 호랑이의 속성이 있으며, 남자는 남자의 속성이 있다.

이 생명의 속성, 또는 사물이 가진 원리를 리(理)라고 한다. 리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기가 없으면 리를 결코 알 수 없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리란 기의 속성이라 하였는데 리가 없으면 특성을 가진 사물이 될 수 없다. 이 둘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나의 사물을 형성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자. 성리학은 이러한 사물과 우주 만물의 원리보다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도리’ 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옳다고 정해 놓은 규범이고 도덕이다.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규범과 도덕을 리(理)로 보았다. 그러므로 ‘理’는 자연 법칙과 사회 규범 양쪽을 다 가리킨다. 성리학에서는 우주의 구조와 인간의 구조를 똑같다고 본다.

우주론으로서의 리기론은 그 자체로서의 중요하지만, 심성론과 연결되어 인간의 도덕적 근원, 도덕의 원리를 설명할 때 진정한 의미가 발생한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心)을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리기(理氣)로 말하면 성(性)은 리(理)이며 정(情)은 기(氣)이다.

리(理)는 완전무결한 선(善)이지만 기(氣)는 밝기도 탁하기도 한 것으로 선악이 공존한다.

따라서 성(性)은 오로지 선(善)하고 정(情)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성리학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성리학은 하늘이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을 때 부여한 이치대로 살기를 바란다.

하늘이 ‘부여한 이치’를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이라 한다.

성리학적 명분론은 리에 해당하는 ‘귀한 것’과 기에 해당하는 ‘귀천이 뒤섞여 있는 것’을 구분하여 이름을 만들어 놓은 것을 의미한다.

귀한 리(理)는 군주, 양반, 남자, 장남, 적자, 중국 등이고, 귀천이 뒤섞인 기(氣)는 신하, 상민, 남자, 차남, 서자, 오랑캐 등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해 기가 리를 잘 받들고 모시면 우주 만물이 조화를 이루고 삼라만상이 정상적으로 운행된다.

너무 복잡하니 마지막 부분만 기억하도록 하자.

신하가 임금을 잘 모시고, 상민은 양반을 잘 모시며, 여자는 남자를 받드는 것, 이것이 성리학이 말하는 이상 세계이다.




정몽주와 성삼문이 지은 시조가 성리학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시조라는 이유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氣)에 해당하는 신하가 리(理)에 해당하는 군주를 잘 모시고 받드는 것. 이를 통해 이상 사회를 구현하려고 하는 것이 성리학적 세계관이다.

이러한 군신 간의 명분론이 외교로 확대되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형성되고 실제로 조선은 명나라와 군신의 예를 체결한 사대관계였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중국은 중화(中華)로 불리며 세계의 주도권을 획득하게 된다.

엉뚱한 소리이지만 나는 중화요리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중화요리는 말 그대로 세계의 중심인 요리라는 의미이다. 이 얼마나 사대성이 내포된 단어인가. 그냥 중국요리라고 해야 한다.


성리학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으면 이제 조선의 외교로 들어가 보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조선의 외교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한 배경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양안(토제 대장)과 호적의 소실로 세금을 걷을 수 없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1608년에 사망하였다.

선조를 이어서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에 매진하였다.

조선의 전후 복구 상황 속에서 북쪽의 여진족이 통합을 이루어 누르하치에 의해 후금이 건국(1616)된다.

후금의 건국은 다시 한 번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뒤흔든다.

명(明)은 후금의 성장에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금을 견제하거나 제거해야만 했다.

명과 후금 사이에 사르후 전투(1619)가 발발한다.

명은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조선에게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전후 복구 사업 중이었고, 다른 나라의 전쟁에 파병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명과 후금의 전쟁에 조선이 끼어드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럴 때 파병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은 대부분 이념이 맡는다. 당시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이 부분을 맡았다.

명과 조선은 군신관계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가 필요하다. 그래야 조선은 파병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조선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의미를 부여한 후 무리한 파병을 결정한다.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나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조선에게는 없었다.

광해군 재위 10년(1619)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김응서를 부원수로 하는 1만 3천에 이르는 군사를 사르후 전투에 파병하였다. 그런데 당시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전력을 다해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으로 붙으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밀지는 전투 상황을 보면서 명나라가 이기는듯하면 명나라에 붙고 후금이 이기는듯하면 후금에 붙어 조선군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내용이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눈치를 보면서 실리 외교를 펼친 셈이다. 파견된 강홍립의 군대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군과 합류하였다.

조ㆍ명 연합군은 1619년 3월 누르하치의 본거지가 있는 허투알라(赫圖阿砬)로 진격하던 중 사르후(薩爾滸)에서 후금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 4개 군단 중 총병관(總兵官) 두송(杜松)이 이끌던 서로군은 괴멸되었으며, 이후 치러진 몇 차례 전투에서도 조ㆍ명 연합군은 거듭 패배함으로써 전세는 후금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아부달리(阿布達裡) 전투에서 이미 전사한 제독 유정의 후방부대와 함께 부차(富察, 현재 중국 환런 민족 자치현)에 머물고 있던 조선군은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를 선봉으로 하는 후금의 부대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부차 전투 패배 이후 강홍립은 남은 병력 오천을 이끌고 후금에게 투항을 하였다. 강홍립은 홍타이지에게 “조선군의 출병은 명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을 이행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강홍립과 조선군을 포로로 잡았다. 홍타이지는 이듬해 조선군 포로들을 대부분 석방하였으나 강홍립은 석방하지 않고 계속 억류하였다.



1619년 3월 4일 제독(提督) 유정 등은 오랑캐 진중에서 패사(敗死)하고, 강홍립 등은 잡혔으며, 좌영장(左營將) 선천 군수(宣川郡守) 김응하(金應河)는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앞서 대군이 탄현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양호(楊鎬)는 다시 분부하여 그달 1일 군대를 움직일 기일로 정했다. 그래서 지난달 21일 행군하여 세 길로 나누어 건주(建州)에 도착하려고 하였다. 유정의 군대는 동로(東路)로, 두송(杜松)의 군대는 서로(西路)로 진병했으나 모두 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 『속잡록(續雜錄)』 권1, 기미년 만력(萬曆) 47년, 광해군 12년(1619년)


광해군 대의 집권 세력은 북인이었는데 광해군과 북인의 중립외교에 대해 서인은 맹공을 퍼부었다. 서인의 입장에서는 중립외교가 명과 조선의 기존 신뢰 관계를 깨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외교였다. 북인과 서인은 모두 성리학자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정치 공격은 누가 더 성리학자이냐의 싸움이 되어버린다.

서인의 이러한 공격은 결국 인조반정(1623)으로 이어졌고,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인조반정 당일, 인목대비가 반포한 광해군 폐위 교서에는 명과 후금을 두고 이루어진 광해군의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중국 사신이 본국에 왔을 때 그를 구속하여 옥에 가두듯이 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 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득죄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 『인조실록』 1년 3월 14일


인조반정으로 북인 정권은 몰락하였다.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자, 잠깐 쉬어가는 시간을 갖자.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읽는 것보다는 잠깐 호흡을 길게 하고 생각을 해보자.


서인의 외교 정책은 어떻게 전개될까.


……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외교는 자연스럽게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던 명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인조와 서인은 이른바 친명배금(親明排金)으로 명과 친하고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외교 정책을 채택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당시의 명은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게 대패를 한 후 국세가 기울어졌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조선은 세상의 변화보다는 서인이 만든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외교적 틀 속에서 외교를 하였다.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였고 후금은 조선에 쳐들어온다. 정묘호란이 발발(1627)하였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은 후금을 막지 못하고 바로 항복을 하였다. 시쳇말로 게임이 안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후금과 정묘맹약을 체결하면서 후금과 명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서인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실제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인의 입장에서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그들 스스로 소멸시켜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서인은 중립외교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정치는 명분으로 한다. 정치에서 명분이 사라지면 물러나야 한다.


인조가 즉위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외교는 자연스럽게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던 명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인조와 서인은 이른바 친명배금(親明排金)으로 명과 친하고 후금을 배척하겠다는 외교 정책을 채택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당시의 명은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게 대패를 한 후 국세가 기울어졌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조선은 세상의 변화보다는 서인이 만든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외교적 틀 속에서 외교를 하였다.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였고 후금은 조선에 쳐들어온다. 정묘호란이 발발(1627)하였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은 후금을 막지 못하고 바로 항복을 하였다. 시쳇말로 게임이 안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후금과 정묘맹약을 체결하면서 후금과 명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서인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실제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인의 입장에서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그들 스스로 소멸시켜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서인은 중립외교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정치는 명분으로 한다. 정치에서 명분이 사라지면 물러나야 한다.


서인의 외교는 딜레마에 빠진다. 중립외교를 하지 않으면 후금에게 얻어맞는 상황이고, 중립외교를 하면 서인들은 정권을 남인에게 내어주고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인이 이렇게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후금은 심양을 수도로 청을 건국한다(1636).

당시 대륙의 정세는 후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명이 ‘지는 해’라면 후금은 ‘뜨는 해’였다. 유리해진 정세 속에서 후금의 명나라 공격은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후금의 입장에서는 명나라를 공격해서 대륙을 장악하기 전에 조선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했다. 후금은 조선을 자기편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없애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안전하게 명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다.

청은 조선의 딜레마를 눈치 채고 명과의 결전을 치르기 전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하였고, 군신관계의 요구를 받게 된 서인은 딜레마적 상황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최명길을 중심으로 주화론(主和論)이 일부 대두되었지만 대부분의 서인(김상헌,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주화론은 청의 군신관계 요구를 수용하면서 당시의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보자는 주장이었고, 주전론은 청과 전쟁을 치르더라도 군신관계 요구는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청과의 군신관계 체결은 명과의 군신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앞의 시조에서 언급했듯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단어를 생각하면 된다.

서인은 인조반정 정당성과 명분의 덫에 걸려 주전론 이외의 다른 외교적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화론>

‘주화(화친을 주장한다)’ 두 글자가 신의 일평생에 허물이 될 줄 잘 압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오늘날 화친하려는 일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줄임)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정묘년(1627)에 화친을 맺은 것은 의리에 해로움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적이 외람되이 천자라고 호칭을 하였다. 다시 그들과 사신을 통할 수 없다.’ 이 말이 그럴 듯 합니다만 실상은 깊이 생각한 것은 못됩니다. 저 오랑캐가 정묘년의 형제 동맹을 어기고 우리에게 비례(非禮)를 강요한다면 의리상 결코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렇지 아니하고 계속 이웃나라의 예를 써옵니다. 그들이 천자라고 외람 된 호칭을 하고 안하고는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어찌 예의문제로 오랑캐에게 문책할 수 있겠습니까. (줄임)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 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사서 끝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이보다 클 수 있겠습니까. (줄임)

신이 이렇게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시비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해로만 아뢰어 전하를 잘못 인도함이 아닙니다. 현 정세를 참작하고 의리를 재량하며, 선유들의 정론에 고증도 해보고 조종께서 행하신 사적을 참고하여, 이렇게 하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고 이렇게 하면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하면 도리어 해로울 것이고 이렇게 하면 사리에 합당할 것임을 생각하여 그것이 꼭 옳다는 자신이 서서 아뢴 것입니다. 늘 생각해 보아도 국력은 현재 고갈되었고 오랑캐는 병력이 강성합니다. 정묘년 때 맹약을 아직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춰야 합니다. 그 사이 인정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고 군량을 저축해야 합니다. 또 방어를 더욱 튼튼하게 하고 군사를 집합시켜 일사불란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적의 허점을 노리는 것이 우리로서는 최상의 계책일 것입니다.

- 최명길, 『섬천집』


<주전론>

(인조 14년 11월 무신, 부교리 윤집이 상소를 올렸다.)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입니다.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입니다. 우리나라가 살아서 숨 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오랑캐의 형세가 크게 확장하여 경사(京師)를 핍박하고 황릉을 더럽혔습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전하께서는 그 때에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병력이 미약하여 정벌에 나가지 못하였지만, 차마 이런 시기에 어찌 다시 화의를 제창할 수야 있겠습니까.

- 『인조실록』



서인 정권은 결국 주전론을 택하였고 청은 곧바로 조선을 공격한다. 병자호란(1636)이 터진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인조는 남한산성까지 피신을 해서 싸움을 하였지만 결국 청에게 항복을 하였다.

남한산성 항전을 시작한 지 40여 일정도가 지나자 성 내의 양식이 떨어지면서 성 안의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남한산성에 있던 조정의 신하들은 다시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져 논쟁을 하였고 성 내의 백성들은 지쳐 죽어갔다.

조선도 전쟁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조선은 청을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주화파의 주장이 현실적이었음을 깨닫고 조정은 청에 강화를 요청하였다.

인조는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세 번 인사를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를 행한다. 결국은 청과 군신관계를 체결하였다.

이런 말 자체가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결국 ‘맞아보니 아프더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청나라 홍타이지는 인조의 아들 둘까지 인질로 끌고 가면서 조선의 저항(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해 호되게 나무랐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했을까.

명은 결국 1644년 청에 의해 멸망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중국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후에 효종)은 세계관이 달랐다.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 청의 실체를 인정하고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인정하였다.

봉림대군은 명나라의 멸망을 가슴 아파했고, 기회가 되면 조선이 명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조정은 여전히 서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이러한 현실 인식은 서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청을 치자는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다.

조선이 청을 공격해 명의 원수를 갚고 치욕도 씻어버리자. 이른바 복수설치(復讎雪恥)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복수설치를 이끈 이가 서인의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숭명대의론(崇明大義論), 숭명보은론(崇明報恩論) 등의 이론을 만들어서 명은 없지만 끝까지 명을 섬기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참으로 눈물겨운 의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생각이, 도대체 누굴 위해 죽은 명을 섬겨야 하는 것일까.

조선, 아니면 조선의 백성, 아니다. 서인은 오로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명을 끝까지 섬겨야 했다. 조선이 망하든, 조선의 백성이 죽든 서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숙종 대에는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창덕궁에는 명나라 황제 신종(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준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대보단(제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왕은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요즘의 시대로 바꾸면 다른 나라의 국기를 흔들며 엉엉 우는 것이다.




이렇듯 이념의 외교는 무섭다. 실제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사건의 실체는 없고 사건 속에서 자신이 부여한 의미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확증편향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단 한 번도 정지하지 않는다.

시간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흘러가고 시간이 흘러가면 세계는 변한다.

과거의 부자가 현재의 부자가 아니고 현재의 부자가 미래의 부자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왜냐면 경제적 상황은 수시로 변하고 거기에 얼마큼 적응을 하고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부(富)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하기 때문에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념의 틀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 속에서 시행하는 외교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본인을 가두고 있는 틀을 부수고 세계가 어떠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지를 예측하려는 예민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죽은 것은 뻣뻣하다. 산 것은 부드럽다. 부드러움은 뻣뻣함을 항상 이긴다.

심하게 바람이 불면 산 나무는 휜다. 죽은 나무는 부러져버린다.


세계는 변하고 상황은 달라졌는데 예전에 배웠던 지식을 가지고 현대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을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꼰대라고도 한다.


묻고 싶다. 꼰대여!

지금 이 세계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과연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는 있는가.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외교를 해야 하는가.


사건만을 보지 말고 그 뒤에 숨어서 숨바꼭질하는 진실을 알아보고 이에 따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주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제발 “나 때는 말이야.” 이것 좀 하지 말자.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