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高麗) - 거란 전쟁
한국사 전체를 일별(一瞥)해도 고려처럼 많은 전쟁을 했던 나라는 없다.
특히 북방 유목민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고려의 외교력도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외교사는 북방 유목민족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는 중국과 북방 민족의 역사부터 시작해보겠다.
당(唐) 말 5대 10국 시대(907~960)에는 북방 유목민족들이 다시 강성하였다.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나라는 907년에 야율아보기가 세운 거란(946년 요로 바꿈)이었다.
거란(요)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다.
960년 중국 민족(한족) 출신인 조광윤이 세운 송이 전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연운 16주를 되찾지는 못하였다.
중국 문명이 탄생한 이래, 중국 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대립은 계속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중국 민족의 우위는 확고하였다.
당말 5대 10국의 변혁기에 북방 유목민족은 뚜렷하게 각성하여 독자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을 정복하려고 하였다.
중국 송(宋)대에 들어서면서 송은 동아시아에서 정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거란족의 요(遼), 여진족의 금(金), 몽골족의 원(元)으로 이어지는 유목민 정복왕조의 행렬은 중국의 일부를, 혹은 절반을, 끝내는 중국 전역을 송두리째 지배하였다.
고려의 시간과 연결해보면 고려 초기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고려 중기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무신 집권기에는 몽골족과 전쟁이 이어졌다. 몽골은 이후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지배하였다.
이번에는 외교 부분이 부각되는 고려의 거란 전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북진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이 부분이 고려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요)의 꿈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다.
거란(요)은 송을 치기 위해서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고려 북진 정책은 요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거란이 송을 공격할 경우 후방에 있는 고려가 거란의 영토를 공격해서 차지하면 거란이 만일 전쟁에서 패할 경우 돌아갈 곳도 없어지기 때문에 거란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확실하게 동맹국으로 만들어야 중국 대륙 침략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려와 거란(요)은 엇갈리는 이해관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결국 전쟁이 터졌다.
전쟁 결과 고려는 송과 외교를 끊고 요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요는 고려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였고, 고려를 등 뒤에 두고 송을 온 힘으로 쳐들어가기는 힘들었다.
고려의 강력한 저항으로 불안한 고려-요-송 사이에 평화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고려는 거란(요)과 외교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과 경제, 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북방 민족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외교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큐브를 맞추는 일이다.
큐브를 하다보면 다 맞추었는데 한 블록의 색이 맞지 않아서 시간이 지연되고 완성이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외교가 이렇다.
A국가와 B국가의 이해관계 속에서 모든 블록이 맞춰져도 갑자기 C국가가 끼어들면 A국가와 B국가가 맞춘 모든 큐브 블록이 흐트러진다.
고려는 중국을 위협하는 북방 유목민족과 인접해 있어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상황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외교 전략을 구축해야만 했다.
고려는 우호국, 적대국이라고 규정짓는 외교를 할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였다.
그럼 무언가를 결정짓고 하는 외교가 왜 위험한지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무언가를 결정하게 되면 시세 관찰 능력은 떨어지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도 일단 무언가를 결정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오직 결정된 그것만을 추구하게 된다.
외교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 중 하나가 이념(Ideology)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념의 필터를 머리에 끼고 진행하는 외교이다.
거칠게 표현해보면 ‘나는 공산주의가 싫다. 그러니 공산주의 국가와는 상종하지 않겠다.’ 식의 이념 필터는 수시로 변하는 국제 정세를 살피는데 효용성을 떨어뜨리고 확증편향을 일으켜 국익에 큰 해를 입힌다.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국익을 살피는 일이다. 이를 실리외교라 한다.
어디 국가 간의 외교만 그러한가. 개인의 인간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는 없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다보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에게 경제적인 큰 이익을 주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경제적인 큰 손해를 주기도 한다.
이념의 필터를 머릿속에서 제거해야 상황 변화를 면밀하게 주시하고 분석할 수 있다.
밀도 있고 높은 차원의 외교는 ‘필터를 꼈느냐, 필터를 안 꼈느냐’가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가 ‘이념의 늪’에 빠져 이념이 교조화(敎條化) 될 때 국가의 외교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다시 고려의 시간으로 돌아와서 고려의 전쟁사를 살펴보자.
외교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거란과의 1차 전쟁 때 일어난 서희의 외교 담판을 중심으로 풀어 나아가 보겠다.
고려 초기 1차 거란 침입(993) 당시 서희의 외교가 이념의 필터를 제거한 외교의 사례이다.
고려는 원칙적으로 송나라와 사대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사대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념을 만들고 실리외교를 방해하게 된다. 그런데 서희는 거란과 외교를 하면서 송과의 사대관계를 깨버리는 외교를 하였다.
- 실제로 깬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흥하는 거란에게 사대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강동 6주라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거란이 고려와의 친선을 위해 내어 준 강동 6주는 이후에 아이러니하게도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 방어선 역할을 하였다.
1차 거란 침입 당시 거란의 장군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다.
거란이 고려를 친 이유는 ‘왜 가까이 있는 자기 나라와는 교역을 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송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냐’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왜 나랑 안 친하고 쟤랑 친하냐!’ 뭐 이런 거다.
거란 1차 침입의 전황(戰況)을 정리하면 993년 10월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고려는 성종이 친히 전선을 지휘하였으나 전황은 어려웠다.
전황이 어려워지면 보통은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나뉜다.
주전론(主戰論)은 전쟁을 지속하자는 주장이고, 주화론(主和論)은 화친을 주장하는 것으로, 외교적으로 상황을 풀어보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고려는 항복론과 할지론(割地論)이 논의되었다. ‘항복하자’와 ‘영토를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논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서희가 성종에게 외교적 해법을 제안하였으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 공략에 실패한 후 거란의 상황이 어려워진 틈을 이용해 서희가 소손녕을 만났다.
서희는 소손녕이 고려를 쳐들어 온 이유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소손녕이 전쟁을 할 이유와 명분을 모두 없애버렸다.
서희와 소손녕의 외교 담판은 사료를 읽어 본 후 이어가보도록 하자.
성종12년 (10월)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왔다. (소손녕이)서희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는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이 때문에 대국(거란)이 와서 치는 것이다.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사신을 보낸다면(조빙을 한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서희는 말하였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 어찌 우리를 침식했다고 하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은 우리나라 땅이지만 여진이 점거하였다. 이들이 교활하고 변덕이 많아 길을 막아서 (거란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조빙을 하지 못함은 여진 탓이다.” (줄임)
서희가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겨우 압록강 안만 수복하였으니, 강 밖까지 수복함을 기다려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오랫동안 조빙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라고 하여 마침내 박양유를 사신으로 보냈다. 『고려사절요』
서희는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여진을 몰아낸 뒤 거란에게 사대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동 6주가 필요하다.’
이 얼마나 간략하고 명쾌한가.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에 동의하고 강동 6주(위의 지도에서 흥화진, 귀주, 용주, 철주, 통주, 곽주)를 내어주었다.
당시 거란과 여진은 사이가 정말 좋지 않았다. 이를 서희는 잘 이용하였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가 사이가 가장 안 좋다.
이후 강동 6주는 거란을 막는 중요 방어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거란은 완전히 고려의 기만술책에 당한 것이다.
고려는 서희의 외교 담판에서 거란과 약속한 모든 사항을 이후에 추진하지 않았다.
고려는 거란을 상대로 시종일관 화전양면책을 구사하였다. 외교로 풀려고 노력하면서도 쳐들어오면 강하게 맞섰다.
고려는 시간을 벌기 위해 거란을 속였다.
거란은 화가 났고 마침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1009)이 발생하였다.
강조의 정변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불륜 관계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하자 이에 분노한 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 목종을 폐위하고 김치양, 천추태후를 죽인 후 대량원군(현종)을 왕위에 올린 사건이다.
거란은 고려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고 현종의 왕위 승계를 알리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아 다시 쳐들어왔다.
거란과의 2차 침입(1010)은 거란(요)의 성종(야율융서)이 친정을 하면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다.
거란이 개경을 점령한 사이 고려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떠났다.
거란군이 개경에서 현종을 쫓아 가야하는지 중단해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을 때 양규가 흥화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거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거란은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때 고려는 거란에게 화친을 요구하였다. 현종이 직접 거란에게 가서 인사를 드리겠다는 친조도 약속하였다.
거란(요)의 성종(야율융서)은 당시의 난처한 상황을 끝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고려와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의 강화 내용을 또 지키지 않았다.
거란은 고려가 계속 기만술을 펼치는 것에 분노하여 3차 침입을 강행한다. 그런데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시간을 벌었던 고려의 군사력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거란은 2차 침입 이후 고려가 거란이 요구한 현종의 친조(親朝)를 거부하자 소배압을 사령관으로 앞장 세워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거란이 제3차 침입에서 가장 고전한 곳도 역시 강동 6주의 하나인 흥화진 성에서 일어난 삼교천 싸움이었다.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소손녕이 떼어준 강동 6주는 지속적으로 거란의 발목을 잡는 고려의 요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싸움의 패배로 용기를 잃고 남진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 평안남도 자산) 남쪽에서 뒤쫓아 온 강민첨의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서경에서 대동강을 건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등 불운이 겹쳐 거란군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도에서 회군해 청천강을 건너려 하였다.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다. 다시 구주(龜州, 귀주)를 지날 때를 기다렸다가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에 몰려 북으로 달아나는 거란군을 뒤쫓아 갔다. 그리하여 강감찬의 추격을 받은 거란군은 겨우 10만 중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거란(요)은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뒤에도 몇 차례 공격을 하거나 압력을 가하였지만 이 패전으로 무력으로 고려를 정벌하려는 정책을 포기하였다. 따라서 귀주대첩으로 인해 고려는 수십 년간 시달렸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동아시아 삼국 사이에 불안하지만 평화 관계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귀주대첩이 역사적으로 커다란 평가를 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귀주대첩 뒤 고려는 개경에 나성(외성)을 쌓고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위의 지도에서 국경 지대의 성 표시)을 쌓아 요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고려 역사에서 거란 전쟁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한 것이 북방 민족 거란과의 전쟁을 발발시켰다는 점.
둘째, 전쟁 과정에서 고려는 화전양면책으로 거란을 곤경에 빠뜨려 결국 거란의 중국 대륙 침입을 막았다는 점.
셋째, 거란 전쟁 이후 동아시아가 균형 상태를 이루었다는 점.
자 그럼 현재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자.
지금 대한민국은 고려의 상황과 많이 다른가?
지금 대한민국의 북쪽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는가?
고려의 거란 전쟁은 거란과의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외교 큐브를 맞추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가?
깊이 가라앉은 과거를 길어 올릴 수만 있다면,
현재 우리가 맞춰야 할 큐브 블록의 마지막 색깔을 과거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가 참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후에도 고려는 끊임없이 북방 유목민족(여진,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
이는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려가 동아시아 패권의 캐스팅보트(Casting Vote)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은 전 세계 중견국(中堅國, Middle power)으로서 세계 패권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을 외교적으로 잘 구현하면 보다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