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 투쟁(鬪爭)

4. 노동 운동 - 일을 이렇게 시키면 어떡합니까.

by 이중석


우리나라에서 임금 노동의 역사가 시작된 시기는 17세기이다.

조선 후기 이앙법의 확산에 따른 노동력 감소가 농민의 경작 면적을 넓히면서 광작이 가능해졌다. 그러다보니 농지를 얻지 못하는 소작농이 증가하게 되고 소작지를 얻지 못한 농민들은 하루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렸다.

도시로 온 이들은 자신의 몸뚱이를 움직여 임금을 받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른바 임노동자가 우리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강화도 조약(1876)이 체결된 이후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되면서 개항장을 중심으로 부두 노동자가 등장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은 이러한 부두 노동자들이 결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자본주의 유통 경제가 활성화 되면서 부두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노동자는 대부분 농사를 짓다가 도시로 이주한 빈민 출신의 비숙련 노동자였다.

일본인 관리자들은 이러한 비숙련 한국인 노동자를 혹사시켰다.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하였고,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대부분이 12시간 이상 노동을 하였다.

열악한 작업 조건과 안전 부주의로 인해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한국 노동자는 노동시간이나 노동의 강도 문제를 떠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툭하면 욕과 구타가 난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월에 원산의 라이징 선 제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심하게 구타하면서 원산 총파업의 발단이 되었다.

원산 총파업은 표면적으로는 한국인 노동자의 구타와 노동조건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일제의 반노동 정책에 따라 모든 사회의 제반 계층이 둘로 나뉘어 싸운 사건이다.

지금도 쿠팡 배달 노동자의 죽음, SPC 공장 노동자의 죽음은 항상 노동의 가치와 반노동 정책의 싸움으로 전개된다.


지금도 노동자의 파업을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행위로 보는 이들은 존재한다.

물론 반노동 정책을 펼치는 그들의 경제적 논리와 계산이 모두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면 맞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얼마 전 쿠팡 배달 기사의 죽음의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카톡의 문자 내용처럼 “개처럼 뛰는 중입니다.”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사람은, 개처럼 뛸 수 없다.

아무리 개가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 세상이지만 사람이 개처럼 뛰어다닐 수는 없다.

2024년 5월 28일 노동 과로사로 죽은 택배 기사님은 정슬기님이다.

고(故) 정슬기님은 주 평균 노동시간이 63시간, 야간 할증 시 77시간의 노동을 소화하다가 과로사로 사망하였다.

사람의 죽음을 마주할 때는 한의사가 진맥을 하듯, 한 인물의 삶에 대한 진맥이 필요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그의 하루로 들어가 보아야 그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쿠팡은 업무량이나 노동시간에 대한 부분은 하청 배송업체 간 협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쿠팡의 잘못은 없다며 소송을 진행 중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보다 현실 속의 악당이 훨씬 나쁘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악당은 실제의 악당보다 착하게 그려진다.

그 이유는 악당을 아무리 상상해도 그 악당의 심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악당만 악당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데 드라마의 극본이나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는 실제 악당의 심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고수만 고수를 알아볼 수 있듯이 악당만 악당을 알아볼 수 있다.

쿠팡의 입장은 쿠팡의 입장에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팡팡거리며 이해를 할 것이다.




대학 시절 방학 때 막노동 현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대학 선배와 함께 새벽 4시에 일어나 4시 30분 까지 인력사무소로 가면 출석체크를 한 후 인력사무소 앞에서 대기를 한다.

대기를 하고 있으면 노동 현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데리고 간다. 일이 없어 공치는 날도 있다.

새벽 6시부터 보통 오후 5시까지 일을 한다.

시멘트 가루를 물에 부어 삽으로 젓고, 벽돌을 위로 나른 뒤 일당 5만원을 받는다. 5만원 중 5천원은 인력사무소에 소개비로 준다.

내 손에는 하루 일당 4만 5천원이 쥐어진다.

하루는 일이 끝나고 배고픔도 달래고 술도 한잔 할 겸 동네 선술집에서 선배와 막걸리에 파전을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다.

그 선배는 나만큼이나 가난했다. 그 선배도 나와 같이 한 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한 학기 등록을 하고 한 학기 휴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선배였다.

그 선배가 그날 술이 취해 했던 이야기는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아마도 당시 나를 찌르는 말이었기 때문에 이리 오랜 시간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석아! 아! 정말 누추하다.” 당시 누추하다는 말의 생경함과 생뚱맞음이 내 의식 속에서 오랜 시간 그 말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 선배는 두 손바닥으로 먼지가 쌓인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아! 정말 누추하다.”




조금 이론적인 공부를 해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무엇인가.

자본가와 노동자가 사회의 생산관계를 맺고 있는 구조이다.

자본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몸뚱이를 누군가에게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한다.

몸뚱이를 판 노동자는 몸뚱이를 산 사람(자본가)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산다.

자본가는 사업할 돈이 있는 사람이다.

돈을 가지고 땅도 사고, 공장도 짓고, 기계도 들여오고, 사람의 몸뚱이도 산다. 그리고 기계를 돌리고 노동자에게 일을 시킨다. 노동자가 만들어 낸 상품을 자본가는 시장에 내다 팔아서 이윤을 남겨 돈을 불린다.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정확한 대가인지 모를 돈을 정기적으로 자본가에게 받아서 생활한다.

자, 여기서 생각을 하나 해보자.

경제학의 가장 기본은 무엇인가.

경제학은 ‘인간의 선택은 이기적이다.’라는 전제 조건 속에서 전개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 자신의 이윤이 줄어든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일하는 가치만큼의 돈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론이 만들어진다.

노동자가 자신이 일한 만큼의 임금을 받지 못하면 ‘그만 두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순진한 사람이다.

모든 자본가가 이렇게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 한다면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취직을 못하든지 아니면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하는 순간 노동자는 굶어 죽는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산관계 구조에서 약자인 노동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본가에게 저항을 시작한다.

‘누추한 저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일제강점기로 가보자.

원산 총파업이 장기화 되자 일제는 원산 총파업이 공산주의자와 연계되었다는 거짓 조작을 하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를 그대로 보도하였고, 원산 총파업을 이끌던 지도부는 위축되었다.

당시는 치안유지법이 적용되어 공산주의자 탄압이 심했던 시기였다.


원산 총파업 이후 1931년 평양 고무공장 파업에서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강주룡을 ‘체공녀’라고 하는데 ‘공중에 올라간 여자’라는 의미로 이후에 노동운동에서 체공남, 체공녀는 계속 등장한다. 강주룡은 단식 농성으로 얻은 병으로 사망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불편해서 못하는 이야기.

좁으면서 어둡고 긴 터널 같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노동자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표층, 그 아래에서 항상 흘러가고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왜냐면 먹고사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희생은 분명히 있었다.

물론 자본가들의 노력과 의지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노력과 노동자의 노력을 저울에 달았을 때 어떤 무게일지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테니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경제 이론으로만 보면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의 빼앗긴 노동시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자본가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빼앗긴 노동시간에서 만들어진다.

쿠팡의 기업 이윤은 한여름 에어컨도 없는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상품을 배송하는 택배기사의 빼앗긴 노동시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쿠팡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업들의 이윤 구조가 거의 이렇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들을 공론화 하지 못할까. - 과거에 비하면 그래도 요즘은 노동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었다.

혹시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공산주의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그런 것일까.

아니다. 이는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불편함과 거북함의 감정을 불러온다.

왜냐면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 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불편함과 거북함의 심리는 타인에 의해 발생하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와 맞닿아 있다.

그 심리의 밑바닥에는 항상 윤리적인 감정보다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결국 노동자의 죽음을 보는 시선은 타인을 윤리적 감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면밀하게 보면 나를 챙기는 이기심의 발로이다. “나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라는 감정이 더 솔직한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는 이러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지독스럽게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자, 지금부터는 현대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전태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전태일, 보통 하고 싶은 이야기는 머릿속에 이미지 덩어리로 존재한다. 나에게도 전태일은 이미지 덩어리로 존재한다.

이를 풀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은 이미지에 육체를 입히거나 숨을 불어넣는 과정이라서 애를 써야 한다.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들고 휘발유를 몸에 뿌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스스로를 태워버린 이미지를 어떻게 글로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한동안 허방에 빠져 있었다.


전태일은 대구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서울로 올라와 처음에는 서울역 근처 염천교에서 노숙을 했다.

전태일은 1964년 청계천 의류공장의 시다(견습공)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가 14시간 노동을 하고 번 돈은 일당 50원이었다. 당시 하루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생활할 수 없어서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했다.

뼈가 휘고 살이 뜯기는 고된 노동의 하루하루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이 생겨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을 했다.

전태일은 삼일사에서 함께 일하던 어린 여공들의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 위생환경 때문에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시커먼 먼지가 떠다니는 공장 안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일하던 어린 여공이 폐렴으로 강제 해고되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기록에 보면 당시 공장에서 식사를 할 때 밥그릇과 반찬그릇을 신문지로 덮어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으로 뜰 때만 신문지를 들면서 먹었다고 한다. 안 그러면 밥과 반찬에 먼지가 내려앉아 식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장은 공장 창고 물류비를 줄이기 위해 공장에 다락을 설치해 다락에 의류 원단을 보관했다. 공장은 의류창고이면서 일하는 곳이었고 식당이었다.

폐렴으로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전태일도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1966년 한미사 재단보조로 다시 취직을 하게 되었고, 그해 재단사가 사장과 갈등으로 해고되면서 재단사가 되었다.

그는 한미사 재단사로 일하면서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 하숙방의 곤로를 팔아 <중학1>권 교재를 150원에 샀다. 책을 사고 남은 돈이 15원이었는데 10원으로 노트를 사고 5원은 남겨두고 3일간 금식을 하였다.

전태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굶는다고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라고 생각하자. 먹을 게 없어서 굶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하루에 두 시간씩이라도 공부를 하면 대학입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열여덟 살, 시쳇말로 철도 씹어 먹을 나이라던 그 나이에 전태일은 돈이 없어 굶었다.

1968년 그의 나이 스무 살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해 혼자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 분노는 평화시장 노동조합인 ‘바보회’ 창설로 이어진다.

‘바보회’는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기 보다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노동환경에 스스로 굴복하여 바보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전태일은 노동운동에 스며들었다. 그는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가 근로기준법에 어떻게 위반되는지를 공부하였다.

1970년 9월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의 관심으로 신문에 실렸다. 신문에 실리자 전태일은 본격적으로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다. 그러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와 협의에 의욕이 없는 사장들이 전태일을 사회주의자로 몰고 가면서 협의가 중단되었다.


전태일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낸다.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중간에 사라진다.


다음은 전태일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의 내용이다. 흘려 읽지 않기를 바란다.

천천히 읽어야 전태일에 대한 윤리적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희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희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 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중략)…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차 일요일 이틀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선 아무리 강철 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전태일의 요구를 간단히 정리하면 1일 14시간의 노동시간을 단축해달라는 것과 1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달라는 것이다.

“아! 정말 누추하다.”라는 선배의 말이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유가 이것이었을까.




전태일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위를 계획하는데 그 시위마저도 경찰들과 사장이 동원한 깡패들에게 짓밟혔다. 그는 골목 모퉁이에서 조용히 몸에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켠 뒤, 몸에 불을 붙이고 한손에는 근로기준법 책을 든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뜨거운 불을 몸에 붙인 채 평화시장 앞길로 달려 나왔다.


불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태웠다. 불타는 몸으로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전태일은 3분가량 방치되었으며, 당시 시위현장에 있던 노동자들과 동료들도 너무 놀라 전태일의 몸에 붙은 불을 끌 엄두도 내지 못해 전태일의 몸은 불에 계속 타고 있는 상태에서 방치되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라고 전한다. 전태일은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노동에 타들어간 그의 육체는 결국 불에 타들어가 사라졌다.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중략)…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