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의열단 - 그 청춘들의 불꽃같은 삶 속으로
박재혁, 1920년 9월 부산 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는 폭탄 투척 과정에서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채로 1921년 3월에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중상을 당한 상황 속에서 혹독한 고문이 이어지자 스스로 죽으려고 단식을 하다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최수봉, 1920년 9월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일본경찰이 추격을 해오자 경찰서 근처에 살던 지인의 집에 들어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7월에 사형은 바로 집행되었고,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김익상, 1921년 9월 전기 수리공으로 위장하여 조선총독부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이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한 상황을 틈타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도망갔다.
1922년 중국에서 일본의 전 육군 대장인 다나카 기이치 암살 임무를 수행하였다.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맡았고, 2차 저격을 김익상이 맡았다.
거사는 오성륜의 총알이 빗나가고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하였다.
김익상은 총에 맞고 체포되었다.
이후 가고시마형무소에서 14년 간 옥고를 치른 뒤 출소하였다. 독립지사 이강훈의 회고에 의하면 용산경찰서 형사들의 지독한 연행과 미행에 지쳐 1941년 김익상은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 사실상 그의 생은 황푸탄 의거가 일어난 1922년, 스물일곱 살에 끝났다.
김상옥, 3∙1 운동 당시 우리나라 여학생을 때리고 있던 무장한 일본 경관을 맨손으로 때려눕히고 군도(軍刀)를 탈취할 정도로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서편 창문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엄청난 폭발음을 내며 터졌고, 김상옥은 폭발 이후 후암동까지 도망을 쳐 지인의 집에 숨었다. 은신처가 발각되어 1월 17일 무장한 일본경찰이 집을 포위하였다. 그는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한다.
22일 새벽 다시 추격해 온 일본경찰과 교전을 벌이면서 일본경찰 여러 명을 사살하였다.
총알이 몇 발 남지 않자 김상옥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눠 자살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김지섭, 1924년 일본 천황 살해를 목적으로 일본 궁성을 습격하여 폭탄을 던졌다.
거사 당일 동정을 살피던 김지섭을 수상히 여긴 일본 궁성 경비경찰의 불신검문을 받자, 경찰을 쓰러뜨린 뒤 폭탄 한 개를 경비경찰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일본 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를 향해 뛰며 다시 한 개의 폭탄을 위병들에게 던졌다. 원래 계획은 이중교를 폭파한 후 그 소란을 틈타 황궁으로 들어가 천황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발의 폭탄이 모두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그는 일본 위병에게 붙잡힌 이후 경찰의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의거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였다. 1925년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1925년에 옥사하였다. 그의 나이 마흔한 살이었다.
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경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점으로 향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안에서 총을 여러 명에게 쏜 후 건물을 빠져나왔다.
네다섯 명의 일본경찰이 쫓아오자 걸음을 멈추고 “우리 이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라고 외친 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세 발을 총알을 쏘았다. 일본경찰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고, 그는 병원에서 죽는 순간 ‘나는 의열단원 나석주’라는 말을 남기고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 젊은 그들의 이름을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렇게도 이야기하면서 밥을 먹고 살았다.
그들의 젊은 청춘은 우뚝 솟은 산맥처럼 내 마음의 협곡에 들어와 있다.
그들의 이름을 빌려서 밥을 먹고 산 내가 언젠가 그들에게 빚을 갚게 될 날이 올까.
아니 어쩌면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고 나의 생은 끝날 것이다.
그들에게 진 빚을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
이 부채 의식은 항상 움푹 파인 내 마음의 협곡 속을 휘젓는다.
테러와 의열의 차이는 무엇인가.
테러는 소프트 타겟, 의열은 하드 타겟으로 구분하면 되는 것인가.
마음이 기울면 믿음이 된다. 그들의 마음은 조국으로 기울었고, 그 기울기가 심해 신념이 되어서 그들은 초인(超人)이 되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의 <광야>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위해, 그들의 청춘을 위해, 그들의 신념을 위해, 그들의 가난을 위해.
지난 봄, 밀양 예림 서원의 강당인 구영당의 돌계단에 앉아 왼편의 소나무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예림 서원은 영남 사림의 종사로 추앙받는 점필재 김종직을 배향하는 곳이다.
그 질긴 성리학의 신념이 김원봉과 윤세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예림 서원에서 김종직이 아닌 김원봉과 윤세주를 떠올리는 이 주체할 수 없는 엉뚱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의열단은 스물한 살 김원봉과 열아홉 살 윤세주가 1919년 12월 만주 지린성에서 창단하였다.
의열단을 창단했을 때 그들의 나이가 스물한 살, 열아홉 살이었다.
난 그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새삼 기억이 가뭇해지면서 고개가 숙여진다.
이 둘은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두 집은 십여 미터 정도 떨어져있었다.
둘은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김원봉의 나이 열두 살 때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그는 친구인 윤세주와 함께 울면서 일본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1911년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에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버리고 윤세주와 함께 자퇴를 하였다. 이후 밀양 읍내의 동화중학 2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편입을 받아준 동화중학의 교장인 전홍표는 민족 독립운동가로 명망이 높았던 분이었다.
전홍표 선생은 김원봉과 윤세주 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 할 수 없다’
김원봉과 윤세주에게 항일 독립 운동의 신념을 불어넣은 이가 전홍표 선생이다.
1919년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5파괴>, <7가살>을 행동목표와 기본규약으로 삼아 활동을 시작하였다.
흘려 읽지 말고 천천히 <공약 10조>, <5파괴>, <7가살>을 읽어보자.
부디 흘려 읽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키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키로 함.
3. 충의(忠義)의 기백(氣魄)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원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언제 어디〔何時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7. 언제 어디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8.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團義)에 진(盡)함.
9.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
<5파괴>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의열단이 파괴하려던 시설과 죽이려고 했던 이들이 각각 5개와 7명이 아니다.
의열단은 일본과 관련된 일체의 시설물과 일본에게 붙은 모든 이들을 죽이려 하였다.
이후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의 의거가 이어졌다.
일제 치하 35년 동안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고 치를 떨었던 의열단은 이렇게 젊은 청년들의 불꽃같은 죽음으로 일본과 투쟁하였다.
내 생전에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난 지금도 무언가를 말하려고 한다.
내 뼛속 심연에서는 알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아리랑>(The Song of Ariran)의 저자이며 기자이기도 했던 미국인 '님 웨일스'(Nym Wales)는 1937년에 의열단원 김산에 대한 일대기를 기록했다.
의열단에 가입한 김산은 당시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혁명가로 활동했는데 1938년 중국 당국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몰려 서른네 살에 처형되었다.
그에 대해서 '님 웨일스'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내가 칠년 동안 동방에 있으면서 만났던 가장 매력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님 웨일스는 김산이 속한 의열단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되어 있었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스포티한 멋진 정장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
의열단은 이후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와해된다.
시간이 흘러 조국은 해방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을 하지만 김원봉은 정치적으로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좌와 우를 넘나들면서 활동한 그는 남한과 북한 양쪽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
그는 여운형이 만든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에 추대되었지만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9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의 '부산 총파업'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남한에서 험난한 길을 가게 된다.
전평은 '남조선공산당'의 하위 조직으로 당시, 미군정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하였다,
당시는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 9월의 '부산 총파업', 10월의 '대구폭동' 등으로 미군정의 대대적인 좌익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시기였다.
김원봉은 1947년 3월,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부분은 떠도는 이야기인데, 당시 그를 취조한 형사가 '노덕술'이었다고 한다.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뺨을 맞는 등 온갖 수모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김원봉은 "내가 왜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라고 하면서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노덕술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를 고문하고 살해한 고등경찰 형사이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이 일제 강점기 친일 경찰에게 뺨을 맞는 이 시대적 상황이 중요하다.
역사는 달리는 버스의 창밖 풍경처럼 수시로 변하는데 지나간 풍경과 지금의 풍경이 도저히 같은 풍경이라고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노덕술 같은 인간에게 의열단장 김원봉이 뺨을 맞는다는 것.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역사이다.
김원봉은 어떤 회한이 있었는지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향했다.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를 하였다.
그는 1958년 9월, '조소앙 선생 장례식 조문 명단'에 이름이 오른 뒤,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아마도 한국전쟁 후,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 중에 '민족주의 계열'로 분류되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에 따라서는 1956년에서 1958년 사이에 탈북을 시도하다가 적발,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다.
한편 남한에 남아있던 그의 형제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사건'이 터지면서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목숨을 잃었다.
김원봉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지금도 논란이다.
그 논란을 부추기고 싶은 마음도, 그 논란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도 없다.
왜냐면 그 논란 속에는 항상 이념이 서 있기 때문이다.
난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단지 의열단, 그들의 피 끓는 젊음을 이야기 하고 싶을 뿐이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의 시구처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묻고 싶다.
김원봉이 어쩌고저쩌고, 홍범도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떠드는 인간들에게 난, 정말 묻고 싶다.
너희는 단 한번이라도 그들처럼 조국을 위해 너의 몸을 뜨겁게 불살라 본 적이 있는가.
김원봉은 술을 마시면 <밀양 아리랑>을 구슬프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밀양 아리랑이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개사되어 불리워졌다고 하니 가사가 지금의 가사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 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아리 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다틀렸네 다틀렸네 다틀렸네
가마타고 시집가긴 다틀렸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의열단원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이외에도 의열단은 아니지만 안중근 서른한 살, 이봉창 서른한 살, 윤봉길 스물네 살의 짧은 생을 살다갔다.
“그대들의 젊은 죽음 위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서 있습니다.”
어제는 BTS가 <아리랑>이라는 새 앨범을 발표하면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마주보며 광화문에서 공연을 했다.
그 청춘들이 세계로 뻗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