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학 농민 전쟁 - 동학이 우리에게 새겨준 무늬는 무엇인가.
무언가와 사투(死鬪)를 벌인 것들에게만 새겨지는 무늬가 있다.
물고기의 비늘과 몸 무늬는 기나긴 세월 그 물고기가 헤쳐 간 물살이 몸에 새겨진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새겨진 비늘과 무늬를 무엇이라 이름 붙이기 어려워 ‘한국사’라 이름붙인 것은 아닐까.
인문학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든 무늬라면 한국사는 한국 사람에게만 새겨진 무늬라고 보아도 좋을듯 싶다.
수없는 투쟁에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쓰러지고 일어나면서 생긴 그 무늬는 깊게 각인되어 있다.
몸에 새겨진 무늬를 지식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머리로 이해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은 지식이고,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눈으로 보이는 햇볕은 따스하지만 그 빛이 튕겨내는 쇠붙이는 알싸한 비린내를 풍긴다.
역사적 사건을 지식으로 다루는 것과 몸이 받아서 튕겨져 나온 지혜로 다루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몸에 새겨진 무늬가 왜 지혜인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를 한 편 소개해 보겠다.
『장자(莊子)』의 「천도(天道)」 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제(齊)나라 환공(桓公, 기원전 716~643)이 대청마루 위에서 서책을 보고 있었다.
윤편(輪扁)이라는 수레공이 마루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마루 위를 쳐다보며 환공에게 아뢰었다.
“감히 여쭈온데,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다.”
“그렇다면 대왕께서 지금 읽고 계신 책은 아마도 옛사람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환공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과인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나 만드는 네놈이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만일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한다면 무사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자 윤편이 대답했다.
“제가 평소에 하는 일의 경험에 비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뻑뻑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바로 그 사이에 비결이 존재합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어름에 정확한 치수가 있을 것입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로부터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 성인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깨달음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실제 원문에는 찌꺼기가 조백(糟魄)으로 나온다. 조백은 술을 빚고 남은 술지게미이다.
예전에는 술을 빚고 남은 조백을 마루나 길에서 말렸는데 이게 신기하게도 술은 아닌데 먹으면 술을 마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쉽게 말하면 조백으로도 취할 수 있다.
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이것을 아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데 이게 조백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공부를 해서 얻은 지식이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장자는 경전을 철저히 암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윤편은 수레바퀴 깎는 작업에 관한 기술을 습득하고 실질적인 일을 통해 끊임없이 연마하여 기술의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전의 글은 옛 성인이 살았던 시대의 한정된 시간 속에서만 의미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글로 옮겨진다.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변하기 때문에 과거의 훌륭했던 지식은 찌꺼기가 된다.
윤편은 환공에게 책만으로는 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경전에 있는 지식은 현재의 지식과 지혜가 아니다. 이것이 현재의 지혜가 되려면 과거의 지식을 체화해서 실천을 통한 반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부터 진행할 이야기는 동학의 역사이다. 동학의 역사가 지식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몸속에서 잘 버무려져 삶의 지혜가 되기를 바라다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동학의 창시와 동학의 사상은 생략하기로 하자.
또한 동학이 종교적 차원에서 일으킨 교조 신원 운동 역시 생략하고 여기서는 동학 농민 전쟁을 중심으로 동학의 반봉건∙반외세적 움직임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동학 농민 전쟁의 전개 과정을 배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학 농민 전쟁을 어떻게 하면 지식이 아닌 지혜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몸에 새길 것인가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도래 속에서 조선은 외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차례대로 통상 조약을 체결한다.
조선은 이후 ‘외세에 의탁하여 외세로부터 벗어나려는 잘못된 외교 노선’을 걷다가 결국은 식민지의 길로 들어선다.
이전의 외교 부분에서 언급을 했지만 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를 위해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한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의 지배 체제 유지를 위해 시세의 변화에 따라 친청정책, 친러정책, 친일정책, 친미정책 등으로 외교정책을 변화시켜 위기를 헤쳐 나아가려고 하였다.
조선 지배층이 이런 외교정책을 펼칠 때 민중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면서 근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투쟁을 펼쳤다.
동학 농민 전쟁을 보수적으로 동학난 혹은 동학민란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고, 진보적으로는 동학혁명이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절충적 용어인 ‘동학 농민 전쟁’으로 부르겠다.
동학 농민 전쟁은 외국과의 수교 이전부터 끊임없이 지속된 민란이 농민 전쟁으로 발전한 경우이다.
동학 농민 전쟁이 전제 왕권을 부인한 국민주권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혁명성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자.
동학 농민 전쟁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조선의 봉건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 강력하게 투쟁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학 농민 전쟁은 내부의 세력과 외부의 세력이라는 양쪽의 적을 대상으로 한 투쟁이었다.
한쪽과 싸우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안과 밖, 둘을 상대로 투쟁을 해야 하는 동학의 상황은 매우 외롭고 힘든 싸움이었다.
동학 농민 전쟁의 전 과정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핵심 사건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 전쟁을 전개해보겠다.
동학 농민 전쟁은 고부 농민 봉기에서 시작한다.
고부 농민 봉기는 동학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사건은 아니지만 1차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므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동학 농민 전쟁 발생의 심층의 원인에 조선의 탐학한 관리들이 있음을 고부 농민 봉기를 통해 기억해야 한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 등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虐政)에 맞서 봉기해 만석보를 허물고 조병갑을 몰아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탐학한 관리였다.
고부 지역은 원래 토양이 비옥해 저수지가 많이 필요한 땅이 아니다.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해 만석보라는 새로운 저수지를 축조하였고 이 저수지가 완성되자 고부민에게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격분한 고부민들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뭉쳐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농민이 고부관아를 점령하자 조병갑은 도망쳤다.
10여 일 동안 고부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아전들을 치죄(治罪)하고, 고부관아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관찰사) 김문현은 고부 민란 소식을 듣고 놀라 사건을 수습하려 하였다.
김문현은 신임 군수 박원명을 파견해 고부민란을 수습하였다. 그런데 이후 중앙에서 안핵사 이용태를 내려 보내면서 사건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용태는 고부민란 가담자를 다시 체포해 가두고 고부민을 탄압하였다.
당시 동학의 남접주인 전봉준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에 맞서 동학교도를 모아 3월 20일 무장에서 전면 봉기하였다.
<무장 창의문>
우리는 초야의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이에 전국은 한마음으로 수많은 백성과 의논하여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무장창의문에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부분은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볼 수 없어 봉기를 하였다는 부분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빛을 갉아먹듯 부패한 관리들이 백성의 땀으로 이뤄낸 세금을 갉아먹는다.
백성들이 느끼는 어둠의 질감은 양반네가 느끼는 어둠의 질감과는 다르다.
백성들의 어둠은 항상 짙고 두텁다. 양반네들의 옅고 얇은 어둠과는 다르다.
전봉준은 이후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백산으로 이동해 백산 격문과 동학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백산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농민들이 죽창을 든 이유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 함이다.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외세를 몰아내기 위함이다.”
농민들의 하얀 옷이 산을 이루었다 하여 백산(白山)이라 한다.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도대체 누가 국가를 어렵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이것을 누가 구하려고 하는가.
사람은 빛과 어둠의 공존 속에서 살아간다.
위정자들이 만든 어둠을 걷어내려는 농민들의 빛은 처연하다.
<농민군 4대 강령>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4. 7.)와 황룡촌 전투(4. 23.)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다. 5월 8일 동학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수용한 정부와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폐정개혁안은 말 그대로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아달라는 동학의 요구였다.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도인(동학교도)과 정부는 묵은 감정을 씻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의 무리는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의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릴 것
6.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는 평량갓은 벗어버릴 것
7.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는 일체 거둬들이지 말 것
9. 관리의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기왕의 공사채를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폐정개혁안에는 동학의 꿈이 담겨있다.
인내천, 사람이 하늘인 나라. 사람과 사람이 평등한 나라. 이것이 동학이 꿈꾸던 세계이다.
전주 화약 체결(5. 8.) 이후 전라 감사 김문현은 동학과 협력하여 전라도 지역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당시 전라도의 민심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은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실천해 나아갔다.
집강소는 한국사 최초의 민정 자치기구이다.
동학이 집강소를 통해서 폐정개혁안을 실천하고 있을 때 조선 정부도 6월 11일 교정청을 설치해 정부 차원에서 폐정 개혁안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중 플레이를 한다.
동학과는 화약 체결을 시도하면서 4월 28일 청나라에게 동학농민군 진압을 요청했다.
자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막으려는 이러한 발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국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막지 못해 외국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한 나라를 다른 나라는 어떻게 보겠는가.
다른 나라 입장에서 보면 조선 스스로 모든 패를 까서 보여준 것이다.
청나라는 전주성이 함락된 직후에 조선 정부로부터 농민군 진압 요청(4월 28일)을 받는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얼씨구나 좋다’였을 상황이다.
조선에서 일본의 힘이 강화되는 데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청으로서는 군대 파병을 요청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었겠는가.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청과 일본은 갑신정변(1884) 이후 톈진 조약을 체결한다.
톈진 조약은 조선에 변란이 발생해 군대를 파병할 상황이 되면 청•일 양국이 상호 통보를 해주기로 한 내용을 골자로 한다.
청은 일본에게 군대 파병 사실을 알렸고, 일본도 이때다 싶어 우리나라에 군대를 파병한다.
청군은 5월 5일에 아산만으로 들어오고, 일본군은 5월 6일부터 인천항으로 들어온다.
이후 일본군은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한 후 조선에게 개혁을 강요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차 갑오개혁이다.
일본이 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자 청나라는 일본에게 강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일본은 이에 맞서 풍도에 정박 중이던 청군의 배를 공격하면서 6월 23일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우리나라 안에서 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결국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일으킨 문제를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면 그 도움을 준 사람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이런 끔찍한 문제를 불러온다.
일본의 1차 갑오개혁 추진과 청•일 전쟁의 발발은 동학 농민군 재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동학 농민군은 삼례에서 재봉기(9월)를 한 후 논산에서 남•북접 집결(10월)을 이루었다.
1차 동학 농민 전쟁에서 참여하지 않았던 손병희의 북접까지 2차 동학 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조선 정부의 무능함을 꾸짖고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한양으로 북상하였는데, 북상 도중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의 현대식 무기에 밀려 대패했고, 지도부가 체포·처형되며 동학 농민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금강에 흐르던 동학의 핏물이 남아 있지는 않겠지만 지금도 금강의 흙은 붉은색이다.
동학 농민 전쟁의 전개 과정을 이야기하다 보면 허망함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동학 농민 전쟁이 일본군에 의해 끝나서가 아니다.
조선 정부의 문제 처리 방식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힘으로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학 농민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무겁다.
동학 농민 전쟁은 이후 안으로는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었으며, 밖으로는 항일 무장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동학 농민이 중심이 된 근대의 부르짖음은 이후 오랜 기간 메아리친다.
녹두장군 전봉준. 그 이름을 부르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녹두는 배수가 양호한 토양에서 자라는 콩과(科) 식물이다. 물기가 있으면 잘 자라지 못한다.
물은 생명인데 물이 없는 헐거운 땅에서 녹두는 자란다.
마치 그 헐거움이 자신의 본능인 것처럼.
콩과 식물은 자라면서 영양분을 땅에 전해준다. 대부분의 식물은 자라면서 땅의 영양분을 흡수한다.
전봉준은 녹두다.
운명(殞命) / 전봉준의 유고시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運去英雄不自謨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 사랑 정의 위한 길에 허물이 없었건만
愛國丹心谁有知
나라를 위하는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동학 농민 전쟁의 역사가 조백(찌꺼기)이 아닌 우리 몸에 각인된 무늬로, 지혜로써 작용되기를 기대해보는 것은 나만의 욕심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