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경래의 난 - 비빌 곳 없는 민중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정의하며, 이는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문장 앞에서 나는 항상 ‘심적 활동’이라는 말 앞에서 멈추게 된다.
눈으로 보이는 몸의 활동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
깊은 생각이 필요한 문장이다.
요즘의 역사 공부는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에만 몰두한다.
중첩되어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의 인과관계를 밝히고 연표를 만들어 왕의 순서나 사건의 순서를 암기해서 시험을 본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공부를 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역사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평생 역사책을 뒤적거리면서 살았는데도 난 역사가 어렵고 무섭다.
왜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무섭다.
조선 후기에 발생한 세도정치는 배워도, 세도정치 하에서 사라져 간 민중들의 삶은 깊은 우물 속에 가라 앉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민중들의 배고픈 삶은 역사의 침전물처럼 깊이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는다. 건져 올리기에는 그 침전물이 너무나 아프다.
이러한 침전물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특히나 투쟁의 침전물은 마음이 없으면 느낌도, 아픔도 생기지 않는다.
다음 글은 김훈 선생의 『흑산』에서 일부를 발췌한 글이다.
무릇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하고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주린 배를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똥이 되어 나간 밥이 창자를 거슬러서 되돌아올 수 없으므로, 눈앞에 닥친 끼니의 밥과 지금 당장 목구멍을 넘어가는 밥만이 밥이고 지나간 끼니의 밥은 밥이 아니라 똥입니다.
그러하온데 지난봄 보릿고개에 빌린 곡식을 갚으라고 지금 당장 먹을 곡식을 빼앗아가니, 당장의 배를 곯아서 지나간 끼니를 벌충하는 것입니까. 수령과 관속들은 농사를 지은 적이 없고 현청 사창(社倉)에 쌓아놓은 관곡도 모두 백성이 지은 쌀일 터인데, 어찌 당장에 먹을 것을 거두어 지나간 끼니의 곡식을 채우려 하십니까. 바라옵건대 백성의 가냘픈 팔목을 비틀어 손에 쥔 밥을 빼앗지 마시옵고, …… 발바닥이 부르트고 가래톳이 서도록 먼 길을 걸어와서 겨우 글월을 올립니다. 소인들이 글월을 올린 일을 소란스럽다고 하여 벌하신다면 가랑잎같이 메마른 소인들은 곤장 한 대에 바스러져 버릴 뿐입니다.
김훈 선생의 소설 『흑산』에 나오는 백성이 올린 상소문이다. 역사적 사실 기록이 아닌 소설의 글을 발췌한 이유는 ‘심적 활동의 상태’가 무엇인지 함께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문장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자.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똥이 되어 나간 밥이 창자를 거슬러서 되돌아올 수 없으므로, 눈앞에 닥친 끼니의 밥과 지금 당장 목구멍을 넘어가는 밥만이 밥이고 지나간 끼니의 밥은 밥이 아니라 똥입니다.
글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이 바빠서 혹은 상황이 안 되어서 한두 끼만 건너뛰어도 허기 때문에 몸을 가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마음은 역사의 땅 위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을 삼킨 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흩어진다.
이 마음을 붙잡는 일이 무용(無用)한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용한 일을 잡으려는 몸부림이 사람의 시선을 높이는 길임을 난 요즘 들어서 느낀다.
역사는 시간의 길 위에서 펼쳐지는 아픈 여정이다.
길은 앞으로 뻗어 있는 거 같지만 실은 걸어온 길도 얼마 전까지는 앞으로 뻗어 있던 길이었다.
지나온 길은 아픈 여정을 간직한 마음이다.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을 올바르게 가기 위해서는 뒤의 길에 새겨진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허기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과거 민중들의 허기를 잊지 말아야 현재 국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이해할 수 있다.
배고픔과의 투쟁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이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인간의 투쟁’은 결국 역사에서 일어나는 투쟁의 궁극적 이유이다.
물론 현대의 투쟁은 배고픔의 투쟁이라기보다는 남들보다 나아지기 위한 비교 투쟁이지만 어찌되었든 나와 내가 아닌 모든 것과의 투쟁은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투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내부의 문제를 안고 일어난 투쟁과 외부의 침략에 대응하는 투쟁이 있다.
외부의 대상과의 투쟁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히려 내부의 투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투쟁의 이해가 선명하면 투쟁 과정이 조금은 덜 힘들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 예를 들면 외부의 대상, 즉 어떤 회사에 취직해서 다른 회사와의 싸움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해결도 쉽다. 열심히 일을 하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내부의 싸움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 회사 안에서 나를 별로 믿지 않는 부장, 나의 선함을 왜곡하는 과장과의 투쟁이 더 어렵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과의 다툼은 사람의 마음을 지치고 힘들게 한다. 그리고 그 내부의 싸움은 투쟁의 정당성과 명분을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비빌 수 있는 슬픔과 비빌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비빌 수 없는 슬픔은 끝까지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지만 비빌 수 있는 슬픔은 누군가가 필요하다.
사람이 살다가 힘들면 가족, 사회, 국가와 같은 비빌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비빌 대상이 투쟁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19세기 세도정치 하에서 발생한 사회 모순과 여기에 더해 지역 차별 때문에 홍경래의 난이 발생한다.
어떤 사건은 복합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 역사적 사건은 1+2=3과 같이 인과관계에 의해 정답이 딱 떨어지지 않고 원인이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홍경래의 난은 원인이 매우 복잡하다.
이제 홍경래의 난이라는 과거의 시간 여행을 해보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서북 지역은 고려 시대에 거란 전쟁의 최전선으로서 계속적으로 전쟁에 시달렸고, 이후 묘청의 난(서경), 조위총의 난(서경) 등이 일어날 때마다 중앙에서 파견된 군대에게 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다.
서북지역이 차별받는데 결정적 영향을 준 사건은 고려 후기 원(元)이 동녕부를 설치한 후, 원의 영토로 편입되면서이다. 동녕부가 설치되면서 이 지역을 바라보는 중앙의 태도는 매우 나빠졌다.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도 이 지역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청야 전술(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 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 펼쳐졌기 때문에 이 지역 농민들은 농사를 지을만하면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농업에 기댄 삶을 살기가 어려웠다.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세종 때 4군 6진이 개척된 이후 사민정책이 실시되었다.
사민정책은 시간이 흐르면서 남부의 죄인들을 북부 지역으로 보내는 제도로 변질되었고, 죄인뿐만이 아니라 그 가족들도 함께 옮겨지면서 마치 유배지 같이 되어버린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이 서북 지역에서는 확고히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결국에 조선의 서북 지역은 양반 사회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다.
서북 출신은 사대부가 이끄는 조선 사회에서 과거에 합격을 하여도 중요 관직에 오를 수 없게 된 것이다.
홍경래도 과거에 낙방하고 풍수장이가 되어 묏자리를 봐주던 잔반이었다. 홍경래의 핵심 참모였던 우군칙도 풍수장이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풍수지리 사상은 항상 사회를 변혁하려는 이들에게 핵심 이념이 되곤 한다.
풍수장이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조선 시대 잉류 지역으로 세금을 중앙으로 나르지 않았다. 세금을 걷어 자체 경비로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부세 행정에서 그 지역 출신의 향임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체 경비로 사용하기 위한 창고를 민고(民庫)라 한다. 세도정치 하에서 이 지역으로 파견된 수령은 세도 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향임과 결탁해 세금 수탈을 심하게 하였다. 세도정치 하에서 평안도의 민고는 수령의 사금고화 되었다.
또한 서북 지역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파견하는 사신들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에 파견하는 사신의 횟수가 많아서 경비 지출이 많았고, 조선 후기 세도정치 하에서는 수령의 개인 금고가 되어서 뇌물 창고 역할을 하였다.
돈을 들여 관직을 산 수령들은 자기 재임 기간 동안 뇌물로 바친 돈을 뽑아야 했고 이는 평안도 향임과의 마찰을 불러왔다. 서북민의 향임과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의 마찰은 중앙과 지방의 마찰 구도를 만들어냈다.
홍경래의 난이 남부의 농민 봉기와 다른 점은 향임들의 주도와 지원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자제(父老子弟)와 공사천민(公私賤民)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와 단군 시조의 옛터로서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급제하고 문물이 발전한 곳이다. 저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이 있으며, 또한 정묘호란에는 양무공 정봉수가 충성을 능히 바칠 수 있었다. 돈암 선우협의 학식과 월포 홍경우의 재주가 또한 이 곳 서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 시험에 당하여서는 서토의 글을 빌었으니 400년 동안 서토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적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별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 이르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서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세상을 구제할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의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나면서 신령함이 있었고 5살 때에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으며 성장하여서는 강계 사군의 여연에 머무르기 5년에 황명(皇明)의 세신 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 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병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으니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에 소생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패림』권10, 순조기사, 신미 12월 21일
홍경래의 난(1811)이 발생하기 이전 함경도 북청부와 단천의 농민 봉기(1808)와 황해도 곡산의 대규모 농민 봉기(1811)의 주도층은 향임이었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 당시에 서북 지역의 향임들이 적극적으로 난을 도왔고, 홍경래의 군이 세력을 넓혀갈 때 거의 대부분의 지역들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한 이유도 지역 향임들의 도움이 컸다. 향임들의 도움으로 홍경래의 군대가 세력을 넓혔다면 홍경래의 군이 몰락한 이유도 향임들의 배신 때문이었다. 난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향임들은 곧바로 배신을 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지켰다. 아니 배신의 정도가 아니라 중앙관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난을 진압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였다.
홍경래의 난을 조선 광업과 상업 등과 연결 지어서 원인을 분석하기도 한다.
서북 지역은 청과의 국경을 접하고 있어 무역이 발달하였다. 조선 후기에 의주, 평양, 안주, 정주 등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조선의 경제 정책은 중농억상이었다. 농업을 산업의 기본으로 한 조선 조정에서 볼 때 상업이 발달한 서북 지역은 몹쓸 땅이었다.
조선 후기 효종 때부터 설점수세제에 의한 사채(私採)가 시작되었고, 영조 때 수령수세제에 의해 이 지역은 광업이 활성화 되었다. 광업의 활성화는 당시 유민을 이 지역으로 빨아들였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들이 이 지역으로 몰렸다. 홍경래가 서북 지역에서 많은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퍼트린 이유도 유민을 모아 난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09년 기록적인 흉년이 발생한다. 흉년으로 인한 기민(飢民)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기민들은 광산에서 일을 하여 끼니를 때우기 위해 서북 지역으로 흘러들어왔다. 지역 경제가 좋지 않던 상황에서 기민들까지 유입되니 서북 지역은 거지떼 소굴이 되었다.
향임들에 동원된 농민과, 광산노동자, 지역의 상인들이 홍경래의 군에 가담하거나 재정 지원을 하였다.
풍수가였던 우군칙, 진사 김창시 등이 홍경래를 도와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지역 유력자와 상인들을 포섭하였다.
홍경래의 무리들은 다복동에 봉기군의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1811년 12월 드디어 홍경래의 난이 터졌다.
홍경래는 군은 둘로 쪼개어 한 무리는 가산, 박천, 영변, 안주 등을 공격하면서 남하하였고, 나머지 무리는 정주, 곽산, 선천, 철산, 의주 등을 공격하면서 북상하였다.
서북의 고을이 한순간에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였다. 빠른 속도로 고을이 점령당한 이유는 향임들의 지원이 컸다. 향임들은 홍경래의 군이 도착하면 성문을 열어주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자, 이 부분에서 숨고르기를 한번 하자.
홍경래의 난은 어떤 특정 세력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에 불만을 가진 여러 세력을 홍경래가 끌어 모아서 일으켰다.
뚜렷한 목적이 없으니 난을 일으킨 의미와 성격을 본인들 스스로도 명확히 인지할 수가 없었다.
이런 세력들은 조금의 어려움이 발생하면 서로 쉽게 등을 돌린다.
‘죄수의 딜레마’도 이런 예이다. 서로를 믿지 못하니 난이 조금 어려운 상황으로 흘러가자 서로 발을 빼기 시작한다.
실제로 전세가 관군한테 기울기 시작하자 향임과 상인층이 먼저 발을 뺐고, 나중에는 향임과 상인이 의병까지 조직하여 관군에 가담해 홍경래 군을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홍경래는 상황이 어려워지자 정주성을 택해 농성을 지속하였다.
홍경래의 정주성 농성은 4개월 가까이 끈질기게 펼쳐지는데 결국 홍경래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역사적 시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농민들의 배고픔에서 일어난 단순 민란으로 보는 시선과 다른 하나는 세도정치 하에서 발생한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반봉건적 농민 전쟁의 시선이다.
배고픔이 원인이 된 민란이든, 사회 모순이 원인이 된 농민 전쟁이든, 이런 학계의 시선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난 민중 투쟁으로 보고 싶다.
삶이 어려운 민중들의 비빌 대상이 되어야 했던 국가와 관리가 백성을 버린 것에 대한 민중 투쟁.
지금도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비슷한 일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 이제는 화낼 힘도 없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의 표만 계산하는 정치인.
이들이 세도정치 때 살았다면 그 수령이고, 그 관찰사였을 것이다.
세도정치 시기의 위정자들은 백성의 껍질을 벗기어 기름을 짜고 피를 빨고 뼈를 부수고 살을 발라내어 자기들이 먹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나는 시선의 문제를 항상 이야기하는데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가 그 사람의 인품을 만들고, 인품은 특유의 인향(人香)을 만든다.
시선이 돈에 닿으면 그 사람에게는 돈의 향기가 나고, 시선이 사람에게 닿으면 그 사람에게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의 껍질을 벗기어 기름을 짜고 피를 빨고 뼈를 부수어서 살을 발라먹는 이들에게서 인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