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한제국(韓國) - 너희들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세계사는 제국주의 파도 속에서 출렁거렸다.
제국주의란 독점 자본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념이다.
우리나라는 이 파도의 출렁거림 속에서 배가 난파된다.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을 공부하는 이유는 병든 과거가 회복되면 면역이 생기듯 우리에게 역사 항체가 생성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동아공영권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공동으로 번영하는 권역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을 위한 선전 구호이자 일본 제국이 창설하려 했던 범아시아 연합 계획이다.
대동아공영권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주장한 구호이지만 이전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을 했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일본이 중심이 되어 아시아가 하나로 뭉쳐 서양 세력을 막아내자는 구호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론이다.
동양은 서양과 다르게 제국주의 이념이 없었다.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의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하면서 한국의 독립이 보존되어야 동양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은 아시아에서 대의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러∙일 전쟁 당시에 우리나라는 이러한 일본의 명분을 지지하면서 일본을 도왔다.
당시 청국도 이러한 일본의 대의명분을 지지하였다.
청과 대한제국은 이러한 일본의 선전을 믿고 운수∙도로∙철도건설∙정탐 등을 도왔다.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일본의 주장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빼앗기 시작하면서 거짓임이 드러난다.
일본의 동양 평화는 옆집에 살고 있는 아저씨가 느닷없이 우리 집에 들어와 곧 있으면 강도가 들어올 거 같으니 내가 지켜주겠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당하는 우리 집의 입장에서 보면 옆집 아저씨가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안중근은 인식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집필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집필된 부분까지를 요약하면 대략 위의 내용과 같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부터 생긴 고름은 짜내지 못할 정도로 곪아 터지고 있었다.
세도정치 하에서 발생한 매관매직에 의한 수취 체제의 문란이 파생시킨 문제는 사회의 전반적인 정상 기능을 마비시켰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미시적인 비정상적 사건이 얽히고설키면서 거시적인 필연을 만들어낸다.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되면서 조선은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한 나라가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네 개의 분면으로 나누어 대응 방안을 이야기해보면 제1사분면은 전통질서 폐지, 반침략이다. 이 분면에 해당하는 사건이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제2사분면은 전통질서 유지, 반침략이다. 이 분면에 해당하는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위정척사 운동 등이다.
제3사분면은 전통질서 유지, 외세와 교역 주장이다. 이 분면에는 온건개화파의 동도서기론 등이 해당된다.
제4사분면은 전통질서 폐지, 외세와 교역 주장이다. 이 분면은 급진개화의 주장이 해당된다.
우리나라 정부가 채택한 방향은 제3사분면이었다. 전통질서를 유지하면서 외세와의 교역을 통한 성장을 채택하였다.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 불린다.
동양(우리)의 도는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의 도에 해당하는 것이 군주제의 정치체제와 성리학 같은 사상 등이다. 그렇다 성리학을 지키는 것, 이것이 대한제국이 선택한 방향성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개혁 당시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이어진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器)인 것이지, 도(道)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윤선학의 상소
동도서기론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기에 앞서 사진을 보도록 하자.
신미양요 당시의 사진이다.
미군과 조선군의 모습이다. 두 나라의 전투가 어떻게 되었을지 예상이 되는가.
동도서기론에서 서기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다. 예를 들어서 대포의 사정거리 등은 과학기술과 관련된다.
지금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은 그 나라의 과학기술과 국방력의 척도가 된다.
당시 미군은 대포를 배나 수레에 싣고 움직이면서 포를 발사하였고 사정거리도 우리의 대포보다 훨씬 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냐면 동도서기론에서 동도는 우리의 사상이다.
사상이란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을 의미한다. 그냥 편하게 생각이라고 하자.
서양의 과학기술은 무엇으로 이룩된 것일까. 바로 생각이다. 끊임없는 생각의 결과가 과학기술을 발전시킨다. 여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기술과 기능은 다르다. 뒤에 붙은 ‘능’자와 ‘술’자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기능과 기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 예능과 예술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능’은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술’은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피카소의 그림 앞에서는 생각이 많이 필요하다. 생각을 하다 보니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는 의미는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한자로 감동(感動)이라 한다. ‘능’은 감동을 주기 어렵지만 ‘술’은 감동을 준다.
과학기능이란 말은 없다. 과학은 기술이다.
동도서기론의 모순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키려고 했던 도는 당시의 기준으로 서양보다 뒤처진 것이었다. 우리의 도(생각)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겠다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론이다.
과학기술은 어느 날 우연히 발전하는 게 아니다. 생각을 기본으로 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과학기술은 발전한다.
위의 사진은 동도서기론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오해를 없애기 위해 한마디를 덧붙이면 신미양요 당시에 희생된 우리의 군인을 폄훼하거나 모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잘못된 정책이 죄 없는 군인과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반면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메이지유신을 통해 급직전인 발전을 이룩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게이호 대학을 세웠으며 그의 문명개화론을 압축해서 한 문장으로 말하면 ‘지(知)의 총합이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이다.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너무나도 적확한 표현이다.
일본은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치도 결국 그 나라의 평균 교육 수준에 제약당한다.’고 했다.
우리가 가진 ‘도(道)’가 필요 없는 것이라 생각될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용기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다.
일본은 버렸고, 우리는 버리지 못했다.
도를 버리지 못하는 나라를 비판하면서 그 나라를 버리는 사람들이 이럴 때 등장한다.
민족반역자의 등장은 국가 멸망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 찬성한 을사오적이 대표적인 민족반역자이다.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이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 항체가 만들어진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 되어가는 과정을 외교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일본은 1902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여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다.
러시아가 만주와 한반도로 남하하는 움직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던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다.
러∙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05년 8월,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다. 제2차 영∙일 동맹은 영국의 인도 지배권을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일본은 제2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기 1개월 전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이렇듯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 러시아를 압박하였다.
러시아는 잘못되면 영국, 미국, 일본의 연합국과 싸워야 한다는 불안감이 생겨서 제2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자 바로 항복하였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의 핵심인 제2조를 살펴보면
<포츠머스 강화 조약 제2조>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함에 있어 이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한국에서 러시아국 신민은 다른 외국의 신민 또는 인민과 완전히 동등하게 대우받을 것이며 바꿔 말하면 최혜국의 신민 또는 국민과 동일한 지위에 놓여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양 조약 체결국은 일체의 오해의 원인을 피하기 위하여 러시아-한국 국경에서 러시아국 또는 한국의 영토의 안전을 침해할 수 있는 하등의 군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동의한다.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는 군사적 승리라기보다는 외교적 승리라고 보아야 한다.
영국과 미국은 한반도를 러∙일 중에 어느 나라가 먹는 것이 자국에 유리할까를 생각했다.
두 나라는 결국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미국이 “야! 일본, 네가 먹어.” 그래서 일본이 먹었다.
시간이 흐른 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가 도움이 되지 않자 미국은 “야! 일본 그만 먹어. 이제 뱉어”라고 했다. 일본은 “싫어!”라고 했다.
결국 세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일본은 핵폭탄을 경험하게 된다.
힘의 외교란 이런 것이다. 힘이 없는 나라가 외교를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외교는 상대의 힘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외교는 데칼코마니 같다는 생각을 한다.
A국가와 B국가 간의 서로의 이익이 똑같이 찍혀야 외교가 성공을 거둔다. A국가는 얻는 것이 있고 B국가는 얻는 것이 없으면 외교적 성과를 낼 수 없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은 우리나라와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사라진다.
여기에서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일본은 대한제국이 가진 많은 권리 중에서 왜 제일 먼저 외교권을 박탈했을까. 생각을 해보았으면 한다.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사권, 경찰권 등은 그대로 둔 채 왜 외교권이었을까.
을사늑약의 내용을 먼저 살펴본 후 이야기를 다시 해보도록 하자.
<을사늑약>
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금후 한국과 외국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와 영사(領事)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온전하게 할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폐하의 아래에 한 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며,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은밀히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또한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갖는다.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아래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했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 사무를 맡아 처리한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이 파견되었고 통감이 외교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가지고 있으면 제3국의 개입이 일어나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박탈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군사권은 내버려 둔 채로 외교권을 먼저 박탈하겠는가.
외교권이 박탈당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적 몸부림은 헤이그 특사 파견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은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다.
을사늑약은 고종이 직접 날인을 하지 않았고 이완용이 대신 날인하였다.
고종의 무효 주장은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1905년 11월 26일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미국으로 보냈지만, 미 국무성은 헐버트의 전달을 묵살했다.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고종은 다시 세계열강을 상대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열강의 한국문제 개입을 호소하는 비밀외교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종의 비밀 외교 과정에서 헤이그 특사 파견(1907)이 추진되었으나 파견된 특사는 회의에 참석도 할 수 없었다. 회의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비분강개한 이준은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대한제국을 직접 경영하고자 했다.
일본에게는 고종 폐위의 명분이 만들어진 셈이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7월 7일 외무대신 하야시를 통해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전보를 보내어, 고종의 특사 파견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표현하였으며 이는 명백히 을사늑약을 위반한 것이므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선전포고할 명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향후 일본정부가 취할 방책에 대해 원로대신들과 숙의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대한제국 정부 총리대신 이완용과는 이미 고종 양위문제를 거론했다고 보고했다.
이런 와중에 대한제국 내각에서는 이완용과 친일 단체 일진회를 창립한 송병준이 앞장서서 고종 황제 폐위를 추진하였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고종 황제가 스스로 물러나고 양위를 해야만 대한제국이 살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1907년 7월 16일 내각회의에서 마침내 황제 폐위가 결정되었고 이완용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7월 18일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고 7월 20일 서둘러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일본은 순종의 재가도 없이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통감이 차관을 직접 임명하여 행정을 맡도록 하였다. 한∙일 신협약의 비밀 각서에는 군대 해산이 명시되었기 때문에 7월 31일에는 군대해산 조칙이 내려졌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외교권, 행정권, 군사권을 모두 잃게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침몰한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 치욕이었다.
단군 이래 오천년 가까이 이어온 나라가 이렇게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국가가 망할 때면 망하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심화되어 고름이 되고 썩어간다.
그 고름을 제거해주겠다는 조력국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결코 조력국이 아니다.
고름을 제거하고 남은 살을 발라먹으려는 것이지 그 어떤 국가도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남의 고름을 제거해주지는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고름을 제거해준다고 등장하는 국가의 편에 서는 자들이다.
민족반역자, 이들의 이름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반드시 기록을 하고 후세의 사람들이 기억을 해야 한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면 병들었던 과거가 다시 살아날 때 우리는 다시 항체 없이 이 병균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을사오적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일진회의 송병준, 윤시병, 이용구.
대한민국이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난파되었던 대한제국이 멋진 잠수함이 되어 다시 부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