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에세이
어쩌다 단어
2013년.
지금으로부터 약 10년전이자 당시에 핫한 종합광고대행사 이노★에 들어가기 위해 길고 긴 여정을 거쳐 겨우 신입사원이 되어 한창 들떠있던 시절. 어찌어찌 장래희망을 이루기는 했으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설렘, 긴장, 불안 등으로 한껏 엉망진창인 멘탈 상태로 나의 신입시절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회사 내에서 경쟁PT(경쟁 대행사들과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광고건수를 따내는 일) 를 했다하면 절대 패하지 않는다던 에이스팀에 소속 되어버렸다. 그때는 '워라벨'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던 라떼시절이였기 때문에 야근에서 야근으로 이어지는 곡식도 영혼도 탈탈 털리는 악명 높은 시간들을 겪곤 했는데, 에이스팀이니만큼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의가 너무나도 많았었다. 회의는 주로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서 '그 과제에 대한 내 생각은 이러저러하고 그 이유는 이러저러하며, 그래서 당신의 주장은 이렇고저래서 맞지 않으니 내 생각이 맞다' 로 이어지는 논쟁이라고 보면 된다. 신입사원은 끝없이 돌아가는 회의 속에서 어떤 절망을 겪고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기게 된다.
'차라리 국어사전을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단어만큼 생각이 갇히는 느낌ㅠㅠ'
나의 첫 신입시절을 통과한 소견은 내가 이렇게 어휘력이 부족했나! 라는 통탄이였다.
선배들과 팀장님 뿐만아니라 제작팀을 이끄는 제작시디님과 회의를 하면 할 수록 그들이 표현하는 단어가 얼마나 다채롭고도 풍부한지,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저렇게 생각도 할 수 있다고?에서부터 와 저런 표현을 쓴다고? 의 감탄으로 이어지곤 했다. 머릿속 어디인가에 쳐박혀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쓰는 생각과 말 속에서 다채롭게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뇌를 최대치로 활발하게 쓰는 느낌이랄까. 쓰는 어휘가 부족하니 생각도 마음껏 나오지 못하는 기분이였다. 그래서 '나도 다채로운 단어를 써야지' 라는 마음으로 회의에서 나온 단어들을 줍줍해서 따라 써보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한 나의 필살기.
실제로 네이버 국어사전을 열어보고 생각을 펼치는 연습을 했다. 예를들어 'ㅇㅇ'의 단어를 검색하고는 유의어, 반의어, 활용예시 등을 살펴보는 식이다. (이 방법은 실질적으로 유용해서 추천한다) 마치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처럼 말이다. 외국어를 말할 때 풍부한 어휘를 모르면 나의 실제 생각들이 제대로 표현이 안되고, 전하고 싶은 의미에서 여러가지가 생략되어 단촐해질 수 밖에 없지 않나. 이정도의 문제만 되어도 아쉬운 정도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적은 단어밖에 모르면 생각도 딱 그만큼 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갇히게 된다' '그 이상은 하지 못한다'
단어는 하나의 관점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어떤 맥주가 '맛있다'에서 출발하게 되면
'맛있으니까 드세요'의 맥락으로 설득이 시작되거나 혹은 '무진장 ~하게 맛있어요' 라고 형용을 해보거나, '다른맥주는 맛없고 이 맥주가 맛있지' 의 흑백으로 선을 긋는 생각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맥주가 '맛깔스럽다'로 출발하게되면, 바로 무엇이 연상되는가. 어떤 순간에서 그 맥주가 얼만큼 더 맛있어 질 수 있을지가 상상이 되면서 그것이 놓여진 상황과 맥락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달린 후에 마시는 맥주는 기가 막힌다.' 이런 생각까지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다.
아주 가벼운 예시이고, 물론 맛있다에서 생각의 줄기를 무한대로 뻗쳐서 '언제, 어떤 상황에 더 맛있지?' 하며 그 지점까지 다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가지 단어가 어떤 생각의 출발을 쉽게 도울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연히 정답같은건 없다. 그냥 더 많은 단어는 더 많은 관점을 도울 수 있다는 것 뿐.
신입사원은 그런 두려운 상황을 경계하며.
늘 회의 전에는 맛있다를 검색해 맛깔스럽다, 먹음직스럽다, 존맛탱 등 이런 여러 표형양태를 살피며 좀 더 그럴싸한 표현을 찾곤 했다. 맛있는 것과 먹음직한 것이 의미하는 것이 차원이 다르며, 먹음직함에서 부터 시작되는 아이디어는 더욱 더 다른길로 가게 되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