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의 황제에게 사랑받은 기괴한 초상화
빈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에는 정말 유명한 그림이 많습니다. 박물관의 역사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에서 유래한 만큼 정말 대단한 회화 컬렉션을 가지고 있고, 다른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그림들이 있어요. 특히 미술책에서 보았던 과일과 꽃 등으로 얼굴을 묘사한 특이한 인물 그림은 이 박물관의 자랑입니다. 독창성이 독보적인 그림이라 쉽게 잊히지 않는 그림이지요.
바로 이 그림입니다~!!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1527~1593)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화가예요. 이때까지의 미술사에서 이와 비슷한 그림은 없었습니다. 이런 류의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지요. 주세페 아르침볼도는 과일과 꽃 등 자연을 소재로 사계절을 표현하는 초상화를 그렸어요. 그는 식물뿐만 아니라 부엌용품, 책, 포유류, 양서류, 어류 등을 소재로도 인물을 그려냈어요. 저는 꽃과 과일로 그린 인물화 까지는 참신하다는 생각에 자세히 들여다보며 작가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 이외의 소재로 얼굴을 표현한 그림들을 보면서는 기괴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 화가는 도대체 왜 이렇게 이상한 도전을 계속했을까요. 주변사람들에게 그림이 좋다는 찬사를 계속 받았으니 지속적으로 그려내지 않았을까요. 누가 그에게 큰 용기를 줬을지가 궁금했습니다.
화가의 아버지는 밀라노 지역의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프레스코화를 디자인하는 예술가였습니다. 밀라노 대성당 작업을 했다고 해요. 주세페도 아버지에게 배우며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테피스트리, 문장과 배너 장식을 만드는 등 다양한 파트의 장식미술 예술가로 경력을 쌓았지요. 그가 초기에 그린 종교화는 특별히 주목받지는 못하였지만 그림 실력이 뛰어나고 스케일 또한 대단하여 그 지역에서는 인정받았습니다. 운 좋게도 그는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력파였습니다. 1550년대부터 1580년대 사이에 그가 상세하게 묘사한 새와 포유류 그림이 수백 점에 달합니다.
주세페는 35세인 1562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1503~1564)의 궁정 초상화가로 발탁되었어요. 당시 비엔나에는 궁정에 소속된 화가도 많았고 주세페 외에도 이탈리아 출신 화가가 여럿 있었기에 그의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황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연을 소재로 한 특이한 초상화 때문이었지요. 밀라노에서 처음 그리기 시작한 이후 40여 년간 이 시리즈로 작업을 했습니다.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정물화가 혼재된 이 그림에는 그가 늘 연구하던 학문과 자연과학, 해부학등이 내포되었고, 엄선된 소재들은 황제에 대한 존귀와 영광의 의미를 담고 있었어요. 특히 인기 있던 <사계> 시리즈는 주문 제작되어 복사본도 여러 점 남아 있습니다.
주세페는 페르디난트 1세가 서거하면서 왕위를 물려받은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 (Maximilian II, Holy Roman Emperor, 1527~1576)에게 <The Four Seasons 사계, 1563> 시리즈와 <The Four Elements 네 가지 원소, 1566> 시리즈를 1569년에 헌정합니다. 공기, 불, 흙, 물로 구성되어 있는 <네 가지 원소>는 초상화라는 의미가 퇴색할 만큼 얼굴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그는 더욱 인정받았습니다.
사계 중 <여름>은 대상을 풍요롭게 표현하여 기분 좋은 그림이에요. 볼은 복숭아, 코는 오이, 입술은 앵두, 치아는 완두콩으로 표현하였고 옥수수는 해외에서 들여온 수입 작물로 귀하게 여겨졌고 이런 소재의 사용은 황제의 위엄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서명은 옷깃에 담았고 제작연도는 어깨에 센스 있게 표시했어요. 현대 패션 디자인으로도 손색이 없네요.
<겨울> 작품 속 인물은 마치 무덤 속에서 관을 열고 걸어 나온듯한 기괴한 모습의 초상화예요. 뼈가 드러나는 골격과 목선, 버섯으로 표현한 입술, 생강뿌리 같은 잔뿌리들, 마른듯한 아이비 잎들로 머리숱을 표현했고, 레몬가지가 가슴에서 삐져나와 있습니다. 소재 각각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다지 보기 좋은 그림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황제는 자신을 표현한 <겨울> 초상화가 흡족했으니 선물로 받았겠지요? 황제는 주세페에게 예술 전반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였고 대관식, 결혼식, 가면무도회등 각종 연회와 축제를 위한 황제의 의상 디자인과 무대 연출을 맡겼습니다.
그가 모신 세 번째 황제 루돌프 2세 (Rudolf II, Holy Roman Emperor, 1552~1612)는 1576년 왕위에 오른 뒤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심지를 빈에서 프라하로 옮겼습니다. 황제는 자연과 의학에 열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이자 계몽된 예술과, 열정적인 수집가였어요. 그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백과사전을 만들고자 과학자와 예술가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입니다. 이에 주세페는 초상 화가를 넘어서 예술품, 골동품, 자연과학 사료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지요. 또한 왕궁의 정원에는 황제의 열정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신대륙 등지에서 구해온 희귀 동식물이 많이 있었고, 주세페는 이들을 상세하게 묘사해서 기록으로 남겼어요.
60세까지 쉼 없이 활약한 주세페는 명예로운 작별을 청합니다. 노후는 자신의 고향인 밀라노로 돌아가서 지내겠다고 루돌프 2세에게 허락을 구하며 청색 잉크로 그린 드로잉 150여 점을 선물했어요. 1587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황제를 위하여 이태리 예술품 수집을 지속하였고, 황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려 프라하로 보냈습니다. 황제를 고대 로마의 사계절을 관장하는 과수원의 신 베르툼누스로 묘사한 그림과 여신 플로라 초상화 두 점으로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루돌프 2세 때 프라하에 남겨진 주세페 작품 중 일부는 30년 전쟁 중이던 1648년 스웨덴이 프라하를 침공하였을 때 도난당하여 현재까지 스웨덴에 여러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특이한 초상화는 황제들의 사랑에 힘입어 인기 있는 장르가 되었고, 주세페 이후에도 여러 작가들이 응용하여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로 발전시킵니다. 항상 처음 시작이 어렵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만, 일단 자리 잡으면 쉽게 익숙해지는 거 같아요. 주세페는 끊임없는 시도를 하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일단 주제를 잡은 후에 동식물 혹은 사물을 소재로 나열하고 배치하며 인물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정말 연구를 많이 했을 거 같아요. 그림의 위아래를 거꾸로 뒤집어야 초상화로 보이는 정물화 시리즈도 재미있는데 비엔나에는 소장되어 있지는 않았어요. 거꾸로 보는 거까지 계산하다니, 새로운 생각과 시도가 수백 년이 지났어도 독보적입니다. 16세기 그림이지만 수세기가 지난 지금 현대미술이라고 내놓아도 손색없을 듯하네요.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는 몇 작가를 더 소개할까 합니다.
P.S. 박물관의 자랑인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전시실 이곳저곳을 아무리 둘러봐도 안보였어요. 이미 관람 티켓을 23유로 지불하고 입장했지만, 이 그림을 보려면 특별 기획전시실 입구에서 추가로 5유로 티켓을 구매해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비엔나는 티켓에 진심입니다^^ (2025년 5월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