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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Nice에 위치한 샤갈 미술관

마르크 샤갈 국립 미술관 (Marc Chagall National Mus

by my golden age


꿈속인듯한 환상적인 그림을 남긴 샤갈의 미술관이라니, 오랜 시간 이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한 니스예요. 딸이 아주 어렸을 때 함께 잠시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런 미술관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니스해변의 자갈은 여전히 동글동글한 것이, 20여 년 전이 생각나는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석양이 아름다운 니스의 바다는 프랑스어로는 코트다쥐르 (Côte d'Azur) 혹은 프랑스 리비에라 (French Riviera)라 불립니다. 작은 도시 니스의 중앙쯤 제법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마르크 샤갈 국립 미술관 (Marc Chagall National Museum)은 특이하게도 화가의 생전에 개관한 미술관입니다. 샤갈은 1969년에 프랑스 정부에 자신의 <성서 시리즈>를 기증하였고 이에 문화부 장관은 샤갈 미술관 건립을 결정하며 1973년 7월 7일, 샤갈의 87세 생일에 맞춰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이후 샤갈은 198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미술관의 기획에 함께 한 의미 있는 장소이지요.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나지막하게 단층으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을 바라보며 정원을 지나가게 됩니다. 프랑스 건축가 André Hermant (앙드레 에르망, 1908-1978)의 작품인 미술관 건물은 시멘트 재질로 지어져 최근 작품으로 보일 정도로 현대적입니다. 미술관에 들어가면 아기자기한 샤갈 그림이 가득 걸려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 큰 대작들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어서 일단 놀랐습니다.


이 그림들은 샤갈이 1956년부터 10여 년간 작업한 성서 내용을 담은 시리즈예요. 성서의 구약에 나오는 창세기 출애굽기의 스토리 12 작품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건축가와 샤갈의 긴밀한 협력을 보여주듯 메인 갤러리에는 12개의 벽이 있고, 벽마다 그림 한 점씩 걸려있어요. 그림은 2-3미터 정도의 대형사이즈로 샤갈의 작은 그림만 봐왔어서 스케일에 놀랐습니다. 그림은 성서의 순서와 상관없이 배치되어 있어요. 마치 물속인 듯 숲 속인 듯 청록색을 많이 사용해서 몽환적으로 표현했어요. 계획된 자연채광으로 천장에서 조용하게 내려오는 빛은 그림의 신비감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줍니다.



화려한 색상을 사용하고 예쁜 그림만 그려서 인생도 행복했을 거 같은 샤갈의 현실은 전혀 동화 같지 않았어요. 샤갈은 1887년 현재의 벨라루스 공화국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의 도시 비쳅스크 (Vitebsk)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당시의 러시아계 유대인 역시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았지요. 1906년 샤갈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으나 유대인은 정규교육도 받을 수 없었고 통행에도 제한이 있었어요. 샤갈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미술을 공부했고 1910년에는 큰 포부를 안고 파리로 떠납니다.


이후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곳에 두고 온 약혼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어요. 동화같이 아름다운 그림은 사실 그리움에 사묻힌 표현이었어요. 그는 약혼녀 벨라와 결혼하기 위하여 잠시 비쳅스크로 돌아갔으나 며칠 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러시아 국경이 폐쇄되었고, 그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까지는 8년이나 걸리게 됩니다. 파리에 돌아왔을 때에 그가 이전에 작업하고 전시했던 그림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어요.


모세와 불타는 부시 1960-1966
아브라함과 세천사 1960-1966
이삭의 희생 1960-1966


아내와 함께 파리에 정착한 후에는 새로운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하고 여행을 많이 했어요. 프랑스 남부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풍부한 녹색을 보았고, 네덜란드에서는 늦은 오후의 빛을 발견하고, 이탈리아에서는 생생한 햇살을, 그리고 이집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여행하며 <라 퐁텐의 우화>를 포함하여 많은 작품을 쏟아내었고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방문하여 두 달 동안 머무르면서는 언어가 통하여 편안함을 느끼고 성지를 다니며 감동을 받았어요. 그는 1931년에서 1934년 사이에 성경 삽화 작업에 몰두합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성경 교육을 엄격하게 받고 종교 자체가 생활이기도 하지요. 샤갈은 성경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의 원천이라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시간도 잠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며 동시대의 많은 미술가의 작품을 <퇴폐 미술>로 선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샤갈도 그 대상이 됩니다. 샤갈은 프랑스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위험한 상황임을 뒤늦게 인지했지만, 뉴욕으로 망명하기에는 자금 등의 준비가 안되었고 정세는 급격하게 안 좋아졌어요. 다행스럽게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미국이 구출해야 하는 위험에 처한 저명한 예술가 명단”에 샤갈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게 되고 마르세유의 호텔에서 체포되며 극한 상황에 처하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리스본에서 선박을 타고 유럽을 벗어날 수 있었어요.


마크 샤갈 박물관을 위해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불의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구약 성서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선지자 엘리야 The Prophet Elijah 1971


뉴욕에 도착했을 때 샤갈의 그림은 이미 미국에서 유명했어요. 그러나 언어도 안 통하고 계속 들려오는 제2차 세계대전 소식으로 슬픔에 잠깁니다. 아름다운 고향 비쳅스크는 파괴되었고, 나치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도 듣게 됩니다. 당시 홀로코스트로 살해된 벨라루스계 유대인은 246,000명으로 벨라루스계 유대인 인구 전체의 66%를 차지했어요. 같은 민족이 살상당하는 현실에서 샤갈의 마음은 그림으로 표현됩니다.


오디토리엄, 창세기를 표현한 스테인글라스


그렇게 피난 생활을 하던 중인 1944년 9월 아내 벨라는 갑작스러운 감염병으로 발병 3일 만에 사망합니다. 전쟁 중이라 페니실린의 부족으로 치료도 못해보고 떠나보내며 그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아내를 잃은 상실감으로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요. 마침내 전쟁은 종료되었고 샤갈은 1947년에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그는 더욱 유명해졌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재혼도하고 98세까지 건강하게 살았지만 과거의 일들이 없던 일처럼 잊히지는 않았겠지요.



메인 갤러리를 지나면 작은 방으로 연결되고 그곳에는 붉은색의 대형 그림 5점이 빙 둘러 걸려있어요. 역시 구약성서 아가서를 표현한 그림입니다. 아가서는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쓴 “노래 중의 노래"로 결혼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하나님과 백성 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비유한 서사시예요. 혹시 샤갈은 고통을 승화하여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요. 아름다운 표현을 역으로 그의 고통스러운 인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가서 I 1960
아가서 II 1957


유대교는 기독교와 다르게 메시아 예수가 오기 이전의 역사인 구약만 인정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믿는데, 그런 정통 유대인인 샤갈이 기독교의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과 부활에 대한 그림도 그렸습니다. 그가 유대교를 버렸다기보다는 아마도 종교를 초월한 거 같아요.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며 예수님과 십자가를 바라본 게 아닐까, 그리스도 예수는 그가 갈망하던 평화의 상징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상처와 고뇌는 역설적으로 동화처럼 아름답게 예쁘게 그려졌어요. 다음 그림들은 예수님을 도구로 쓴 그림들이에요. 감상하세요.


저항 Resistance 1937-1948 하얀 십자가형 Crucifixion blanche 1938
부활 Resurrection 1937-1948 해방 Liberation 1937-1952
출애굽 Exodus 1952 -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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