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레제와 그의 후배들
파리에 위치한 룩셈부르크 미술관 (Musée du Luxembourg)은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1800년대에는 현존하는 작가의 미술품만 전시한다는 차별성을 가지고 운영된 최초의 미술관이었어요. 그 시대에 그런 현대적인 마인드로 차별화된 콘셉트를 잡았다니 놀랍지 않나요. 작가 사후에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적합한 미술관으로 작품의 거처를 옮겼습니다. 근대에는 파리의 대표 미술관의 소장품을 시대별로 분류하며 작품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지는 혼란기를 겪었지요. 룩셈부르크 미술관은 메이저 미술관들에 치여 정체성을 잃고 있다가 1979년에 재개관하며 이번에도 확실한 콘셉트로 차별화시킵니다. 20세기의 근대작품과 사진작품, 특히 여성 예술가를 주제로 매년 두 차례 이상 전시를 개최하는 현대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파리에는 유명한 미술관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여행자인 저의 발길이 이곳에 닿기까지는 오래 걸렸어요. 올해 이곳을 처음 방문하면서 뜻밖의 예술가를 만났습니다.
<Tous Léger!>라는 제목의 전시는 강렬한 색상을 쓴 여성의 초상화 작품으로 티켓과 포스터가 제작되었어요. 이목을 끄는 강한 그림이지요? 두 그림은 나란히 걸려있었습니다.
제게 이 전시는 꽤나 새롭고도 난해했습니다. 앤디 워홀 (Andy Warhol, 1928-1987)을 시작으로 한 미국의 팝아트 역사에 익숙한 저에게 동시대 프랑스의 현대미술은 낯설었습니다. 작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살펴보니 처음 보는 작가도 있고 들어본 작가도 있었습니다. 공통분모를 알 수 없는 여러 작가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작품을 배치해 두니 각자의 개성이 너무나 강해서 어우러지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이 난해함의 중심에는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가 있었습니다.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페르낭 레제의 회고전이었어요. 전시 감상한 후에 여운은 오래갔습니다. 이 전시에서 레제의 작품을 시대별로 주제별로 다양하게 접하고 나니, 이후에 방문하는 미술관마다 레제의 작품을 비중 있게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전시였지요. 이곳에서 레제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레제 이후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30여 명이 그의 작품과 함께 했습니다. 모두 다 레제와 인연이 있는 작가들이었어요.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는 회화작업을 기본으로 조각, 도예, 영화감독, 무대 디자인까지 폭넓은 활동을 한 프랑스 예술가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 Caen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00년에 파리에 정착하면서 도시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매료되어 설계도 대신 캔버스를 선택하게 됩니다. 초기의 작품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대부분 다 파기했는데, 아마도 구상작품을 그리지 않았을까요. 방황하던 그는 1907년 세잔의 회고전에서 그의 예술 인생에 결정적인 영감을 얻게 됩니다. 세잔은 후기 작품에서 자연의 모든 사물을 원기둥, 원뿔, 구와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보며 탐구했지요. 같은 해에 피카소와 브라크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입체파 작품을 접하면서 레제도 입체파(Cubism)에 이끌리어 원통형을 많이 사용하는 개성 있는 작품활동을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는 그의 삶이 이해가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는 기계에 빠져듭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1940-1945) 프랑스로 복귀하며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지요. 그는 노동, 산업화, 기계화를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어요. 아름답거나 예쁜 그림은 아니에요. 그 시대의 평범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 의지가 보입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응원하는 듯 표현이 강하고 힘이 들어간 그림이지요.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같은 모더니즘 미술을 발전시키고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페르낭 레제는 그의 후배 작가들에게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레제의 예술을 이어가는 후배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이들은 누보 레알리즘 (신사실주의 Nouveau réalisme)을 따른 예술가들입니다. 누보 레알리즘은 추상화에 반대하며 사회 현실을 묘사하는 예술운동으로 1940년대에 처음 등장 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을 과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평범한 사물도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모여 시작되었어요. 미술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 (Pierre Restany, 1930-2003)가 선언문을 작성하고 이브 클랭 (Yves Klein)이 출판하며 공식화됩니다. 특히 산업 사회에서의 과소비를 비판하며 물건을 재활용해서 작업하는 것이 신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이에요. 어쩐지 전시를 보면서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버리는 물건, 못쓰게 된 자동차, 콘크리트, 금속 등 소재의 다양성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들은 나무나 돌과 같은 천연 재료는 고귀하다고 생각하여 배제하고, 산업화로 사용되던 소재들을 사용했습니다.
아르망 (Arman, 1928-2005), 세자르 (César Baldaccini, 1921-1998), 레이몽 앵스 (Raymond Hains, 1926-2005), 이브 클랭 (Yves Klein, 1928-1962), 마르샬 레스 (Martial Raysse 1936-),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장 팅겔리(Jean Tinguely, 1925-1991, 스위스) 등이 누보 레알리즘을 지지했어요. 피에르 레스타니, 이브 클랭, 아르망 등이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파리학파와 차별화하여 니스를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남부를 여행하면서 이들의 작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던 이유였네요.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은 삶에서 예술을 찾고자 했습니다. 어떤 대상이든 그 자체로 표현될 수 있고, 그것을 예술로 생각했습니다. 아르망은 악기, 시계, 폐기물 같은 물건들을 주워다가 작품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레이몽 앵스는 도시 담벼락에서 광고 포스터를 뜯어서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콜라주로 재탄생시켰지요. 장 팅겔리는 쓸모없는 기계들로 기계화된 산업화를 비판했고, 세자르는 자동차 잔해를 압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각각의 개성이 강하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하나였지요.
레제의 그림은 뉴욕에서 발전한 팝아트와 다다이즘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팝아트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과 로버트 인디애나 (Robert Indiana), 그리고 소속을 분류하기 어려운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작품도 레제의 작품과 페어링 되어 전시되었어요. 키스 해링은 레제의 그림에서 영감 받아 대상에 검은 테두리를 넣게 되었다고 했어요.
레제가 어떻게 팝아트의 선구자이지, 그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자극적이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전시였어요. 이 전시는 2024년 5월 15일부터 2025년 2월 16일까지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18km 떨어진 작은 마을 비오(Biot)에 위치한 국립 페르낭 레제 박물관(Musée National Fernand Léger, Biot)에서 <Léger et les Nouveaux Réalismes>라는 제목으로 먼저 전시되었고, 이후 파리의 룩셈부르크 미술관 (Musée du Luxembourg)에서 다시 전시가 되었어요. 저는 프랑스 남부 니스를 방문하면서 국립 페르낭 레제 박물관(Musée National Fernand Léger, Biot)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다음 편에 그곳을 소개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