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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 Biot의 페르낭 레제 미술관

Fernand Léger National Museum

by my golden age

프랑스 니스에 일주일 머무르면서 주변의 미술관들을 방문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한 곳만 다녔기 때문에 이동 반경이 넓지는 않았지만 일주일이 모자랄 정도였어요. 샤갈, 마티스, 피카소, 르누아르 등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작업실과 미술관을 방문하는 동선을 짜면서 사실 페르낭 레제 국립 미술관 (Musée National Fernand Léger)은 갈까 말까 망설이게 되었어요. 이때까지 저에게 레제는 낯설었거든요. 그러나 니스 중심가에서 18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안 가기도 뭐 하고, 또 하나는 단일 작가의 공간을 <국립 미술관>으로 관리한다는 점이 호기심을 불렀습니다. 물론 앞의 글에서 소개한 파리의 룩셈부르크 미술관에서 만난 레제의 회고전이 가장 큰 이유였지요.


미술관이 위치한 비오(Biot) 까지는 니스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바다를 왼쪽에 두고 5 정거장을 지나 20여 분 만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차 후 2km를 떨어진 미술관은 도보 30여분 혹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됩니다. 미술관은 조용한 마을에 위치해 있었어요.


1955년 레제는 비오에서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마스 생 앙드레(Mas Saint André)라는 빌라를 매입했습니다. 집과 작업실을 건축하려고 구입했으나 작가는 몇 주 후에 사망하게 되지요. 미망인은 이곳에 레제를 기념하는 미술관을 건축하고 1960년에 개관하게 됩니다. 개관식에는 피카소, 샤갈, 브라크 등 여러 화가들이 참석했다고 해요.


페르낭 레제 국립 미술관은 약 350여 점의 레제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신인상주의로 시작한 초기 작품부터 1950년대의 주요 작품까지 회화뿐만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도자기 등 그의 예술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어요.


미술관에 도착하면 화려한 색상으로 장식된 건물 외관을 보면서, 안 와보면 안 되는 곳이었구나! 바로 느끼게 됩니다. 건물 전면의 모자이크 작품은 레제가 의뢰받았던 하노버 경기장 (Hanover stadium)을 위한 디자인으로 기구와 자전거 같은 스포츠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레제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던 작품이지요.


전면 스포츠 모티브 확대



미술관 안팎에서 다른 뛰어난 예술가들의 손을 빌어 완성한 레제의 작품들을 대형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등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예술품과 건축물의 일체화가 느껴집니다.



페르낭 레제 (Fernand Léger, 1881-1955)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그의 인생 키워드를 나열해 보면, 건축, 파리, 세잔, 입체파, 화려한 색상, 세계대전, 기계, 미국생활, 산업화, 공산당, 노동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레제는 회화 작업에 어려움을 겪던 중인 1907년, 세잔의 전시에서 큰 영감을 받고 이전에 작업한 회화 작품을 전부 파기했어요.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은 볼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서 그의 초기 회화 세 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풍경화는 목사님에게 선물해서 남겨질 수 있었어요. 본인 마음에는 흡족하지 않았겠지만, 역시 잘 그렸네요. 당시의 흐름대로 인상파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왼쪽 <삼촌의 초상화, 1905> 위 <아작시오 요새, 1907> 아래 <André Mare의 이동, 1904>


그 후 레제는 입체파에 빠져들며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게 되었고, 1912년에 제작된 아래의 두 작품에서는 개성이 보이기 시작하며 그의 회화가 어떻게 변모해 갈지 기대감을 줍니다.


아래 <1914년 7월 14일>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의 작품으로 형태와 색채가 좀 더 안정감을 주지요.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기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특히 레제의 입체파는 기계적인 요소에서 따온 것으로 보여서 튜비즘(Tubism)으로 구별되기도 합니다. 그는 산업화되어 가는 도시와 기계의 조합을 찬양하며 신사실주의를 따라갑니다. 그가 지향한 신사실주의는 1960년대의 누오 레알리즘과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후배 예술가들의 누오 레알리즘은 산업화와 소비사회를 비판하며 시작했지요.


<파리의 지붕, 1912> <푸른 옷을 입은 여자를 위한 스케치, 1912>
<1914년 7월 14일, 1914>


레제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활동하고 돌아오면서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합니다. 노동과 평등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작품에 노동현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검은색으로 보여주는 음영과 테두리,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인간을 표현하여 감정이 배제된 듯 무표정하고 경직되어 보입니다. 언뜻 보면 공산국가의 포스터 같기도 해요. 레제는 강렬한 색을 형태와 경계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사용하고, 자전거, 다이빙, 캠핑 등 일상의 생활을 예술로 표현하였어요. 점점 더 검은색 윤곽선을 사용하여 형태와 색상을 강조하고 분리하는 특징을 보이지요.


<점심식사, 1921> <나무아래, 1921>


위 <네 명의 자전거 타는 사람, 1943-1948> 아래 <붉은 배경의 여가 활동, 1949>


<푸른 배경의 건축자들, 1950>

레제는 도예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고자 1949년 남부의 비오 (Biot)로 이주하였어요. 근방에 유명한 도자기 마을이 있어서 후배 롤랑 브라이스 (Roland Brice)의 도움을 받으며 도예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도자기로 구워낸 부조 작품이 많이 있었고 미술관 정원에서도 대형 조각들을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마침내 비오에 정착하여 노후를 보내기로 결심하고 토지를 매입하였는데,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위 왼쪽 <새와 함께 있는 아이, 1953> 아래 <풍경 속의 새들, 1955>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들, 1951>



레제는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교회등 성스러운 장소에서 예술 작업을 했고, 뉴욕의 UN 본부, 그리고 여러 대학교 등에서 의뢰받아 공공 작업을 했습니다. 미술관에서 그곳들의 디자인 스케치와 완성된 작품들을 사진으로 나마 볼 수 있게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위) Plateau d'Assy에 있는 Notre-Dame de Toute Grace 교회 모자이크 모델, 1947 (아래) 바스토뉴 마르다송에 건립된 납골당 모형, 1949


인상주의 말기에 태어난 그는 현대로 넘어가는 브릿지 역할을 하며 현대 미술에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았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을 한 공간에서 살펴보니 이렇게 위대한 작가를 너무 늦게 알게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날씨가 덥길래 역까지 걸어가기를 포기하고 우버를 호출했습니다. 택시에 탑승했는데 기사님이 한국분이셨어요. 서로 놀랐습니다. 이런 외딴곳에서 한국분을 만나다니. 기사님도 우리에게 이 미술관까지 어떻게 찾아왔냐며 신기해하셨어요. 샤갈이나 마티스만큼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레제 미술관은 놓치지 마시길 바라보며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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