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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마티스와 그의 딸 마르그리트: Through Her Fath

by my golden age


위대한 예술가, 마티스. 그가 일찍이 후원받았던 러시아 부호와의 관계로 러시아에 대거 남겨진 대작들과 그가 선택한 도시 니스에서 30여 년을 보내며 남긴 작품들을 살펴보며 마티스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어요


마티스의 예술사랑은 대를 이어 자녀들도 그림을 그렸지요. 장녀 마르그리트는 전쟁으로 시골에 갇혀있을 때인 1914년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특히 차남 피에르는 그림도 그렸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수많은 유럽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도피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유럽 작가들을 미국에 소개하고 널리 알린 미술상으로 높이 평가받습니다.


<마티스 자녀들의 작품이에요>

(왼쪽) Marguerite Matisse, Self-Portrait, 1915 (오른쪽) 1915-1916
(왼쪽) Marguerite Matisse, Still Life with Bottle, 1925 (오른쪽) Nice, 1925
차남 Pierre Matisse, Marguerite Asleep, 1921
차남 Pierre Matisse, Portrait de Marguerite, 1922
Marguerite Matisse, Amelie in the Garden, 1916


부족한 거 없이 편안하고 완벽한 삶을 산 듯 보이는 마티스. 그는 젊을 때 빨리 인정받아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했고, 좋아하는 여행도 마음껏 다니며 영감을 얻고 작품활동을 했지요. 말년에는 병을 얻었지만 꽤 장수하였고 투병 중에도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예술사에 큰 별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예술가 마티스에게도 인간적이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파리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Paris)에서 열린 기획전 <Matisse and Marguerite: Through Her Father's Eyes>을 보면서 알게 되었어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던 그의 장녀 마르그리트 (Marguerite Émilienne Matisse 1894-1982)를 모델로 그린 백여 점의 작품을 통하여 마티스 인생의 한 부분이 새롭게 조명되는 매우 흥미로운 전시였습니다.


마티스는 다른 어떤 모델보다도 마르그리트를 많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마르그리트가 성장하는 모습을 때마다 남겼고, 성장 후에는 다른 모델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모습으로 남겼어요. 풍경화 속에서도 딸이 숨바꼭질하듯 숨겨져 있어요.




그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딸은 늘 아버지 곁에 있었고, 아버지는 딸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딸의 어머니는 마티스의 모델 중 한 명으로 “카미유"(Caroline Joblau, 1872-1954)라는 애칭으로 활동하였어요.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1897년에서야 마티스의 자식으로 인정받게 되고, 마티스는 1898년에 아멜리(Amélie Noellie Parayre)와 결혼하며 마르그리트를 함께 키웁니다. 이후 아들 장(Jean, 1899년생)과 피에르 (Pierre, 1900-1989)를 연년생으로 낳아 다섯 식구가 되지요. 다섯 식구는 행복했습니다.


Matisse Family, 1911
Matisse Family, 1911, 왼쪽뒤가 마르그리트
Marguerite at Etretat, 1920 아래왼쪽이 딸 마르그리트


마르그리트는 일곱 살이던 1901년 호흡기 감염병인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생사를 오갔습니다. 몸이 쇠약해져 있던 어느 날 아이는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어 질식할 상황에 처했고, 마티스가 아이를 부엌 식탁에 눕혀서 붙잡고 응급으로 기관 절개술이 시행되었어요. 얼마나 급박했을까요. 다행히도 마르그리트의 목숨은 건졌지만 목에는 흉터가 남게 되었어요. 딸은 항상 리본이나 스카프로 흉터를 숨겼고, 아빠도 그림 속에서 딸의 흉터를 숨겨주었어요.


Henri Matisse, Marguerite, 1901-1906
Henri Matisse, Portrait de Marguerite, 1906 여름


그림 속의 마르그리트는 늘 책을 보거나 고양이를 안고 있으며,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하였어요. 아이는 몸이 쇠약해서 학교를 잘 가지 못했고 늘 아빠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지요. 마르그리트는 아버지의 작품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회화, 드로잉, 조각, 심지어 도자기 에도. 특히 검은 고양이와 함께 있는 딸의 초상화는 절대 판매하지 않고 간직했어요.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지요. 20대 중반인 1920년 정도 되어서야 흉터가 아물었는지 그림 속에서 더 이상 목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위 왼쪽) 1906-1907 (위 오른쪽) 1910 (아래) 1906
(왼쪽) 1906-07 (오른쪽) 1906


마르그리트는 예술 평론가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 아멜리와 함께 레지스탕스 (French Resistance)에 가입하여 독일에 저항운동을 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이들이 레지스탕스에 가입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아멜리는 마티스가 젊은 러시아 이민자 델렉토르스카야와 불륜 관계에 있다고 의심하여 ​​1939년에 재산을 동등하게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아멜리는 그렇다 치고, 딸은 출가한 이후였으니 마티스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겠지요. 아멜리가 먼저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되는 징역형을 받았고, 마르그리트도 1944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죽을 정도의 고문을 당하고 독일의 수용소로 보내지는 중에 열차에서 탈출하며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어요.


(위) 1920 (아래) 두그림 다 1918


마티스는 1940년 6월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파리에 있었지만 니스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당시 뉴욕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그의 차남 피에르는 마티스에게 가능한 한 빨리 미국으로 망명하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마티스는 우선 브라질로 피할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접고 니스에 남았습니다. 그는 모두가 프랑스를 떠난다면 프랑스에는 누가 남겠냐며 어른으로써의 사명감을 가지고 고국을 지켰고 그의 결정은 프랑스인에게 큰 위로가 되었어요. 얼마못가 1943년 니스도 독일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면서 그는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방스(Vence)로 이사하여 1949년까지 머물렀습니다.


1945년 죽음의 공포를 넘긴 오십 넘은 딸이 방스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티스는 두어 점의 딸 초상화를 더 남깁니다.


Marguerite at Vence, 1945


마르그리트의 초상화에서도 마티스의 다양한 시도를 볼 수 있지요. 큐비즘 (입체주의)과 포비즘 (야수파)도 보입니다.

어린소녀와 인테리어 1905-1906 (부분 확대)
마르그리트의 초상화, 1914-1915


여러 모델과 함께 있어도 아빠의 눈에는 딸만 보였겠지요?

The Moorish screen, 1921

이런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에게 박수를 보내며

저도 울딸 뒷모습을 남겨봅니다.


Le Thé (Tea),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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