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리 미술관을 다니는가?
우리 가족의 삶의 일부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키워드인 미술공부와 여행, 그리고 딸의 유학생활에 대한 경험을 남길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하며 조금 긴 서론을 남긴다.
미술 비전공자가 감히 미술에 관한 책을 쓰게 된 데는 오십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마음이 크다. 대학교 때 한참 위의 선배들의 홈커밍데이를 축하해 주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저분들은 어떻게 저렇게 나이가 많이 드셨을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나는 저 선배들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후배들을 대할 수 있을까 상상하던 나의 모습이 어제 일 같은데 곧 내가 후배들의 축하를 받아야 하는 그날이 다가온 거다.
경영학과를 다니긴 했으나 그야말로 다닌 거였고, 주로 미술대학의 교양과목을 찾아다니며 학점을 채웠다.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있다는데 지금처럼 인터넷 써치가 가능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미술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정보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에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며 다음생을 기약했다. 차선책으로 경영학 전공을 나름 최대한 변형시키어 패션 머천다이징을 조금 더 공부하였다. 서른 살에 한국에 귀국하면서 패션업계에서 나의 본투비 DNA를 살릴 수 있었고, 해외 브랜드 바잉 MD로 일하며 때마다 철마다 나가는 해외출장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의식주의 트렌드를 먼저 느끼며 일하는 것은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잘 맞는 직업이라서 행복하게 일했지만, 늘 미술을 전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갈망이 있었던 거 같다.
틈틈이 미술관, 갤러리와 아트페어를 찾아다니며 관심을 가지고 많이 보다 보니 저절로 국내미술과 해외 작가들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었고 쌓여갔다. 어릴 때는 미술학원 다니던 시간이 제일 신났었고 칭찬을 받았던 좋은 기억도 있었기에 전공으로 살렸으면 제법 잘했을 거 같다는 자신감도 남아있었다. 뒤늦게 찾은 취미로 유화와 크로키도 꾸준히 해보았는데 작가들의 그림을 보러 다니면서 높아진 나의 눈높이에 비교되는 결과물에서는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다양한 미술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해외 미술관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필수코스라고 방문했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 등의 대형박물관 이외에도 오르세 오랑주리등 이름도 예쁜 미술관들이 있다는 것은 모두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덕분에 해외에 나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짬을 내어 미술관을 다니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관람객도 별로 없는 텅 빈 전시실에서 반고흐의 해바라기를 나 혼자 서서 여유롭게 볼 수 있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인생에는 미술이라는 키워드가 항상 함께 했던 거 같다.
내 인생에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특이점은 딸이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참 젊은 나이에 딸을 얻어 외국에서 혼자 키우는 것은 힘들었지만 운명이려니. 딸 리사는 양가의 DNA가 합쳐지면서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다르고 야무졌다. 처음부터 미대준비를 목표로 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영문학과에 입학을 했으나 1년을 못 채우고 그만두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 이유인즉 셰익스피어랑 안 맞아서 도저히 영문학 전공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빠르게 입시 실패를 인정했다. 딸아이도 나의 영향으로 미술에 끌리었는지 뒤늦게 부랴부랴 준비하여 결국에는 그 셰익스피어의 나라 영국으로 건너가 순수미술을 전공하게 된다. 방향을 바꾸면서 2년 반의 손실이 생겼지만 적성을 찾아가기에 충분히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갈고닦는 데생등의 기초 실력은 절대로 부족했지만 외국의 미대에서는 숙련된 기술력을 오히려 마이너스로 여기기에 나름 순수성이 돋보이는 포트폴리오로 여러 학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흔한 유학생 스토리이다.
그간 나의 오랜 우왕좌왕 경험으로 쌓인 미술 정보로 딸의 적성을 찾아주는 부모의 역할은 비교적 쉬운 의사결정들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학부까지는 부모의 지원이 있었다면, 석사와 인턴, 그리고 취업의 과정은 오로지 본인의 노력이었다고 칭찬하고 싶다. 특히나 철저한 계급사회인 런던에서의 취업은 쉽지 않았다.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 자부하는 영국에서는 학교는 물론이고 회사나 인턴지원서에도 내부에 관련된 지인이 있는지를 적어 내는 공란이 있다. 이는 당연하게 플러스 점수가 되고, 미리 내정이 되어 입사 후에도 서로 공공연하게 당당하게 그 관계를 언급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민감하고 있을 수 없는 차별이다. 그로 인해서 지인이 없는 소위 빽 없는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줄어들게 됨에도 다들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거 같았다. 이 점이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더 이상은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사도 끝까지 최선은 다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애써 쿨한 척 기대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하늘의 섭리대로 마침내 실력으로 인정받아 정직원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 빽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행복하게 즐겁게 일을 하고 있어서 적성 찾기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된듯하고 부모의 역할도 이것으로 일단락된 거 같다.
딸이 런던에서 공부하면서 물만난 물고기는 유학생 엄마인 나 자신이었다. 이때부터는 틈만 나면 런던을 기반으로 유럽 미술관들을 다니며 나의 욕구를 채우게 되었고, 다녀도 다녀도 새로운 미술관을 끊임없이 만나게 되면서 이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다. 국내 미술서적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꿈을 가지게 된 덕분에 시작하게 된 미술관 여행인데 적극적으로 다니다 보니 정보 부족의 아쉬움이 느껴졌다. 기타 지역의 미술관들에 대한 정보를 국내의 서적을 통해서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주로 현지에서 책을 구매하며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즈음에 리사가 석사를 마치고 유서 깊은 경매회사인 소더비에서 일하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고 그 세계를 옆에서 엿보는 기쁨은 다음생을 기약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만족스러웠다. 나도 이끌림을 따라 시행착오를 겪으며 헤매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오십. 이 믿을 수 없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많은 곁가지들을 잘라내고 단순하게 제2의 인생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컸고, 과거 여기저기 미술관들을 다녀본 경험이 나의 내면에 쌓여는 있겠지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아서 아쉽기도 했다. 인간의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모아둔 자료도 정리를 하지 않으면 희미한 안개일 뿐 나의 것이 아니었기에, 좌충우돌의 경험을 정리해 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유럽 대표 도시들의 미술관을 소개하고, 미술작품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을 남기고 싶었다. 미술작품에 숨겨진 스토리들을 파헤치다 보니 어김없는 트라이앵글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품을 빚어낸 위대한 작가, 그 작가의 후원자, 그리고 그 작품을 수집한 컬렉터. 이 세 박자가 맞아야 그 작품은 오랜 시간을 잘 견뎌내고 소중하게 다루어져서 몇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마주 대할 수 있는 거였다. 그리고 미술관과 작품과 관련하여 학업과 회사일을 하며 알게 된 소중한 에피소드들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미술관 여행뿐만 아니라 유학생활과 최고의 경매회사인 소더비에 자리 잡기까지의 스토리가 미술공부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부모님들께도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