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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안의 미술관 크뢸러 뮐러

Kröller-Müller Museum

by my golden age

Kröller-Müller Museum 크뢸러 뮐러 미술관


이 세상 종말이 임박했고 한 군데 다녀올 수 있는 카드를 받게 된다면, Kröller-Müller Museum에 다녀올 거 같다. 아름다운 자연과 명작들을 한가득 품고 있는 숲 속의 미술관. 아직 못 가본 곳도 많고, 다녀본 곳도 적지 않지만 이곳은 내가 경험한 곳 중 최고였다. 어느 계절에 방문해도 다 좋을 듯하다. 관람객이 별로 없는 한적한 겨울조차도 완벽했다. 자연 속에서 보석 같은 작품들의 전시공간을 나 혼자 차지하고서 본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동스러웠다. 암스테르담에서 당일치기가 충분히 가능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작은 도시 Otterlo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여유롭게 보기를 권한다, 이틀의 시간이 절대로 길지 않을 거다.



세계정세가 어수선한 1938년에 미술관이 세워지다니, 그것도 국립공원 안에. 더군다나 반고흐 뮤지엄 다음으로 반고흐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어떤 곳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겨울이라 De Hoge Veluwe National Park (호헤 벨루베 국립공원) 입구 매표소 앞은 한적했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고 지도를 받아서 들어가니 수백 대 이상의 자전거가 질서 있게 정렬되어 있었다. 자전거는 바퀴가 크고 브레이크 페달이 없었다. 모든 자전거에는 아이용 캐리어가 부착되어 있고 클래식한 디자인이다. 크뢸러 뮐러 부부도 그 시절에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녔을까. 마침 겨울코트에 모직모자를 쓰고 온지라 1930년대 감성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내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아침의 안개가 걷히는 중, 쌀쌀하고 촉촉한 공기에 코끝이 살짝 빨개졌지만 참 상쾌했다. 숲 속 길을 따라 들어가는 이곳은 사슴, 노루, 멧돼지, 늑대, 여우, 담비등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천혜의 자연이 보존되어 있는 공원이다. 갈림길이 두어 번 있었는데 미술관 이정표를 따라서 신나게 달려갔다. 파이프를 물고 연기를 뿜으며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 옆을 지나 앞서 나가는데, 그들도 영화 속에서 마주친 거 같다. 한 15분 정도 놀면서 슬슬 달려왔더니 나무숲 사이로 나지막한 건물들이 보이고 야외에 조각품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상상 그 이상의 미술관이 숲 속에 있었다. 사진은 자전거 타는 딸의 뒷모습과 우리를 지나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다. 내가 찍었지만 배경이 다 했다.


Paul Gabriel <It comes from afar, 1887>


이 미술관을 세운 Helene Kröller-Müller (1869 – 1939)는 독일 재력가 집안의 딸로 네덜란드의 Anton Kröller와 결혼하고 양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게 된다. 두 집안은 광산 철강 해운업으로 유럽에서 손꼽히게 부유했다. 부부는 네덜란드 전통에 따라 친정의 성 Müller와 남편의 성 Kröller을 모두 사용해서 Kröller-Müller가 되었다. Helene는 일찍이 예술품 수집을 시작했는데, 특히 반고흐의 천재성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작품을 모으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 헬렌은 35세 때인 1905년경부터는 딸과 함께 화가 Henk Bremmer에게 미술을 배웠는데, 미술 선생님은 헬렌에게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예술품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헬렌은 1907년에 처음으로 Paul Gabriël (1828-1903, 네덜란드)의 작품 <It comes from afar, 1887>를 구입하게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파리와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열리는 경매마다 참여하면서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된다. 헬렌은 뛰어난 안목과 예지력으로 반고흐의 유화 90점, 소묘 185점을 수집하여 반고흐 미술관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보유하게 된다. 1908년 헬렌이 구입한 첫 번째 반고흐의 작품은 <Four cut sunflowers, 1887>였고, 다음 해에는 <The Sower, 1888>를 구입한다.


반 고흐 <Four cut sunflowers, 1887>
반 고흐 <The Sower, 1888>


그녀가 처음부터 뛰어난 안목과 결단적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Georges Seurat(1859-1891)의 <A sunday aftenoon La Grande Jatte, 1884>를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멘토인 Bremmer가 그 작품을 구입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아쉽게도 그 작품은 인상주의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녀는 빠르게 다음 기회를 잡아 <Le Chahut, 1889-1890>을 구입하였고, 이 작품은 쇠라의 대표작으로 위풍당당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녀가 선택했던 모든 작가가 다 반고흐처럼 인정받고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헬렌은 네덜란드 작가인 Bart van der Leck(1876-1958)의 작품을 400점 이상 구매 했다는데 이 작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느 날 갑자기 재조명을 받고 인기를 얻게 된다면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을 그의 작품들이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Georges Seurat <Le Chahut, 1889-1890>


이 미술관 부지는 남편 Anton이 47세였던 1909년부터 사냥터로 사용할 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넓을 부지를 개인 사냥터로 구입했다니 그들이 가진 부의 규모는 가늠이 안된다. 이 공원의 면적은 55 km²으로 지도로만 봐도 엄청나게 넓다. 헬렌은 1910년에 이태리 피렌체를 여행하면서 미술관을 지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녀는 우선 헤이그에 있던 사무실 건물에 전시장을 만들고 그때까지 수집한 작품들을 대중들을 위하여 전시했는데, 그 당시에는 이렇게 현대 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때는 헬렌도 모든 사업을 내려놓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하는데 직접 나서서 헌신을 다 했다. 크뢸러 뮐러 부부는 세계대전 덕분에 사업이 더욱 번창하게 된다. 이후 헬렌은 더 많은 작품에 투자할 수 있었고, 이때 구매한 작품 중 하나는 Auguste Renoir(1841-1919)의 <The Clown, 1868>이다.


Auguste Renoir <The Clown, 1868>


부부는 호헤 벨루베 공원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곳에 미술관을 짓기로 한다. 건물 설계를 하고 건축에 사용하기 위해서 독일에서 사암 수입까지 진행하던 중인 1922년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파산위기를 겪게 되고 건축은 중단된다. 상황은 곧 호전되었지만 큰 위기를 겪은 부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미술품을 지켜낼 수 있도록 재단을 설립하고, 수집품 12,000점과 공원 전체를 네덜란드 국가에 기증한다. 기증하는 조건은 단 하나, 국가에서 이 공원에 대형 미술관을 지어주는 거였다. 헬렌은 정부와 긴밀한 협조를 하며 중단되었던 건축을 진행시킨다. 1938년 미술관은 마침내 오픈하게 되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2차 세계대전으로 휴관에 들어간다. 그들은 방공호로 작품들을 이동시키고 보관하며 지켜내었다. 헬렌은 1938년에 미술관 오픈식을 보고, 1939년에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948년에는 조각정원이 새롭게 조성되었고, 여러 번의 확장을 통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공원을 지키고 있다. 현재 야외 정원에는 160개 이상의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다.



헬렌의 옆에는 예술품 컬렉션과 큐레이팅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계속 있었다. 초기에는 미술 선생님이자 화가인 Henk Bremmer가 컬렉터의 세계로 이끌어줬다. 헬렌이 남긴 34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그녀의 일생을 연구한 Eva Rovers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쏘울 메이트가 있었다고 한다. 안톤은 첫 딸의 동창생인 Sam Van Deventer을 좋게 보고 부부의 회사에 취업시켜 평생 인연을 이어가게 되는데, 헬렌은 샘과 그 이상의 관계가 된다. 헬렌은 샘과 1908년부터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썼다. 그들이 한 도시에 있을 때에는 함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헬렌은 샘과의 관계로 인해서 딸과는 문제가 생겼지만, 남편과의 관계에는 이상이 없었다. 매우 개인적인 나의 생각으로는 안톤이 헬렌을 믿었다기보다는 그녀가 몰입해 있는 컬렉션 세상을 시시콜콜 다 들어주며 함께하기가 귀찮아서 샘에게 그 역할을 떠 넘긴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은 민감한 부분은 암묵하에, 늘 셋이 함께 다니는 이상한 조합을 유지하게 된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헬렌이 샘을 많이 의지한 듯하다. 미술관 설립을 의논할 때도 안톤은 헬렌에게 충분하게 공감하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느낀 그녀는 샘과 대화하면서 정신적인 결핍을 채우고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받은 거 같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갈망했으며, 깊은 플라토닉 사랑을 한 거 같다. 헬렌이 미술관 설립을 해내기까지 정신적인 서포트는 샘에게서 받은 듯하다. 물론 경제적인 서포트는 남편에게서 받았겠지만. 아무튼 이 미술관이 탄생하기까지는 부부뿐만 아니라 샘의 공로도 컸음에 틀림없다.



미술관 들어가기 전, 입구의 정원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빨간색 조각이 포인트다. <포터블 화분>이라는 제목으로 자루 안에 담긴 식물들도 정원에 놓여 있었다. 날씨가 급변하기 때문에 지체 말고 카메라에 원 없이 담았다. 시시각각 구름이 변했다. 뷰가 좋은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돌리고, 전시를 보기 시작했다. 큐비즘 전시실에서는 다양한 컬렉션이 인상적이고, 멋진 작품들을 주제별로 느낌별로 그룹핑해 둔 큐레이팅에 또 한 번 놀랐다. 큐레이팅이 잘 되어 있으니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한눈에 잘 볼 수 있었다. 큐비즘 작가가 이렇게나 다양했던가.


<포터블 화분>
큐비즘 전시실


마침내 반고흐 작품이 전시된 4번 방으로 들어간다. Claude Monet, Georges Seurat, Pablo Picasso, Piet Mondrian 등을 애써 외면하며 제일 안쪽의 반 고흐 전시실까지 직진부터 했다. 멀리서부터 고흐의 작품들이 보이니 설레기까지 한다. 초기작품부터 골고루 한가득 있다니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헬렌이 세상을 떠날 때에 고흐의 작품들을 일렬종대로 걸어두고 그 앞에 꽃다발을 놓고 빈소를 차렸다니 감동적이다.



한 작품씩 순서대로 설명을 읽으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붓터치를 뚫어져라 보면서 그의 마음을 느껴보았다. 두껍게 겹겹이 올려져 있는 물감의 색도 참 신비롭고 조화롭게 섞여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짧은 붓터치일 뿐인데 조금 떨어져서 보니 꽃밭을 그린 거였다. 그 유명한 <Terrace of a Café at Night, 1888>의 밤하늘의 별들도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환상적이다. 분홍색 꽃이 만발한 한그루의 나무 <Pink Peach Trees, 1888>는 가는 붓터치와 파스텔톤의 옅은 색상으로 섬세함과 차분함이 느껴진다.


반 고흐 <Terrace of a Café at Night, 1888>
반 고흐 <Pink Peach Trees, 1888>


반고흐는 한 소재를 가지고 여러 번 혼심을 다해서 그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도, 침대와 의자 그림도, 우체국 아저씨의 초상화도, 마담의 초상화도, 그리고 자화상까지도 한 가지 주제를 여러 번 그렸기 때문에 어느 미술관에서 본 거 같은데… 어디서 봤지? 내 기억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반 고흐 작품집은 꼭 한 권 갖고 있기를 추천한다. 해바라기만 해도 여러 점을 그렸고 전 세계 곳곳에 소장되어 있다. 고흐의 책을 펼쳐놓고 보니 시기별로 꽃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어느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지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정리가 된다.


정말 이곳은 고흐의 작품으로 꽉 차 있었다. 헬렌의 안목도 대단하지만, 고흐 생전에 그림 판매가 되지 않은 덕분에 작품들이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어서 많은 작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정성이 많이 들어가고 순수해 보이는 고흐의 초기 작품들을 오래오래 천천히 보고 싶었다. 참 잘 그렸다. 어두운 톤의 작품들은 서서히 밝은 색이 입혀지며 변해갔다.


반 고흐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과수원 그림이 참 많다. 과수나무의 이름도 구체적이다. 자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아몬드나무, 그리고 이 그림들은 대부분 다 Arles에서 머무르던 시기인 1888-1889년 정도에 그려졌다. 특히 3월부터 4월 과실수의 꽃이 만개하던 이 한 달 동안에 14점이나 그려냈다. 남프랑스의 뜨거운 태양과 아름다운 기후는 고흐가 내면에 품고 있던 색채를 다 꺼내서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눈앞에 펼쳐진 과수밭과 반짝이는 별빛을 보며 1년 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쏟아낼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언제 봐도 황홀한 명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노란빛과 주황색을 사용하여 강렬한 태양의 기운을 품기도 하고, 짧은 붓터치와 테두리 선으로 강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고흐는 이곳에서 꽤 잘 지내다가, 정신 발작과 고갱과의 다툼 끝에 자기 귀를 베어내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래놓고도 차분하게 그림을 계속 그렸다. 나는 마담 룰랭부인과 우체부 룰랭 아저씨의 초상화를 좋아한다. 초록색이 이렇게 세련되고 예쁠 수 있나. 고흐의 해바라기도 아를에서 그린 것들이 가장 활짝 피어있고 풍성하다. 강렬한 햇살아래에서 싱싱한 해바라기를 직접 보며 그려서일 거다.


<Portrait of Madame Roulin, 1889>
<Portrait of Joseph Roulin, 1889>


고흐는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하여 스스로 옆 동네인 Saint Remy De Provence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요양원으로 떠난다. 그는 이곳에서 1889년 5월부터 딱 1년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린 <꽃이 핀 아몬드 나무>를 제외하고는 소용돌이치는 물결무늬가 공통적으로 보인다. 아를의 스위트한 과수원 느낌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나무들은 꼬불꼬불 곡을 갖게 되고 가지도 물결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땅도 하늘도 산등성이도 정신없이 함께 움직인다. 이때 올리브나무, 뽕나무 (mulberry), 사이프러스, 포플러, 소나무, 그리고 밀밭을 그렸다. 나무들의 선만 봐도 고흐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어두움 속에서도 화려한 색상이 밝게 쓰인 것을 보면 고흐는 색상 천재임이 틀림없다.


고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린 단 한 점의 그림은 러시아 푸슈킨에 있는 <The Red Vineyard, 1888>이다. 나는 여태까지 나지막하고 꼬불꼬불한 나무들은 다 포도나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공부해 보니 올리브나무였다. 생 레미 시기에 그린 올리브 나무만 십여 점이 된다. 그러고 보니 고흐의 그림 중에 포도밭 전경은 두 점 밖에 없나 보다. 붉은 포도밭 외에 또 한 점은 <Vineyards with a View of Auvers, 1890>으로 이 작품은 미국 Saint Louis 미술관에 있다. 고흐의 아를 시기와 생 레미 시기에 그린 나무들의 특징을 눈여겨보는 것도 재미를 더 해 준다.


<The Red Vineyard, 1888>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Vineyards with a View of Auvers, 1890>Saint Louis Art Museum

야외의 조각공원은 무려 25 헥타르나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정원이 얼마나 넓은 걸까. 유명 작가들 조각 작품이 많기도 하고, 작품과 공간이 잘 어울리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3시경에 미술관을 나서는데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겨울은 해가 정말 짧다. 혹시라도 멧돼지라도 마주칠까 봐 서둘러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공원 앞 마을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다음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미술관이다. 기회가 되면 다른 계절에 다시 와서 정원에서 맥주도 마시며 천천히 조각들도 둘러보고 싶다.



Otterlo는 아주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림 같이 예쁜 집들 옆에는 염소나 말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이곳 마을에 웬일인지 캐나다 국기가 군데군데 걸려 있어서 의아했는데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가 전쟁추모비를 보게 되었다. 1945년 4월 16일 밤 이 마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그때 몸 바쳐서 싸워준 연합군중 캐나다인들의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도 일상생활 중에 그들을 추모하며 매일 활짝 핀 생화를 추모비 아래에 갖다 놓고 있었다.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6 25 전쟁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희생된 유엔군 사망자는 3만 7천902명이고, 오텔로 전투에서 희생된 사망자는 캐나다인 17명, 영국인 6명, 민간인 4명이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마을 한복판에 캐나다 국기를 걸어두고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감사와 추모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과 고마움을 너무 잊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컬렉션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내고, 개인의 파산으로 인해 작품이 흩어지지 않도록 재단을 만들고, 국가에 기증하고 관리하도록 결단을 내린 크뢸러 뮐러 부부의 판단도 참 존경스럽고, 오텔로 주민들이 보여주는 가치관도 참 성숙하다고 느껴진다. 이 작은 마을은 기회가 될 때마다 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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