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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가 되어 준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Museum Voorlinden

by my golden age

Museum Voorlinden


이곳에서 만난 완전히 새로운 장르는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게 했고, 이런 현대미술이라면 한없이 좋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헤이그는 가는 곳마다 기대 이상이었다. 이렇게 감성 넘치는 도시를 왜 이제야 와본 거지? 우리 모녀는 매일매일 새로운 예술을 만나며 헤이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Voorlinden 미술관의 위치는 행정구역으로는 Wassenaar (바세나르) 지역이지만 헤이그 도심에서 매우 가깝다. 미술관 입구로 들어가는 길 옆 초원에는 소와 말이 노닐고 있어 평화로움 그 자체였고, 자연 친화적인 건축미가 느껴지는 미술관에서는 느긋한 마음으로 수동적인 관람보다는 능동적인 체험을 하는 듯했다.


선물 같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던 Voorlinden 미술관은 네덜란드 화학업계의 재벌인 Joop van Caldenborgh (1940-) 소유의 현대 미술관이다. 그는 50년 동안 현대 미술을 찾아다니며 Damien Hirst (영국, 1965-), Tracey Emin (영국, 1963-), Anselm Kiefer (독일, 1945), Yayoi Kusama (일본, 1929), Dan Graham (미국, 1942-2022), Ai Weiwei (중국, 1957-) 등의 주요 작품을 수집했고, 2016년에는 개인 소장품 500여 점을 전시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바세나르에 미술관을 열었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 평온한 오아시스가 되기를 원한다는 이 미술관의 사명처럼 이곳은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놀이터이자 쉼터가 되어준다. 여유로운 공간에 배치된 작품들과 함께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작품의 입장에서도 초원에 둘러싸여 따뜻한 채광을 받으며 행복하지 않을까.



이곳은 상설 전이 기가 막히게 멋지다. 가장 신기했던 작품은 수영장이었다. 미술관 안에 수영장이 있다고? 믿을 수 없겠지만, 놀랍게도 물이 채워진 듯이 보이는 수영장이 실제로 있었다. 아르헨티나 개념미술가인 Leandro Erlich (1973-)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인 <수영장, 2016>은 이 미술관을 위하여 디자인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수영장으로써 갖춰야 할 요소는 다 갖추고 있다. 물속으로 내려갈 때 붙잡고 내려가는 사다리, 파란색 수영장 바닥, 주변의 타일까지 이곳이 리얼 수영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관람객들은 수영장 옆에 있는 계단을 이용하여 한층 더 아래로 내려가면 수영장 수면 아래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서 있을 수가 있다. 수영장 바닥에 서서 수영하는 척하며 가짜 수영을 진짜처럼 즐길 수 있다. 위를 올려다보면, 진짜 물이 있는 듯 어른어른 거리며 수면 밖을 볼 수 있다. 어른인 나도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는데, 아이들에게는 오죽 재미있을까. 착시현상으로 관람객 모두가 재미있게 즐겨 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통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거울을 이용하여 집과 관람객들이 거꾸로 서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는 <Dalston House>도 유명하다.


Leandro Erlich <Swimming Pool, 2016> Photo: Antoine van Kaam


Leandro Erlich <Dalston House, 2013> Dalston, London


James Turrell (미국, 1943-)의 <Skyspace, 2016> 작품도 너무 좋다. 터렐도 미술관 개관 당시에 이 공간을 특별히 설계하여 천장에 사각창을 만들었다. 관람객들은 벽에 등을 기대고 긴 의자 위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그 사각형 안을 지나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날씨가 좋을 때는 파란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볼 수 있지만, 날씨가 좋지 않을 때면 사각 하늘은 닫히고 텅 빈 공간은 터렐이 제작한 조명으로 채워진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어도 시공간의 여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aJames Turrell <Skyspace, 2016> Photo: Antoine van Kaam


Richard Serra (1938-2024)의 <Open Ended, 2007-2008> 작품은 무게가 무려 216톤에 달한다.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어떻게 들여왔을까. 이 작가를 설치미술가라고 하기에는 작품 스케일이 너무나 거대하다. <Open Ended>는 왼쪽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오른쪽 위에서 볼 때의 모양이 다르게 보이고, 평지에서 보아도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 다르게 보인다. 거대한 금속의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면 겹겹이 미로여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그래서 제목이 Open Ended 인가보다. 이 작가의 예술세계는 둘째 치고, 이렇게나 거대한 작품을 강철을 사용해서 제작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 조각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조선소 스케일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력 중 특이한 경력이 보인다. 세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생계를 위하여 제철소에서 일을 했다. 그곳은 작은 규모가 아닌 유조선을 만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가 제작한 초대형 조형물들은 제철소 경험이 있었기에 상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을 거다. 그는 녹슨 강철로 공간을 조각한 듯하다.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균형, 무게, 중력, 수평과 유선형 등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다. 시작은 우연이었겠지만 그 또한 운명 안에 계획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쉽지만 세계 곳곳에 남겨진 압도적인 그의 작품들은 우리 곁에 오래오래 남아있을 거다.


Richard Serra <Open Ended, 2007-2008>


Ron Mueck (호주, 영국에서 활동 중, 1958-)의 거대한 인물 조각인 <Couple under an Umbrella, 2013>는 사람보다 딱 2배가 큰 거인의 모습이었다.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극사실주의답게 주름, 모공, 털, 점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특히 할아버지의 발가락과 반바지 수영복 속으로 보이는 허벅지 피부, 하얗게 샌 눈썹, 팔목의 힘줄, 주름진 뱃살까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디테일과 정교한 표현은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만들었을지 불가사의하다. 극사실주의 회화를 보면서도 감탄에 감탄을 하며 인간승리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보통 조각도 아닌 대형 사이즈 조각이 아닌가.


이 작가의 이력에서도 특이점을 볼 수 있다. 그는 장난감 공장을 운영했던 아버지 영향으로 장난감을 직접 만들어 볼 기회가 많았는데, 이 경험으로 어린이 TV프로그램에서 인형 제작자로 일하게 된다. 역시 지나고 보면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2021년 리움미술관 기획전에서 론 뮤익의 <마스크 II, 2002>가 화제가 되었는데, 이 작품을 마주 대했을 때 너무 큰 얼굴과 디테일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거대한 사이즈와 과장된 표현이 좀 기괴하기도 하지만, 작품의 크기가 큰 만큼 인간의 삶의 깊이가 더 크게 확대되어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의 크고 작은 파도가 다 지나가고 해변에 누워서 쉬는 모습이라서 그런 걸까, 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거대한 사이즈 덕분에 행복함과 평화로움이 몇 배로 더 크게 느껴지는 듯하다.


Ron Mueck <Couple under an Umbrella, 2013>


큰 창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바깥의 초원과 정원뷰를 보면서 쉬는 시간도 소중하다. 통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연스러운 빛을 따라 작품을 보는 것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들어오는 입구 쪽에 근사한 라이브러리가 있다. 이곳은 천장까지 책이 가득 차 있어서 현대적이면서도 오래된 도서관 같아 보인다. 고대의 골동품부터 현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고, 미리 예약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이곳의 정원 또한 예사롭지 않다. 유명한 정원 디자이너에 의해서 조성되었고, 60여 개의 조각들도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에는 상설 전인 <Highlights> 외에도 몇 개의 기획전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나는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사람 없는 곳에서 한적하게 보고 싶어서, 전시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는 편이었다. 딸과 함께 관람하던 중에 내가 자꾸 순서 건너뛰고 다른 전시실에 가 있으니 딸이 그렇게 보지 말고 순서대로 보라고 한다. 기획전은 큐레이터의 기획의도를 읽으며 진행 방향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듣고 보니 너무 당연하고 옳아서 그 이후부터는 나도 미술관의 기획의도를 존중하며 전시실을 순서대로 천천히 보게 되었다. 가끔은 선생님 같은 딸이다. 이곳은 진정 럭셔리한 놀이터, 헤이그까지 왔다면 절대로 놓치지 말기를 추천한다.


레스토랑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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