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좋은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여행을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다니기도 했다. 딸과 엄마가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도 축복이었고, 딸이 있는 것도 감사하다. 그렇다고 우리 여행에 대단한 건 없었다. 둘만 여행을 가면 늘 사소하게 삐지고 다투고, 심하게 싸우면 각자 따로 다니다가 들어온 적도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늘 신경전이 있긴 하다. 우리 모녀는 늘 친구 같고 어떨 때는 딸이 더 언니 같기도 하고 복잡 미묘한 관계이다. 여행 때 가족 구성원이 많아지면 다른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이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둘이 가면 그렇다.
내가 보호자니 준비할 것도 많고 여행 중에 신경 쓰이는 것도 많다. 무엇보다도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교통, 숙소, 밤거리는 늘 안전 우선으로 선택한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가장 편한 여행은 남편하고 단둘이 가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 될 때마다 딸과 부지런히 다니기를 잘한 거 같다. 오랜 학생 신분이 끝나고 취업을 하고 나니 앞으로는 함께 다니기가 어려울 거 같다. 지나고 보니 다 때가 있다는 말이 맞다.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기회를 잡고 미루지 말고 추진해야 한다. 모두 다 사는 게 바쁘고 여유가 없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훗날 후회는 없을 거 같다.
미술관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곳이다. 슬슬 걸어 다니면서 관람을 한다지만, 전시실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쭉쭉 앞으로 걸어만 나가도 기본 관람시간이 몇 시간씩 걸려서 꽤 많이 걷게 된다. 많은 작품을 눈에 넣고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하다 보니 쉽게 피곤해진다. 그래서 미술관을 가는 날에는 산책을 하거나 구경하면서 슬슬 걸어가지 않고 바로 미술관으로 직행한다. 걸어갈만한 가까운 거리이면 아침 식사를 하고 바로 미술관부터 가서 관람을 시작한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을 때는 비용이 들더라도 가장 빠르고 편리한 교통 수단을 선택한다. 대중교통 찾아 타고 걷고 헤매다가 미술관에 도착하면 체력이 곧 방전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좋은 컨디션으로 한차례 둘러보고 나서는 미술관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기운 내서 나머지 전시를 보고 뮤지엄샵에서 만나는 게 보통 우리의 코스이다. 미술관 카페는 어느 곳을 가도 인테리어가 멋지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혹은 중간에 카페에 가서 당 충전을 하며 쉬는 시간을 갖는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미술관과 잘 어울리는 찻잔에 뜨거운 커피나 라떼를 시키고 이 나라의 물 맛과 우유맛에 대해 생각해 본다. 왜 라떼맛은 다 다를까.
미술관을 함께 가도 서로의 감상에 대해서 특별히 얘기를 나누지는 않고 각자 편하게 관람한다. 관람하면서 중간중간에 마주칠 때마다 <그 작가 작품 봤어? 그 작품 저기 있더라. 그 스토리 적혀 있는 거 읽어 봤어?> 서로의 정보를 짧게 교환한다. 혼자 알기 아까운 정도의 정보만 교환하고, 각자 알아서 쿨하게 본다. 미술관에 혹은 컬렉션에 깊은 인상을 받아 흥분 지수가 올라갔을 때 나는 짧게 표현을 한다. 여기 다시 오고 싶다.
보통 맛있는 거 먹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고 하는데, 나는 미술관에 가면 함께 오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 두고 온 나의 반쪽과 나의 네 마리 고양이를 돌봐주고 계시는 엄마 아빠가 생각난다. 딸에게도 이 미술관이 좋았을까? 엄청 좋았다고는 표현을 안 하지만 나중에 한참 지나면 알 수 있다. 친구에게도 가보라고 추천을 했다든지, 교수님께 여기 다녀왔다고 얘기했다던지, 자기의 반쪽과 함께 다시 방문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음.. 너도 좋았었구나 알게 된다.
뮤지엄샵도 굉장히 소중한 곳이다. 일단 디스플레이가 너무 예쁘게 되어있어서 눈이 즐겁다. 해당 미술관에서 직접 출판한 서적이나 전시 관련된 책들은 친절하게 선별해 두었으니 다른 기념품들은 안 사도 책은 한두 권씩 꼭 챙겨 산다. 미술관에서 출판한 책은 다른 서점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우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구매한다. 샵을 나오면서 나는 미리 생각해 둔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 의견을 물어본다. 우리 이제 뭐 먹으러 갈까?
맛집 몇 군데를 뽑아두면 딸이 고르는 편이다. 나는 살기 위해 먹는 스타일로 음식에 별로 집착을 안 하는 편이고, 딸에게는 오늘의 메뉴가 너무나 중요하다. 식당에 도착하면 간단하게 맥주나 와인을 곁들인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가만 보고 있자면 정말 친구 같이 느껴진다. 딸한테 듣게 되는 미술 관련 에피소드들은 다 맛있는 식사와 와인을 사주면서 듣게 된 이야기들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 시간에 듣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어디 가서도 들을 수 없는 소중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이다. 때로는 내가 낳아 키운 아이가 나의 선생님 역할을 하는 때도 온다. 미술 얘기뿐만 아니라 사는 얘기도 하며. 세상에 이런 여행 파트너가 있을까 싶다. 딸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