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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gie-Woogie를 그린 몬드리안

Kunstmuseum Den Haag 쿤스트뮤지엄 헤이그

by my golden age


네덜란드 화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우선 반고흐가 생각나고, 베르메르도 떠오른다. 그리고 렘브란트! 또 한 명은 생각지도 못했던 Piet Mondrian이다. 그 유명한 몬드리안의 빨간 노랑 파란색이 들어간 그림은 뉴욕의 현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에, 뉴욕 출신인가 싶었다. Kunstmuseum Den Haag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다.



미술관 내부에서도 De Stijl 디자인이 느껴진다


헤이그 Kunstmuseum Den Haag가 위치한 곳은 복합 예술 단지로 어린이 미술관, 사진 미술관, 현대 미술관, 야외 정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앙에 쿤스트뮤지엄이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은 유럽의 긴 역사 치고는 꽤 현대식 건축물로 1935년경에 지어졌다. 외관은 평범하고 수수하다. 이곳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었기에 큰 기대 없이 방문했다가 내부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네덜란드의 블루 색상이 들어간 델프트 도자기부터, 유리공예, 인형의 집, 인상파 회화, 근현대 회화뿐만 아니라 패션 소품까지 다양한 컬렉션을 16만 점이나 소장하고 있고 연간 25~30개의 기획 전시를 개최한다고 하는데, 얼떨결에 보고 나온 기획전이 열개 정도는 되는 거 같았다. 특히 패션 브랜드인 BALENCIAGA의 기획 전시는 미술관에서 만나는 패션이라니 무척이나 신선했다.



이 미술관의 자랑인 Piet Mondrian (1872-1944) 컬렉션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구성 디자인뿐만 아니라 풍경화와 인상주의 그림까지 폭넓게 전시되어 있었다. 몬드리안도 초기에는 여느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꽃도 그리고 풍경도 그렸고, 그만의 스타일을 정착시키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그의 예술적 탐구 방향이 사실화에서 추상화로 점차 발전해 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린듯한 추상으로 장르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몬드리안 <Windmill near tall trees, 1906>
몬드리안 (왼쪽) <Farmstead under oak trees I , 1906-1907> (오른쪽) <Truncated farm building in Brabant, 1904>


네덜란드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던 몬드리안은 39세가 되던 1911년에 파리로 이주하였다. 파리에서 피카소와 Georges Braque의 입체파를 접하게 되면서 그의 화풍에도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의 그림은 파리로 가기 이전부터 이미 추상화로 변해가고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그린 <Evening: Red Tree, 1908>는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작품으로 절제된 형태와 색상이 느껴진다. 파리에 도착해서 그린 <Evolution, 1911>은 여성을 그린 3폭의 추상화로 그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인물화는 그리지 않았다. 몬드리안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추상화 시기가 지나가면, 그를 상징하는 신조형주의 (Neoplasticism)가 등장한다.


몬드리안 <Evening: Red Tree, 1908>


몬드리안 <Evolution, 1911>


그는 1914년에 잠시 네덜란드로 돌아왔는데 그때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1918년까지 머무르게 된다. 그때 네덜란드에서 De Stijl을 결성하게 된다. 데 스틸은 The Style이라는 뜻으로 1917년에 Theo van Doesburg(1883-1931)와 몬드리안을 중심으로 시작된 예술 운동이고 신조형주의라고도 불린다. 데 스틸은 기본적으로 형태와 색상을 강조하고 불필요한 장식이나 디테일을 배제하여 예술과 생활 사이의 경계를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미술, 건축, 가구 디자인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데 스틸을 받아들여 단순하고 세련된 디자인들이 생활 속에 자리 잡게 된다. 데 스틸은 이후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 모더니즘 등에 영향을 준다.


데 스틸 시기에 그려진 몬드리안의 구성 작품들은 선을 사용하여 디자인되었다. 오직 수직선과 수평선만으로 만들어진 면은 순수한 색상들로 채워졌는데, 절대로 빨강, 파랑, 노랑, 흰색, 검정 색을 벗어나지 않았다. 몬드리안은 이렇게 단순화된 형태로 균형 잡힌 조화로움을 추구하였고, 영적인 세계와 예술을 이어주고자 했다. 그의 그림을 유심히 보면 가로와 세로를 분할하는 선의 색상이 검은색인 그림도 있고 회색인 그림도 있다. 초기 작품에는 검정, 회색, 흰색과 같은 무채색의 선을 사용하다가, 후기 작품에서는 선 자체에 색상을 넣었다. 그마저도 3가지 색을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몬드리안 그림의 특이점은 수평선과 수직선만으로만 분할되었다는 점이다. 몬드리안은 데 스틸을 함께 만든 테오 반 되스버그와 의견 차이로 갈라서게 되는데, 갈등의 이유가 기가 막히다. 되스버그는 데 스틸 회화에서 사선의 사용을 허용하자고 주장하였고, 몬드리안은 절대로 사선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작가의 그림을 비교해서 보면 기본 개념은 같지만, 되스버그의 그림에서는 대각선이 사용되었고 몬드리안의 그림에서는 대각선이 일절 사용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강직하고 고집스러움이 느껴지고, 되스버그의 그림에서는 부드러움이 있다.


몬드리안 <Composition With Red, Yellow, Blue, And Black,1921> 테오 반 되스버그 <Counter-Composition, 1924>


(왼쪽) Vilmos Huszár <Composition De Stijl, 1950-1959> (오른쪽) Theo van Doesburg <Composition IX, 1918>


미술관에 전시된 데 스틸 스타일의 의자와 가구들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련되게 느껴지는 디자인이다. 특히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였던 Gerrit Rietveld (1888-1964)의 작품 <Red Blue Chair, 1917>는 지금 보아도 멋지다. 이 의자에도 직선만 사용되었고 빨강, 파랑, 노랑, 검정과 같이 색상의 사용이 절제되어 있다. 데 스틸 작가들은 전통적인 형태와 구조는 무시하였고, 새로운 철학을 담은 혁신적인 디자인과 함께 기능도 고민하였다. 요즘 우리나라 가전제품 디자인에도 데 스틸 스타일이 적용된 사례가 많이 보인다.


(왼쪽) Gerrit Rietveld <Red Blue Chair, 1917> (오른쪽) De Stijl 작가들이 디자인한 의자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그는 1938년까지 오랜 시간 파리에 머무르며 그만의 스타일로 작품을 쏟아내었다. 유럽의 정세가 심각하게 불안해지자 그는 잠시 런던에서 머물다가 1940년에 네덜란드가 침공당하고 파리가 함락되면서 뉴욕으로 이주하고, 비록 짧은 4년이지만 사망할 때까지 뉴욕에서 활동한다.


몬드리안은 파리, 런던,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그의 삶과 작품 공간을 일치시켰다. 그는 선과 색에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살던 집과 작업실도 그림과 똑같은 컨셉으로 꾸몄다. 파리와 뉴욕의 작업실 공간이 사진으로 남아있는데, 그가 추구하던 데 스틸의 이상대로 예술과 생활에서의 경계를 없앤 그의 확고한 집념을 볼 수 있다.


평생 동안 수평 수직 그리고 무채색 혹은 3가지 색상 안에 갇혀 살면서 갑갑하지는 않았을까.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별다른 스캔들과 연애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50대 후반에 20대 여성과 잠시 사랑했고, 그때 처음으로 작업실에 초록 화분을 들여놨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의 연애 소식보다도 초록 화분이 더 쇼킹했던 거 같다. 평생 흰색 꽃만 갖다 둘 정도로 엄격하게 정해진 틀 안에 갇혀 살던 그에게 초록 화분은 얼마나 큰 심경의 변화를 의미한 걸까. 2014년 영국 테이트 리버풀 전시회에서는 그의 파리 스튜디오를 그대로 재연하여 큰 관심을 받았다.


몬드리안의 26 rue du Départ, Paris 스튜디오 (1926년 사진)
2014년 Tate Liverpool 전시회에서 재연한 몬드리안의 26 rue du Départ, Paris 스튜디오


그가 사망한 직후에 친구에 의해서 남겨진 뉴욕 사진에는 그가 작업 중이던 <Victory Boogie Woogie, 1944>가 미완성인 채로 이젤 위에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 보인다. 첫째로는 마름모로 캔버스를 배치했고 (이전에도 여러 작품에서 마름모 캔버스를 사용하긴 했다), 두 번째로는 선 자체에 여러 가지 색상이 분할되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가로와 세로 선으로 생긴 사각형 면 안에는 또 다른 면과 색이 들어가 한층 복잡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후기로 갈 수로 선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기존의 작품들에 비하면 대단히 큰 변화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Broadway Boogie Woogie, 1942>도 닮은 꼴이다. Boogie Woogie는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인기 있던 블루스 음악으로 템포가 빠른 댄스 음악이다. 부기우기 이름과 리드미컬한 색상의 반복이 피아노 건반이 춤을 추듯이 잘 어울린다.


Mondrian 사망후 촬영한 뉴욕의 스튜디오
(왼쪽) <Victory Boogie Woogie, 1944> (오른쪽) <Broadway Boogie Woogie, 1942>


몬드리안의 작품이 헤이그에 많이 소장되기까지는 여러 사람의 공로가 있었다. 1951년부터 1974년까지 쿤스트뮤지엄의 관장이었던 Louis Wijsenbeek는 뛰어난 안목으로 몬드리안의 작품을 적극 구입하였다. 몬드리안의 친구이자 후원가였던 Salomon B. Slijper는 네덜란드 유대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은신처에서 숨어 지내면서 목숨 걸고 지켜낸 소장품을 쿤스트뮤지엄에 기증하였고, 이 중에 몬드리안 작품이 197점 포함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1998년 미국으로부터 몬드리안의 마지막 작품인 <Victory Boogie Woogie>를 구입하여 고국으로 가져오는 큰 결단을 한다. 이로써 몬드리안의 초기 작품부터 마지막 하이라이트까지 그가 추구한 예술의 모든 단계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헤이그에서는 몬드리안과 데 스틸 운동에 함께 참여한 그의 친구들의 작품들도 꼭 챙겨보기를 추천한다.


Egon Schiele <Portrait of Edith (the artist's wife)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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