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무기고 The Wallace Collection
이름도 영국스러운 런던의 Bond Street. 피카딜리 쪽으로는 명품거리가 이어지고, 옥스퍼드 스트리트에는 유명 백화점들이 나란히 포진하고 있어 언제나 붐비는 곳이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공간인 백화점. 그 공간에 제품을 넣어주는 해외 바잉 MD로 서른 살 늦은 나이에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내 직업을 무척 사랑했다. 개인사업을 시작한 후에도 일상과 경계가 없는 시장조사는 몸에 밴 즐거움이었다. 대학 때 선택한 경영학이 나에게는 어려웠기에 방향을 조금 틀어 패션 머천다이징으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했고 다행스럽게 적성을 찾은 운 좋은 케이스였다. 직업적으로는 의류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의식주 전반의 트렌드에 민감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체질도 바뀌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백화점이 무척 피곤한 공간으로 느껴졌고, 대신 갤러리 공간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명품 매장들 틈 사이에 보석처럼 자리 잡고 있는 갤러리에는 당장 구매할 목적이 아니라도 당당하게 들어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직원에게 질문도 해본다. 대화가 잘 통할 때는 비밀스러운 방으로 안내하며 더 많은 작품을 보여주고 설명도 곁들여준다. 나를 잠재 고객이라 생각하는 듯 무척 친절하다. 작품을 보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생기고 트렌드도 보이며, 어떤 작품은 잘 팔릴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내 마음속으로 점찍어둔다. 나중에 그 작가의 작품 가격이 많이 오른 것을 보게 되면 비록 구매는 못했지만 마치 내 소유물의 가격이 오른 듯이 무척이나 뿌듯하다. 나의 안목을 스스로 확인받는 느낌이랄까. 나는 의식주를 넘어서서 여전히 시장조사를 하며 잠재 고객의 입장에서 관망 중이다.
New Bond street의 여러 갤러리에서 눈 호강을 하다가 북쪽으로 백화점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너무나 멋진 하우스가 나오는데 그곳이 The Wallace Collection이다. 위치상 백화점의 유혹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곳이다.
월리스 컬렉션에는 18세기부터 영국 귀족 가문이 5대에 걸쳐 수집한 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Hertford 후작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는데 그들은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에서 결혼을 통해서 부를 키워갔다. 약 5,500여 점의 예술품으로 구성된 컬렉션은 Hertford House에서 보관하다가 1900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저택은 너무 크지도 않고 아담하고 내부는 화려한 색상의 실크 벽지로 더 고급스럽다. 앤틱 가구와 예술품을 보면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이렇게 물질적인 호사를 누릴 수도 있구나, 또 한편으로는 귀족이 누릴 호사를 위해 평생 작업에만 몰두한 장인도 있었겠구나 싶다.
월리스 컬렉션은 네덜란드,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등 다양한 유명 작가의 작품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황금기 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보인다. 컬렉션 중에 로코코 시대의 프랑스 작가 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The Swing, 1768>이라는 작품이 유명해서 기대를 하고 찾아보았다. 콘솔 위에 걸려있는 작품은 자그마했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림이 참 예쁘다.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사랑스럽다. 언뜻 보면 예쁜 그림이지만 내용을 알고 보면 아름다움과는 전혀 동떨어지는 경박함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 그림은 로코코 시대의 유행 같았던 불륜과 삼각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젊은 와이프가 그네를 타고 있고 나이 많은 남편이 뒤에서 그네를 밀어주고 있다. 여자는 신나게 그네를 타며 덤불 앞에 숨어있는 애인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 뒷방 늙은이 같은 남편을 등지고 그네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열애 중인 애인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예쁜 구두 한 짝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늙은 남편 앞에 있는 작은 강아지는 숨어있는 애인을 보고 짖기 시작하고, 왼쪽에 큐피드 조각은 입에 손을 대고 쉿 하는 눈짓으로 강아지를 조용히 시키며 이 비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강아지는 아주 작아서 잘 안 보이니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찾아보아야 한다.
작가인 프라고나르는 외설적인 장르화와 연애하는 장면을 주로 그렸다. 장르화 외에도 풍경화, 초상화, 종교화등 다양한 유화를 550여 점이나 남겼는데, 날짜를 기록한 작품이 다섯 여점밖에 되지 않아서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여유롭고 사랑이 넘치며 즐거워 보이는데, 네덜란드의 풍속화와는 다르게 남녀관계와 에로티시즘이 느껴진다. 좀 도발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사회를 풍자하거나 낯 뜨거운 장면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음탕한 풍속화를 그린 건 아니었다. 루이 15세 때에는 부유한 예술 후원가들이 방탕한 사랑과 음탕함을 즐기며 관능적인 장면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그의 그림도 자연스럽게 트렌드를 따라가게 되었다. 이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 미술은 화려하고 우아하고 섬세하고 장식성이 강했는데, 이 형용사들로 <The Swing>은 충분히 설명된다. 이 그림을 모방한 작품들도 있고, 발레, 시, 음반커버, 뮤지컬등에도 파생되었다. 특히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서도 그네를 타다가 신발이 날아가는 장면이 패러디되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The Stolen Kiss, 1787>와 < 빗장 (Le Verrou ), 1777> 도 흥미롭다. 이 두 작품은 대놓고 도발적이며 비밀스러운 로맨스의 한 장면이다. 빗장을 잠그는 남성의 손을 포착해 내는 작가의 상상력은 대단하고 이 그림을 보며 즐겼을 귀족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곧 닥칠 귀족사회의 몰락과 어려움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본능에 충실하게 한껏 즐기고 있는 모습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Margarita Teresa 공주의 초상화가 반갑다. 이 작품은 마드리드 주재 총영사 John Meade (1775-1849)가 처음으로 수집했고, 이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다가 1852년에 4대 허트퍼드 후작이 인수해서 이곳 월리스 컬렉션에 자리 잡게 되었다.
1층에 전시되어 있는 무기와 갑옷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컬렉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럽에서 가져온 것들 뿐만 아니라 인도, 중동, 옛 오스만 제국 지역과 극동 지역에서 갑옷과 무기들을 사들였다. 또한 나폴레옹 3세때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Alfred Emilien de Nieuwekerke 백작과 무기 수집가이자 학자인 Samuel Rush Meyrick 경의 무기 수집품을 구입하면서 컬렉션은 완성되었다. 15세기, 16세기, 17세기의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들은 전쟁뿐만 아니라 창 시합이나 축제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아름답게 장식된 무기와 갑옷을 소장했다. 그러다 보니 훌륭한 무기는 예술 작품으로 분류 수집되었다. 컬렉션 중에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스 1세를 포함하여 유럽 통치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수준 높은 작품도 많이 있다. 신기하게도 말에게 입히는 갑옷도 있었다. 말이 저 갑옷을 입고 뛸 수 있었을까.
건물의 뒤쪽으로 Afternoon tea 카페가 연결되어 있는데 스콘도 너무 맛있고 브런치 정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렇게 좋은 박물관이 도심 한복판에서 100년 넘게 오랜 시간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니 참 풍요로운 도시 런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