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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Kenwood House

최초의 흑인귀족

by my golden age


네덜란드 황금기의 대표화가 Johannes Vermeer 작품의 소장처를 살펴보다가 런던의 Kenwood house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 여기는 어떤 곳이길래 그 귀한 37점 중의 한 점을 소장하고 있는 걸까? 켄우드 하우스는 런던 도심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햄프스테드 히스 Hampstead Heath 공원 한쪽에 위치해 있는 대저택이다. 아기자기한 동네 상점거리를 지나 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각각 고유의 이름을 가진 저택들이 부촌을 형성하고 있다.



켄우드 하우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아하지만, 저택을 둘러싼 정원과 호수의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가 방문한 늦가을에는 노란빛의 단풍이 환상적이었는데 역시 내 눈에만 아름다운 건 아니었나 보다. 영화 <Notting Hill>과 <Sense and Sensibility>를 이곳에서도 촬영했다고 한다. 정원에 있는 The Brew House에서 맛본 홈메이드 스콘과 커피 한잔의 여유도 너무 좋았다.




1616년경에 최초로 지어진 켄우드 하우스는 1754년에 William Murray가 매입하고 당대에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Robert Adam (1728-1792)에게 새로 건축을 의뢰한다. 로버트 아담은 26세 때 당시 귀족 자제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그랜드 투어로 로마를 다녀오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에서 영향을 받아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건축을 했다. 그의 건축물은 ‘아담 스타일’이라 불리며 엄청나게 인기를 얻었다. 켄우드 하우스의 라이브러리 천장은 아담이 가장 공들인 고대 건축의 돔 형식으로 매우 아름답고 고급스럽다.


(왼쪽벽의 그림) David Martin <Portrait of William Murray, 1st Earl of Mansfield, 1770>



세월이 지나 아일랜드에서 Guinness 맥주회사를 운영하던 Edward Cecil Guinness (Iveagh 백작, 1847-1927)이 켄우드 하우스를 매입하게 된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며 여러 지역에 자택을 소유하였기에 이곳에서 살지는 않았고 소유의 기쁨만 누렸을 거다. Iveagh 백작이 1927년에 사망하면서 켄우드 하우스는 63점의 컬렉션과 함께 국가에 기증된다. Iveagh 백작이 남긴 유산이라고 해서 켄우드 하우스를 <Iveagh Bequest>라고도 부른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아름답고 평화로움을 담은 올드 마스터들이 즐비하게 걸려있다. 천사처럼 예쁜 어린이의 모습과 과장되게 환상적인 풍광 속의 여인들, 사랑스러운 동물 그림이 이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데 Iveagh 백작이 특히 어린이와 여성의 초상화를 선호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뮤직룸을 지나 다이닝룸에 들어서면 드디어 귀하고 귀한 베르메르의 <기타를 연주하는 소녀, 1672>를 만날 수 있다. 사이즈는 작지만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뿐 아니라 Rembrandt의 자화상과 Frans Hals의 <Pieter van den Broecke, 1633>등의 명작도 만나 볼 수 있다.


Johannes Vermeer <The Guitar Player, 1672>
(오른쪽) H.M. Paget after A.S. Cope <Edward Cecil Guinness, 1st Earl of Iveagh, 1912>


Edward Cecil Guinness는 겨우 20세인 어린 나이에 기네스 양조장을 물려받아 세계 최대의 규모로 성장시켰고, 1886년에는 Arthur Guinness, Son and Company를 런던 증권 거래소에 상장시키며 막대한 부를 이루게 된다. 억만장자가 된 그는 빈민을 위한 공공주택을 기부하고 의학과 과학분야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자선가로서도 뜻깊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아일랜드와 런던 등 여러 곳에 집을 가지게 되면서 집안을 장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품을 구입하였다. 컬렉션의 대부분은 1887년에서 1891년까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수집되었다. 그는 런던의 Bond Street을 거닐다가 들어간 딜러샵과 인연이 되어 무려 212점의 회화를 구입하였는데,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골고루 구매하여서 컬렉션의 완성도가 매우 높다. 초상화가인 Joshua Reynolds경 (1723-1792)의 작품은 무려 36점이나 구매했다. 그의 컬렉션 중에서 가장 고가로 구입한 작품은 Rembrandt의 <Self-Portrait with Two Circles, 1665–1669>으로 1888년에 £27,500에 구매했다. Rembrandt는 자화상을 대략 40여 점 정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가 사망하던 59세에 그린 가장 마지막 자화상이다. 베르메르의 <기타를 연주하는 소녀>는 £1,050를 지불하였으니 비교적 저렴하게 구매하긴 했다. 200여 점을 한 번에 사들이다니 산업 자본주의에서 성공한 자의 위력이 느껴진다.


Rembrandt <Self-Portrait with Two Circles, 1665–1669>


켄우드 하우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걸려있는 초상화 두 점이 궁금하다. 특이하게도 흑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곳과 연관된 중요한 인물인듯한데 누구일까. 오른쪽의 초상화는 대법관이 되기 전 젊었을 때의 William Murray (Jean Baptiste작, 1684-1745)이고 왼쪽 초상화의 주인공은 Dido Elizabeth Belle로 Mikéla Henry-Lowe (b.1993)의 2021년도 작품이다. 이 작가는 런던에 거주하는 자메이카 예술가로 흑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초상화로 찬란하게 표현해 낸다.


그러면 Dido Elizabeth Belle (1761-1804)은 누구일까. 그녀는 노예였던 Maria Belle과 왕립 해군 장교인 John Lindsay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이 둘이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여러 기록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로 언급된다. 18세기에 혼혈 아이가 영국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자란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고 게다가 그녀는 정식 교육을 받고 상류층 여성들과 교류하며 30여 년간 켄우드 하우스에 머무르면서 낙농업을 감독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녀는 왜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을까.



Mikéla Henry-Lowe <Dido Elizabeth Belle, 2021>


1754년에 켄우드 하우스를 매입한 William Murray는 Dido의 아버지인 John Lindsay의 삼촌이고, 디도에게는 할아버지가 된다. John Lindsay는 서인도제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1765년에 Maria Belle과 사생아인 딸 디도와 함께 귀국한다. 세상에나, 이런 책임감 있는 장교라니 영화 같은 스토리다. 그는 자녀가 없었던 그의 삼촌 William Murray (Mansfield 백작 1세)에게 디도의 양육을 부탁한다. 백작은 1756년에서 1788년까지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법관이었다. 노예무역의 합법성을 조사하는 여러 사건을 다뤘고 1772년의 재판에서는 노예제도를 “혐오스럽다”라고 말한 기록으로 보아 노예무역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유언장에 조카 디도는 자유로운 여성이라고 명시하였고 그녀의 권리 보호를 약속하며 재정적 지원과 유산도 남긴다. 다른 사촌들과 비교했을 때 디도가 상속받은 금액은 완벽하게 동등하지 않아서 아쉽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귀족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영국 최초의 흑인 귀족이었을 거다. 그녀의 인생은 2014년도 영화 <Belle>로도 제작되었다.


David Martin <Dido Elizabeth Belle Lindsay and Lady Elizabeth Murray, 1778>

그녀의 초상화가 한 점 남아있는데 켄우드 하우스에서 함께 자란 사촌 Elizabeth Murray와 함께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의 디도는 전혀 노예의 딸로 보이지 않는다. 여느 귀족집안의 딸처럼 사촌인 엘리자베스와 매우 동등하게 보이고 오히려 디도가 더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이렇게 흑인과 백인이 동등하게 등장하는 모습은 18세기 영국 미술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디도가 입고 있는 실크드레스와 진주목걸이도 고급스럽다. 단지 깃털 달린 터번과 들고 있는 열대과일은 그녀의 사촌과는 조금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그림은 스코틀랜드 초상화가 David Martin (1737-1797)의 작품으로 훗날 켄우드 하우스가 매각되면서 스코틀랜드 Perth시에 위치한 Scone Palace으로 이 그림을 옮겨 보관하고 있다. 이후 디도는 영국으로 이민온 프랑스인과 결혼하였고 세 자녀도 두었다고 한다. 비현실적으로 영화 같은 스토리이다 보니 영화로도 제작되었나 보다.


미술사적으로 주목받는 그림은 아니지만 숨겨진 스토리를 알아가는 게 매력적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에는 언제나 부족함이 있고 시대 흐름에 맞게 제도를 고치고 변화시키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과도 닮은 점들이 보이고 위로가 된다. 자료조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놀랐다. 영국인들은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정신이 정말 대단하다. 몇 백 년 전에 세례 받은 날짜, 그곳에 참석한 사람이 누구인지, 상속뿐만 아니라 세세한 가계 지출 내용까지도 기록해 두고 보존한 것을 보면서 매번 놀란다. 옛 기록은 버리는 게 하나도 없는 나라인 거 같다.


런던 도심에서 멀지 않으니 풍광과 스토리를 한 아름 담아 오는 반나절 코스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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