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위한 컬렉션 vs 왕실 컬렉션
런던의 번화가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도 놓칠 수 없다. 내셔널 갤러리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보다 조금 더 늦게 설립되었고, 루브르 박물관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컬렉션의 방향은 상당히 다르다. 1824년에 개관한 내셔널 갤러리의 컬렉션 형성 과정에서는 안타까운 점이 매우 많았고, 컬렉팅에 있어서 매우 엉성한 출발을 했다. 이 즈음에 유럽 국가들은 왕실의 컬렉션을 국유화하며 대중에게 공개하는 추세였다. 바이에른 왕실 컬렉션,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 프랑스의 왕실 컬렉션 경우에는 왕실에서 수집한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렇듯 로열 컬렉션이 국가에 기증 된 많은 유럽 국가와는 달리 영국의 로열 컬렉션은 개인(왕실)의 컬렉션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내셔널 컬렉션이라는 것은 따로 없었다. 영국 왕실은 로열 컬렉션을 공공 미술관에 넘기지 않았고, 정부는 대중을 위한 미술관 설립에 무척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훌륭한 작품 수집 기회를 여러 번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영국이 컬렉션을 구축하고 국립미술관을 설립한 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국제적인 명성에 뒤처지지 않기를 원했고, 주변국들이 소유한 내셔널 컬렉션을 보며 경쟁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셋째, 대중의 교육을 목적으로 했고, 넷째로는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벌어진 시민혁명과 같은 대중의 선동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이 시기에 대규모의 중요한 컬렉션이 몇 차례나 시장에 매물로 나왔었다. 이는 다시 오지 않을 컬렉팅의 기회였다. 적어도 내셔널 컬렉션 수준이 되려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과 티치아노, 바로크 시대의 루벤스와 렘브란트, 네덜란드의 풍경화와 정물화, 18세기의 영국 인물화, 그리고 18세기 프랑스 화가인 장 앙투안 바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 정도는 포함되어야 했는데, 매물로 나온 컬렉션들은 이 작가들을 포함하는 최상급이었다. 영국 의회에서는 작품을 하나씩 사들이는 것보다는 매물로 나온 컬렉션을 한번에 구매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냐는 의견이 강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월폴 컬렉션(Walpole Collection), 칼론 컬렉션(Calonne Collection), 그리고 오를레앙 컬렉션(Orléans Collection) 등의 매입 기회를 번번이 놓치게 된다.
월폴 컬렉션은 영국의 정치가였던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1676~1745) 경의 수집품이다. 1777년에 존 윌크스(John Wilkes) 의원은 월폴 컬렉션 구매를 의회에 제안했지만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2년 후에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the Great, 1729~1796)가 컬렉션 전체를 획득하게 된다. 이 컬렉션은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칼론 컬렉션은 프랑스 혁명 직전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 1734~1802)의 컬렉션이다. 칼론은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개혁에 실패하면서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매각한다. 그러나 칼론 컬렉션은 영국의 조지4세(George IV, 1762~1830)가 매입하면서 로열 컬렉션에 속하게 되었다. 즉, 왕실 개인의 컬렉션이므로 내셔널 컬렉션과는 관련이 없게 되었다.
오를레앙 컬렉션은 프랑스 루이 15세의 섭정을 지냈던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Philippe II, Duke of Orléans, 1674~1723)가 1700년경부터 수집한 500여 점의 회화 컬렉션이다. 오를레앙 컬렉션은 유럽 최고의 개인 컬렉션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슬프게도 1790년대에 오를레앙 공의 증손자가 도박 빚을 갚지 못하면서 컬렉션은 해체되어 매각된다. 1798년 영국 정부는 그의 컬렉션 중 150여 점의 구매를 검토했으나, 결국에는 25점밖에 구매하지 못했고 현재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영국 정부가 이렇게 좋은 컬렉션의 구매 기회를 여러 번 놓치자 내셔널 갤러리를 서둘러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게 된다. 조지 하울랜드 보몽(George Howland Beaumont, 1753~1827) 경은 1823년에 자신의 컬렉션 16점을 솔선수범해 국가에 기증했고, 기증의 조건으로 미술관 건축과 앵거스타인 컬렉션의 매입을 요구하며 내셔널 갤러리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로열 컬렉션의 후원이 전혀 없는 백지 상태에서 미술품의 매입부터 시작하다 보니 내셔널 갤러리 설립으로서는 굉장히 미약한 출발이었다.
러시아 출신의 은행가로 런던에서 보험회사 로이드(Lloyd)를 인수한 앵거스타인(John Julius Angerstein, 1735~1823)은 주로 16~17세기의 작품으로 구성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가 사망한 후에 영국 정부는 앵거스타인 컬렉션 중에서 38점을 57,000파운드에 매입하고, 이듬해에 폴 몰(Pall Mall)에 위치한 앵거스타인의 자택을 임시 갤러리로 공개하게 된다. 이 컬렉션에는 라파엘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윌리엄 터너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윌리엄 호가스의 <유행에 따른 결혼(Marriage A-la-Mode> (1743~1745) 시리즈는 내셔널 갤러리의 대표 작품으로, 2층 중앙에 위치한 호가스와 영국 회화 전시실에 시리즈로 6점을 나란히 걸어 두었다. 상류층의 정략 결혼을 풍자한 스토리로 그림을 보면서 내용을 상상해봐도 흥미로울거 같다. 영국 정부는 앵거스타인 컬렉션을 매입함으로써 조지 하울랜드 보몽 경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1830년에는 성직자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윌리엄 홀웰 카(William Holwell Carr, 1758~1830)가 35점의 회화를 내셔널 갤러리에 유증(유언으로 재산의 일부를 무상으로 타인에게 주는 행위)으로 남겼고, 이 컬렉션도 내셔널 갤러리의 중요한 초기 컬렉션이 된다.
이때까지 기증받은 주요 작품 수를 다 합쳐야 겨우 100여 점이 넘는다. 이렇듯 시민 혁명을 겪은 프랑스와 왕정 체제를 유지해 온 영국은 대중을 위한 미술관 건립에 있어서 애초에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설립했다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다르다. 왕정의 재산을 대중과 공유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의 컬렉션이 그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